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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린 청소년 노동 관련 내용. 이 교과서에서 노동을 다루는 것은 사진의 <과제2>가 전부이지만 해당 내용과 관련한 설명은 단원 본문에 나와 있지 않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린 청소년 노동 관련 내용. 이 교과서에서 노동을 다루는 것은 사진의 <과제2>가 전부이지만 해당 내용과 관련한 설명은 단원 본문에 나와 있지 않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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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2 : <자료 2>와 같이 청소년의 노동 인권이 침해된 경우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는지 조사해 보자."

중학교 <사회1>(지학사, 이진석 외) 교과서 '인권 의식의 성장과 헌법'이란 제목의 소단원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건 이게 전부다. 또 과제가 주어진 만큼 해당 단원에서 관련한 내용이 있어야 하지만 <자료2>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 단원에서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임금 체납이 왜 노동인권 침해인지, 최저임금제도는 어떤 취지로 만들어졌는지 설명하지 않고, 단지 구제 방법을 '조사하라'는 과제만 던지고 있다.

사회교과목 교과서, 노동 다룬 내용 1%도 안돼

<오마이뉴스>는 사회 관련 과목 교과서를 다양한 각도로 분석해 제도권 교육과정에서 '노동 교육'의 현 주소를 확인해 봤다. 2012년 1학기 시중에 출판된 사회교과목 교과서 62권을 모두 조사한 결과 총 1만7260쪽 분량 가운데 노동을 다룬 내용은 159쪽으로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에는 위에 예를 든 사례처럼 별다른 설명 없이 '노동'이라는 단어만 나오거나 관련된 내용이 아주 일부분인 경우도 포함돼 있다. 또 대부분의 과목이 선택과목이라 실질적으로 교과서에 '노동'을 배울 수 있는 분량은 더 적다. '노동'을 단원으로 다룬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고 대개는 '시민의식', '인권', '경제주체' 등을 배우면서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반면 시장경제에서 자본이나 기업의 역할과 권한을 다룬 내용은 전체 700여 쪽으로 교과서의 4% 가량을 채우고 있다. 단순 비교만으로도 교과서 분량에서 4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노동과 시장(또는 기업)이 대립되는 개념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러한 교과서 상의 비중차이는 사회 인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기업과 사용자(자본가)는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반면 노동과 노동자는 그 가치와 권리에 비해 의무나 권한 행사 시 부작용이 강조되는 상황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경우 그 구성의 정당성이나 법적근거를 명시한 교과서는 단 3권뿐이었다.

이러한 현황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미래에 임금노동자가 되는 상황에서 상당히 모순이라는 지적이 노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 있어왔다. 현재의 교과과정에서는 학생 자신들이 앞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의식을 더 많이 익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는 중학교 <사회1>·<사회3>, 고등학교 <사회>·<정치>·<경제>·<사회·문화>·<법과 사회>·<법과 정치>·<생활과 윤리>·<상업경제>등 2012년 1학기 검증교과서를 대상으로 진행했다. 해당 과목 교과서 총 63권 가운데 중학교 <사회3>(금성출판사, 서태열)은 시중 서점에서 구하지 못해 제외됐다.

또 실업계 교과인 <기업경영>은 기술가정과목으로 분류돼 있어 이번 조사에서 빠졌다. 중학교 <사회1, 2>, 고등학교 <사회>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모두 선택과목이다.

'노동'은 기업 활동에 종속된 요소인가?

사회교과서별 노동교육 분량
 사회교과서별 노동교육 분량
ⓒ 봉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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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62권의 교과서 목차를 훑어보자. 대부분의 교과서가 큰 단원 아래 2~3개의 중단원이 있고 그 아래 소단원이 2~5개 있는 형태로 구성된다. 각 출판사마다 개성이 있긴 했지만 동일한 집필기준으로 작성된 같은 과목 교과서들의 내용 전개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각 단원 제목에서 '노동' 혹은 '근로'라는 말을 찾기 쉽지 않았다. 62권의 교과서 중 노동 또는 근로라는 단어를 '대단원'에 쓴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중단원에 쓴 교과서는 7권, 소단원에 쓴 교과서는 9권이었다. 이 단원들도 대부분 경제나 사회갈등을 다루면서 노동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는 수준이다. 과목은 <사회3>, <사회>, <법과 정치>, <사회·문화>, <법과 사회>, <생활과 윤리>에 한정됐다.

