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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 중 '마감'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그리고 순간 순간 마감과 마주합니다. 때로는 인생 자체가 마감에 비유되기도 하지요. 지금 이 시각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을 '마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1. 21:30 - 오늘은 꼭! 반드시!

내일 아침까지 넘기기로 한 대본 초고를 반도 다 쓰지 못했다. 안 자고 더 놀겠다는 28개월, 10개월 두 아이들을 반 협박해서 씻기고 나니 벌써 9시 반. 저녁 먹은 식탁은 겨우 치웠지만, 싱크대 개수대에 그릇이 가득 쌓여있다. 하루 종일 두 아이들이 논 거실은 엉망이다.

남편에게 장난감만 대강 치워 달라 부탁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작은애는 잠이 들었는데도 젖을 물고 놓지를 않는다. 큰 애는 자장가 불러 달라, 옛날 얘기해 달라, 쉬가 마렵다, 물이 마시고 싶다, 갖가지 요구를 한다. 왜 아이들은 혼자 잠들지 못하는 걸까, 낮잠도 쥐꼬리만큼 자놓곤 왜 잠을 안 자고 저럴까. 나 몰래 이 녀석들이 산삼을 먹었나… 그러다 결국 나도 잠이 들어 버렸다.

#2. 06:20 - 결국 마감을 또 넘기고...

아, 또, 또…. 어제도 밤에도 글을 쓰지 못했다. 자정이 지나 비몽사몽 잠에서 깼지만 두 시간이 멀다하고 깨서 젖을 찾는 둘째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더기 잠을 잤지만 그래도 일찍 잠에 든 덕분에 출근 준비하는 남편과 함께 일어났다. 아침은 차려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채소와 과일로 주스를 만들어 출근길 배웅을 했다.

엄마가 곁에 누워있지 않으니 둘째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모두 일어났다. 덕분에 출근하는 아빠 얼굴을 한 번 더 봤다. 어제 밤에 못쓴 글을 아침에라도 쓰려 했는데, 부지런한 새 나라의 우리 집 아이들. 어제 저녁에 쌓아둔 저녁 설거지를 하고, 서둘러 아이들 아침을 준비한다. 두 아이를 앞으로 옆으로 앉히고 아침을 먹이고, 치우니 아침 8시 10분 전이다.

#3. 08:00 - 아이들이 노는 사이... 이때가 기회

장난감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한다.
 장난감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한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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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른 아이들은 둘이 엉켜 논다. 이때가 기회. 서둘러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어제 못한 일을 한다. '작가들이 아침까지 보낸다고 한 대본은 빨라야 점심 때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만, 어쨌건 벌써 두 번이나 마감을 연기한 터라 마음이 바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시간 전까지 보내야 한다.

다행히 노느라 정신없는 아이들.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서 일을 해야 한다.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붙잡고 씨름할 시간이 없다. 무조건 써내려가고 본다. 머리로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엉덩이가 쓰는 거다. 신기한 건 몇날 며칠 나가지 않던 진도가 급하니 저절로 풀리고 있다. 물론 마음에 들진 않지만.

#4. 9:00 - 과자로 우는 입을 막고, 동요 CD 틀고

컴퓨터가 켜져 있으니 큰 애가 자꾸만 책상 앞으로 온다. 벌써 안다. 아니, 진즉부터 알고 있다, 컴퓨터는 몹시 재미난 거란 걸. 엄마 일 해야 한다고 사정도 하고 야단도 쳐보지만, 거실과 공부방을 왔다 갔다 한다.

냉동실에 얼려둔 쿠키 반죽을 꺼내 급히 과자를 한 판 구워 아이들 손에 쥐어주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입에 먹을 게 들어가니 세상이 조용하다. 그러나 과자가 아무리 많아도 길어봤자 30분이다. 이번에 나를 도와줄 보모는 동요 CD. 큰 애가 동요를 들으며 춤을 추니 작은 애도 엄마를 찾지 않고 덩달아 신이 나 웃으며 논다.

과자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한다.
 과자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한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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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30 - 작은 애가 자는 황금 같은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책상 앞에서 잠 든 둘째. 아이 보랴, 일 하랴... 정신이 없다.
 책상 앞에서 잠 든 둘째. 아이 보랴, 일 하랴... 정신이 없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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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같이 일어난 작은 애가 졸리운 시간이다. 누나와 함께 잘 놀더니 엉금엉금 기어 의자를 붙잡고 울기 시작한다. 작은 애 젖을 물린 채 자판을 두들기며 시계를 보며 일을 한다.

책상과 엄마 사이에 껴서 젖을 먹으며 잠이 드는 둘째. 둘째도 딱하고 이렇게 까지 하며 일을 하고 있는 나도 딱하다. 밤에 왜 일을 안 하고 자서 둘 다 고생일까.

언제나 때늦은 후회. 혹시나 잠에서 깰까 잠이 든 둘째를 한참 무릎에 뉘이고 일을 하다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서야 방에 뉘이고 그야말로 눈썹을 휘날리며 일을 하기 시작한다.

