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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연소 항일열사로 여수출신의 주재년(朱在年, 1929-1944) 기념관이 올해 4월 말 그의 고향에서 개관된다고 한다. 필자는 5년 전인 2007년에 주재년 열사의 고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열사의 친척인 주충배씨를 뵙게 되어 많은 도움과 중요한 증언들을 들었다. 이후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열사와 관련된 글을 작성하여 두었었다.

그러나 당시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 준비로 바빠 주재년 열사의 독립활동에 대해서는 발표하지 못했다.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열사의 업적을 소개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우등생 주재년, 그를 소개합니다

국민학교 시절
▲ 주재년 열사의 모습 국민학교 시절
ⓒ 주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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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년은 1929년 1월 28일 전남 여수시 돌산읍 금성리 559(작금마을)에서 농민 출신인 주순지(1879-1945?)와 김순심의 3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여수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훈련시킨 호국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돌산도는 이순신 장군의 지시로 조선 수군이 둔전을 경영하여 식량을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고향인 작금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쌓은 4km에 달하는 석성(石城)이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을의 수재였던 그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고장에 관한 빛나는 항일의 역사 전통을 체득하였다.

유년 시절 마을 서당에서 주상규(朱相奎) 선생으로부터 천자문, 한글, 일본어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그는 명랑하고 활달하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주 열사의 후배 1930년생 박채현님의 증언).

5년간의 서당교육을 마친 상태에서, 주재년은 1939년 4월 1일 돌산국민학교에서 치른 입학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3학년으로 입학하였다. 3·4학년 모두 성적 우등상을 받았고, 5·6학년시기의 성적도 우수하였다. 매 학년 운동을 좋아하고 기력도 셌다고 학적부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6학년에는 개근상을 받았다. 부모를 도와 농사일도 하면서 돌산국민학교(당시 심상소학교에서 개명)를 1943년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여섯째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주재년임.
▲ 돌산국민학교 졸업(1943년) 사진. 여섯째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주재년임.
ⓒ 주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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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점 만점을 기준으로 학업 성적이 각 교과목에서 대부분 9점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5학년과 6학년에 이수한 습자 과목은 각각 9점을 받았다. 동기생 주경용(1930년생)님은 "주 열사는 공부도 잘할 뿐만 아니라 습자는 우리 반에서 최우수여서 늘 칠판에 게시되었다"라고 말하였다. 또 3학년 시절에 조선어 과목을 이수하였는데, 9점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 때문에 1940년부터는 조선어 교과목을 배울 수 없었다(여수 돌산초등학교의 <학적부> 참조).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일본말만을 '국어'로 배워 쓰도록 하고, 우리말이나 한글을 쓰면 일본 선생에게 매 맞고 청소를 하는 등의 벌을 받았다(동기생 주경용님의 증언). 주재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 일제의 수탈은 악랄하였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조선의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하였다.

징용·징병에 이어 식량의 강제공출을 자행하였고 심지어 학교·교회의 종이나 집에 있는 놋그릇까지 강탈하여 갔다. 여수 돌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동기생인 이상재(1927년생)님은 "일제시기는 지긋지긋한 시기로, 마음대로 말할 자유가 없었고 사람·쇠·소·나락(볍씨)·목화 공출로 시달렸으며 특히 사람 동원에 귀신 수준이었다. 특히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여 없는 죄도 만들어 처벌하였다. 나도 신검을 받은 뒤 징병 대기 중에 해방을 맞았다. 2년 후배들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는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많다. 나이 많은 분은 보국대에 뽑혀 탄광 등에 끌려갔다"고 증언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특히 조선의 남쪽지방인 목포와 더불어 여수는 일본군의 군사 요새지역이어서 식민지 모순이 요동치고 있었다. 따라서 주재년은 일제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민족의 현실을 날카롭게 인식하였다.

졸업 이후 그는 가정 형편상 다음 해에 중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부모를 돕고 있었다. 그가 민족의식을 확고히 정립하는 계기는 약장수 노릇을 하고 있던 송씨 성을 가진 40대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집안사람들은 그를 '송 선생'으로 불렀다. 1942년에서 1943년에 걸쳐 송 선생은 주재년의 사랑채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송 선생은 주재년의 중형인 주재연(朱在淵, 1921-1943)의 중병을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그를 통해 주재년은 일제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주재년은 그로부터 "대동아전쟁(당시 일제가 부른 용어, 태평양전쟁을 지칭함)이 시작된 이래 일본은 남방에서 큰 전과를 얻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 일본은 국토가 좁고 물자도 부족해 전황이 불리하다. 현재 일본 국내에 있는 물자가 모두 바닥이 나면 패망할 것이다. 조선은 미국과 영국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또 국민학교 재학 중에 "옛날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인데, 명치 43년(1910)에 병합으로 인하여 한 나라가 되었다"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1943년 9월 초순 경 일본 대만 간 연락선 야마토 호의 해난 침몰 사건 등을 전하여 들었다. 이에 그는 전쟁 상황이 일본에 불리하며, 조선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조선만세, 조선이 빛난다"...일제 비판