본문에 들어가서도 '노동'은 홀대 받았다. 전체 사회과 교과서의 1%도 안 되는 분량 가운데 노동을 '노동'이라고,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제대로 명시한 책은 드물었다. '노동'(노동3권, 노동자, 노동력 등 포함)이라는 단어는 모든 교과서를 합쳐 총 66번 나왔다. 평균 1회 등장이다. 조금 더 많이 쓰인 '근로'라는 단어는 총 89회 등장했다. 이는 눈으로 단어를 센 수치여서 오차가 있을 수 있다.

'근로'라는 단어가 '노동'보다 많이 사용된 것은 법정용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두 단어 대신 '용역'을 사용하는 교과서도 있었다. 실업계 교과인 <상업경제>에서는 경제객체를 '재화'와 '용역'으로 분류해 설명했다. 여기서 '용역'은 대개의 서비스노동을 의미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업(사용자)과 노동을 다룬 분량은 4배 이상 차이가 나고 있었다. 특히 <경제> 교과서 5권을 따로 분석한 결과 총 1368쪽 중 기업을 다룬 내용은 88쪽인 반면 노동을 다룬 내용은 20쪽 가량이었다. 다른 교과들은 인권이나 법 등을 다루면서 '노동'을 언급하지만 <경제> 교과서에서는 경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로 설명한다. 보다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서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동을 설명하더라도 기업이나 시장을 설명하는 단원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을 하나의 독립된 가치로 전혀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사갈등의 문제를 'Ⅲ. 경제 주체의 합리적 선택/ 2. 효율적인 기업 경영과 기업 윤리/ ① 기업의 생산 활동'이라는 단원에서 다루는 식이다. '노동'의 성질 가운데 하나일뿐인 '기업의 생산 활동'으로만 정의하고 있다.

경제를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이라 정의하는 교과서에서 '생산'의 주체인 노동 분야를 충분히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 '비정규직'... 교과서에 없는 단어들

교과서별 노동 관련 단어 통계
 교과서별 노동 관련 단어 통계
ⓒ 이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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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노동과 관련된 단어들은 교과서에서 얼마나 소개하고 있을까.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 요인 가운데 하나인 '구조조정', '정리해고'의 문제점 정도는 소개돼 있지 않을까?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는 지난해 희망버스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사회의 최대 현안이 됐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문제점을 알 수 있는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차례 검정교과서가 개정되는 동안 이 같은 내용은 반영되지 않았다. IMF 사태와 그 극복과정을 설명한 교과서는 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을 서술한 교과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교과서를 집필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또 이걸 반영해 출판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정리해고'라는 단어 자체를 교과서에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은 어떨까? 통계청의 발표로도 600만 명이 넘고 일각에서 '비정규직 1000만 명 시대'라는 말도 나오는 상황이다. 중고등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청소년 노동도 모두 비정규직이고 현재 상황에서 학생들이 졸업 후에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이를 설명한 교과서는 5권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청년실업'이나 '최저임금' 등에 관한 설명도 부족했다. 청년실업은 5권의 교과서에 나왔고, 최저임금제도는 17개 교과서에서 내용을 실었다. 산업화로 인한 '노동소외'나 '노동착취'의 전례도 10권의 교과서 외엔 다루지 않고 있다. 이 중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을 소개한 교과서는 5권에 불과했다.

노동자의 권리나 이를 구현하기 위한 법도 교과서에서 한정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조사한 62권의 교과서 중 16권에서 '노동 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설명했다. 이 가운데 노동 3권이 담긴 '헌법 33조 1항' 전문이 함께 실리거나 소개된 교과서는 5권에 불과했다. 나머지 가운데 5권은 별 다른 설명 없이 '노동3권'이라는 단어만 실렸다.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근로기준법'은 16권의 교과서에서 기록했다. 대부분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우게 되는 <사회1>(총 15권 중 7권)과목에 내용이 실렸다. 그밖에 선택과목인 <정치>(총 4권), <경제>(총 5권), <상업경제>(총 8권)는 한 권도 근로기준법을 다루지 않았다.

"정부, 기업은 경제 성장의 주역"... 노동자는?