작은 애가 자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6. 10:00 - 도와줘요 뽀로로!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같이 놀던 동생이 잠을 자니 심심해진 큰 애가 자꾸만 책상 옆에 와 저도 궁금하다며 보여 달란다. TV를 틀어주고 우유와 과일, 과자가 잔뜩 올라간 간식상을 차려주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우유를 더 달라, 다른 과자를 달라 귀찮게 한다. 그러더니 TV를 끄고 내 옆에 앉아 컴퓨터로 뽀로로를 보고 싶단다. 마감 시각은 다가오고, 아직 일은 다 못 했고. 좀처럼 주지 않는 스마트폰까지 쥐어줘 봤지만, 10분을 넘기지 않고 다시 내 팔을 잡고 흔든다. 어쩔 수 없이 창을 하나 더 열어 뽀로로 동영상을 틀어주고, 자판을 두들긴다. 햄릿이 그랬던가, "한 눈으로 울고, 한 눈으로 웃는다"고. 한 눈으로 뽀로로를 보며, 한 눈으로 대본을 본다.

"뽀로로야 부탁해"...우리 집 보모 뽀로로
 "뽀로로야 부탁해"...우리 집 보모 뽀로로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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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1:00 - 재깍재깍...다가오는 마감 시간

뽀로로와 함께 대본을 썼더니, 쓰는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버렸고, 겨우 한 시간 동안 오전 낮잠을 잔 작은 애가 잠에서 깨 울기 시작한다. 잠을 푹 자지 못한 아이를 달래기 위해 다시 젖을 물리고 책상 앞에 앉는다. 겨우 둘째를 진정시키고, 큰 애에게 사탕을 물리곤 레고 블럭을 꺼내 거실 중앙에 부어주었다. 블럭 더미에 정신을 팔고 놀기 시작하는 두 녀석. 다시 나는 폭풍 작업에 들어간다.

#8. 11:30 - 똥줄이 탄다!

큰 애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소리친다. "닦아줘요! 도와줘요!" 달려가 보니, 응가를 쌌다. 뒤처리를 해주고 돌아서니, 작은 애가 기저귀에 응가를 쌌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전문용어. "똥줄이 탄다!"

작은 애를 씻기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10분이 멀다하고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니 일이 될 리가 없다. 그래도 시계는 재깍재깍.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 한숨이 나오지만, 지금은 한숨 쉴 시간도 없다!

#9. 12:30 - 폐허가 된 집

엄마 없이 노는 게 지겨워진 아이들은 좋아하는 DVD를 틀어줘도 계속 공부방으로 들락날락. 아이들의 영상매체 중독은 다 내 책임이다 싶지만, 혼자서 두 아이 키우며 일까지 하자니 보모로 TV와 DVD를 들일 수밖에 없다.

겨우겨우 대본을 마무리 해 메일을 보내고 거실로 나와 보니 거실은 장난감과 간식 부스러기로 폐허가 따로 없고, 두 아이의 얼굴은 얼룩덜룩, 엄마 없는 애들처럼….

그래, 오전 내내 엄마 없는 아이들이었지. 장난감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하고 점심을 준비한다. 아, 숨가쁘다.

마감에 허덕이는 인생 경력 25년

엄마 일하는 동안 혼자 노는 아이들
 엄마 일하는 동안 혼자 노는 아이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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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미리 조금씩조금씩 써두었다면 이렇게 종종거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왜 꼭 마감에 임박해서야 일을 하는 걸까.

벌써 여러 편 쓴 대본. 매 작품마다 마감을 넘기고, 마감에 쫓기고. 논문 쓸 때도 그랬고, 페이퍼도 그랬고, 시험공부도 그랬다. 더 뒤로 돌려보면 여름방학 일기도 개학 전날 한 달 치를 몰아서 쓰곤 했다. 마감에 허덕이는 인생 경력 25년이 넘는구나.

엄마는 늘 잔소리 하시지. 미리미리 해라. 그러나 이 마감병에 전염력이 있는지 평생 성실하게 마감에 쫓기지 않고 살아오신 엄마마저 마감에 쫓겨 대본 쓰는 나를 몇 번 보시더니 마감 시간에 쫓겨 학교일을 하시는 게 아닌가!

마감에 쫓겨 허덕이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일을 해보려 노력해봤지만, 시간이 여유롭다 보니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안 하던 책상 정리에, 한 번 하면 날을 샌다는 서랍 정리까지... 그뿐만이 아니다. 써야할 글은 안 쓰고 인터넷 바다에서 열심히 파도타기를 하다가, 결국 몇 번이나 인터넷 선을 잘라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끊고 작업을 할 땐 모두가 해봤음직한 프리셀 게임에 빠졌다.  

부릴 여유 다 부리고서야 발등에 떨어진 불에 화드득 놀라 몰아치는 작업. 우리끼린 이런 여유를 예열시간이라고 하지만, 길어도 너무 긴 예열이다. 언제쯤이면 대가들처럼 서두르지 않고 성실한 글쓰기를 할까, 난 언제 철이 들까, 반성을 해보지만, 대가들도 '딴짓' 엄청 하고, 마감이 닥쳐서야 쓰시지 않을까? 아마 분명 그러실 거야, 한다. 오늘도 난 철없는 소리 하며 '대본 수정 마감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어' 룰루랄라 한다.


태그:#마감,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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