게다가 1943년 9월 23일 24일경 나무를 하러 가던 도중에 율림리로 가는 도로 곁 민가가 있는 곳인 자신의 목화밭 돌담장의 가운데 큰 바윗돌 앞쪽에 '朝鮮日本別國(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日本島鹿敗亡(일본섬놈들은 패망한다), 朝鮮萬歲(조선만세), 朝鮮之光(조선이 빛난다)'이라는 글자를 새겨, 일제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국가기록원 소장 자료
▲ 주재년 형사재판 판결문 국가기록원 소장 자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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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그가 바위에 글씨를 써서 불령한 행위를 하고 전쟁시국의 인심을 혼란시키고자 하는 말을 수시로 유포하고 돌아다녔다고 죄상을 기록하였다(<소화18년 형공 제999호 판결문>). 그러나 그의 행적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바위 글씨 판각은 조선 민족의 기개를 만천하에 알린 사건이었다.

사흘 만에 바위글씨는 일제 경찰에 발견되었다. 일제는 바위에 새긴 글씨의 내용에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자 경악하였다. 바위 글씨의 내용이 식민지 조선인을 현혹하여 보다 적극적인 민족 행동으로 비화할까 두려워한 일제는 경찰을 동원하여 글씨를 새긴 민족운동가를 색출하는데 마치 전쟁이나 발생한 듯이 광분하였다.

일제는 경비정 7, 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다. 그래도 반일운동가를 잡지 못하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공갈했다. 마을이 위기에 이르자 주재년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고자 하였다. 주 열사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순사 대장 어디 있소. 그 일은 내가 했소. 어르신들을 괴롭히지 마시오"라며 자수했다. 당시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도한 마을 주민 박채현님은 "일본 경찰이 충격을 받을 만큼 배포 있는 행동이었다"고 회고했다.

주 열사는 여수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주 열사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4개월 동안 갇힌 채 '어린 나이에 단독으로 범행을 했을 리가 없다'며 '배후세력'을 대라는 강요와 함께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1944년 1월 21일 순천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에게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을 적용하여,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하였다.

판결이 있은 다음날 주재년은 풀려났으나, 일제의 혹독한 고문 때문에 열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집에 돌아올 때 담장을 잡고서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석방된 지 한 달여 만인 3월 초에 고문 후유증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만 15세였다. 주재년은 서거하기 직전에 "옷을 반듯이 입혀주고, 나 죽은 뒤에 좋은 세상이 온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주재년의 장조카 주충배님(1939년생)이 어머니로부터 들은 내용의 증언).

자신의 삶 꽃피워 보지 못한 채 쓰러진 주재년

이렇게 나라 없는 식민지 현실을 치열하게 타개하고자 한 항일열사 주재년은 자신의 삶을 마음껏 꽃피워 보지 못한 채 쓰러졌던 것이다. 이런 일제의 고문치사에 대해 부모는 말 한마디 못하고 아들의 시신을 밤에 집 근처의 골짜기에 매장하였다. 해방 무렵 주재년의 아버지도 자식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화병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하였다. 주재년 열사의 무덤은 아래의 사진과 같이 초라한 돌무덤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열사의 무덤 사진을 찍으면서 슬픔과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바위글씨를 남긴 목화밭 근처 골짜기에 있음
▲ 주재년 열사의 무덤 바위글씨를 남긴 목화밭 근처 골짜기에 있음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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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년 열사는 보고 싶어 하던 일제의 패망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그를 대신하여 그들의 종말을 보았다. 장조카 주충배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작은 아버지의 고문치사'를 입증하기 위해 관련 사법기관을 발이 닳도록 찾아갔으나 모두들 귀찮은 존재로만 여겼다"고 그간의 고충을 말했다. 2006년에 주 열사의 재판 판결문을 국가기록원에서 찾게 되었고, 그 해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주재년의 생가에서 찍음
▲ 장조카 주충배님의 모습 주재년의 생가에서 찍음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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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된 뒤에도, 최근까지 주재년 열사에 대한 기념사업은 지지부진하였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열사의 친척인 주충배씨와 경향신문의 배명재 기자 그리고 여수 언론인들이 전남도청과 여수시청의 공무원을 상대로 한 뜨거운 충고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이번에 주재년 기념관이 건립된다고 한다. 이 작은 글을 통해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아울러 우리 민족 구성원들도 주재년 열사의 너무도 짧은 삶과 빛나는 항일투쟁을 기억하고 계승하기를 바란다.


태그:#주재년, #소년 항일열사, #주재년 기념관, #독립유공자, #조선임시보안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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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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