중학교 3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린 내용.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묻는 질문을 던지며 파업과 협상 장면을 보여준다. 이 <탐구활동> 바로 앞 페이지에는 '노동자의 권리'를 설명하며 노동 3권을 알려준다. 앞선 설명에서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파업과 같은 단체 해동을 할 수 잇는 단체 행동권'이라고 알려주지만 이어지는 과제에서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비교하며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묻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린 내용.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묻는 질문을 던지며 파업과 협상 장면을 보여준다. 이 <탐구활동> 바로 앞 페이지에는 '노동자의 권리'를 설명하며 노동 3권을 알려준다. 앞선 설명에서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파업과 같은 단체 해동을 할 수 잇는 단체 행동권'이라고 알려주지만 이어지는 과제에서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비교하며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묻고 있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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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한 제도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제가 오히려 저소득층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저임금제로 인해) 일부 근로자들의 소득은 올라가지만 다른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경제>(법문사, 윤동균 외) 교과서가 최저임금제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 중 일부다. 물론 위와 같이 최저임금제가 실업률을 상승시킨다는 이론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최저임금과 실업률이 상관없다는 이론도 있는 만큼 교과서에 단정적으로 실릴 만큼 다수가 공감하는 내용이라곤 볼 순 없다.

특히 최저임금제는 헌법 32조 1항이 보장하는 것이지만 이를 설명하지 않고 그 문제점만 쓴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해당 교과서에서는 위 내용에 이어 "최저임금제는 파생되는 문제점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행해져야 한다"며 객관성을 도모하고는 있지만 최저임금제가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라는 인식을 주지 못한다.

"경제 안정화에 있어 가장 큰 몫을 담당하는 것은 역시 정부이다. (중략) 기업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주역이다. (중략) 근로자의 소득은 그들이 창출해 낸 생산성의 범위 내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는 표현은 계속 등장한다. <경제>(두산동아, 조도근 외) 교과서는 경제 주체를 정부, 기업, 노동자(이 책에서는 근로자라 표현), 소비자로 나눠 각각을 설명하고 있다. 위는 그 첫머리들만 따온 것이다. 살펴보면 정부, 기업 소개와 근로자(노동자)를 소개하는 어감의 차이가 크다. 정부와 기업에는 '경제 안정화',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반면 근로자는 그 몫을 규정하는 말로 시작한다.

노동자 부분에 이어진 내용을 살펴봐도 "(생산성 범위) 이상을 요구하면 기업에게 부담이 되며, 그러면 근로자도 일자리를 잃게 될 것", "조화와 협조 속에서 기업을 성장시키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서술한다. 노동자가 경제구조에서 매우 수동적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노동조합(노조)에 대한 편향된 시각도 많았다. 노사 갈등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사진으로 노동자들의 시위나 파업 현장이 실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3>(미래엔, 최병모 외)은 "바람직한 노사 관계의 방향을 알아보자"라는 질문 하에 각각 '노조의 파업', '노사 협상'이란 사진 설명의 두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노사협상'은 단체교섭권을 행사하는 것이고 파업은 단체행동권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두 권리는 아주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파업 사진을 노사 협상 사진과 비교해 '바람직한 노사 관계'를 가르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노동 3권만은 제대로 가르치자"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중고등학교 사회교과목 교과서 62권.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중고등학교 사회교과목 교과서 62권.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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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교과서에 노동 관련 내용이 부족한 현상을 사회적 편견 때문으로 진단했다. 송태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고용노동연수원 교수는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여전히 노사관계 교육을 하면 전투적 투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규정한다"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피고용인의 지위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와 관련된 교육은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노동3권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적인 권리라는 정도는 교과서에서 충실하게 보여줘야 한다"며 "또 노동조합에 부정적인 인식만을 심어주는데, 노조는 사회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인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조에 관한 잘못된 인식은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칠 뿐이다"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2007년 한국노동교육원 소속으로 노동부의 연구용역을 받아 실시한 '학교노동교육 내실화를 위한 정책대안 연구'에 참여한 바 있다. 한국노동교육원은 2008년 한국노동교육원법이 폐지되면서 현재는 고용노동연수원이란 이름으로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부속기관이 돼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측은 교육과정안을 논의할 때 최대한 노동과 관련된 내용을 고려한다는 입장이다. 교과부 학교지원국 관계자는 "교육과정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기업을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가면 꼭 근로자의 권리와 관련된 부분을 넣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특정 집단의 시각으로 교과서에서 근로자와 관련된 내용을 넣거나 빼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말했다.

또 "교과서가 중복학습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교과서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며 "이는 노동과 관련된 주제 뿐 아니라 다른 주제들도 마찬가지다"고 강조했다.

현재 중·고등학교 사회 관련 교과서는 <국사>나 윤리 관련 과목(<도덕>, <시민윤리>, <윤리와 사상>, <전통윤리>) 같은 국정교과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교과서다. 검정교과서는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의 교육과정안에 따라 각 출판사에서 집필을 하고, 검정위원회를 통과해야 출판할 수 있다.


태그:#노동, #정리해고, #교과서, #비정규직, #노동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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