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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혼상제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기자행위를 통해서 아이 낳기를 기원하고, 낳은 뒤에도 여러 가지 민속행사를 치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 제사 등 끝없이 이어지는 통과의례, 즉 관혼상제를 겪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당연한 의례이면서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합니다.

 

문화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통과의례나 관혼상제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겪는 과정은 비슷합니다. 관혼상제 가운데 장례식은 단순히 주검을 처리하는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 장례식은 죽은 영혼이 다른 세상에 간다는 사상 즉 내세관이나 영혼관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서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고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글에서는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살았던 소그드인의 장례풍습과 장례 도구인 옥스아리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2. 소그드 사람의 옥스아리

소그드 사람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살은 새나 개에게 먹이고 뼈만 옥스아리라고 하는 장례 도구에 담아서 묻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옥스아리는 소그드 사람이 주로 사는 소그디아 지방 즉 지금의 펜지켄트에서 많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타니 탐험대에 의해서 쿠챠에서 수집된 사리용기가 소그드인의 장례도구라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이 사리용기가 문헌에 소개된 것은 마리오 부싸알리의 책을 통해서입니다. 이태리 사람인 마리오 부싸알리는 이것을 사리용구라고 하면서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하면서 그림이나 무늬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우연히 필자는  2011 년 12월 류코쿠뮤지엄에서 전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3. 중앙아시아 및 중국에 대한 관심

서구 여러 나라가 중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1839-1842) 이후라고 합니다. 물론 13 세기 마르코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1271년부터 1295년까지 25년 동안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기록한 여행기)이 나온 뒤 유럽 사람들이 동양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개념의 관심은 아편전쟁 이후입니다. 프랑스는 1822 년 아시아 학회를 조직하고 연구지를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1823 년 왕립아시아학회를 만들고 1876 년에는 옥스포드대학에서 중국어 강의(L.Legge, Beal 1877)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독일은 1887 년 동양어를 위한 세미나를 베를린에 개설하여 중국어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1877 년 중국어 강의(Schlegel, 1840-1903)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1830 년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선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1867 년 동양학자인 레르크(P.L.Lerkh)가 시르다리야(Syr-Darya) 계곡 주거지를 시작으로 1875 년에는 아프로시압(Afrosiab) 지방의 발굴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중국 여러 지역 및 중앙아시아의 발굴로 연결됩니다.

 

4. 오타니 탐험대

일본은 오타니 탐험대는 서구 열강보다 좀 늦은 1902 년부터 12 년에 걸쳐서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주지스님인 오타니 고츠이(大谷光瑞)가 중심이 되어 중앙아시아 호탄, 쿠챠, 키질, 베슈카림, 하사 탐, 투르판, 우루무치, 하미, 키질, 캬슈카르, 루란, 돈황 등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시작됩니다.

 

이들이 발굴, 수집한 유물은 류코쿠대학 도서관, 도쿄국립박물관, 중국 여순박물관, 우리나라 국립박물관 등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자료는 먼저 교토에 도착된 뒤 교토 박물관에 보관하다가 오타니에 이어 주지가 된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는 이들 유물의 일부를 조선통독부와 만주 여순 박물관에 기증합니다.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오타니 유물은 중앙아시아의 벽화, 도자기를 비롯하여 나무, 종이, 뼈, 돌, 청동, 가죽 등으로 만든 그림, 조각, 공예 등 310여 건 2000점에 이릅니다. 

 

5. 소그드 사람

소그드인들은 원래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장례법이 있었지만 중국으로 이주해서 살면서 중국의 매장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의 매장 문화에 자신들의 문화적 특징을 돌 판에 새겨서 묻는 방식을 취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재 국가를 가지지 않고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려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그들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지니고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브레인으로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특히 소그드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발견된 무덤을 통해서입니다. 주검을 넣은 관 주변으로 돌 판에 무늬를 새겨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판 무늬가 중국 사람들의 생활이나 모습이 아니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소그드인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돌 판에 새겨진 독특한 여러 가지 그림들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중국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서 살았던 소그드인이 새롭게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으로 소그드라는 말이 처음 역사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왕(BC.522-486)비문입니다. 제국을 구성하는 23 주 가운데 하나로서 소그다 sogda, 소그드 사람이라는 말로 소그도이 sogdoi 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와 나란히 쓰인 고대 이란어 자료 가운데서 <아베스타>에도 나옵니다.

 

<아베스타>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입니다. 으뜸 신 아흐라마즈다가 만든 나라 이름 가운데 조로아스터교의 이상향이 아이야나 베자 Airyana Vaejah 이고, 두 번째 이상향이 소그드입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기록에도 소그디아나의 마라칸다 제압의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곳이 사마르칸트로 보입니다.

 

소그드 사람들이 사용한 소그드어는 아람문자를 그대로 수용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소그드어 문자는 아람 문자와 똑같이 22자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소그드 사람들을 솔리 窣利 suli 라고 불렀는데 그밖에 호인(胡人), 흉노(匈奴) 등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호도(胡桃), 호마(胡麻, 참깨) 등 호(胡) 자가 붙는 물건은 소그드와 관련된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7 세기 중엽 육호주(六胡州)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소그드사람들의 집단 거주지로 보입니다. 이곳에 사는 소그드인은 성씨가 안(安), 사(史),  강(康), 석(石), 조(曹), 하(何) 미(米) 씨 등이 살았습니다. 특히 당나라 때 장안에는 호복(胡服), 호식(胡食), 호희(胡姬), 호선무(胡旋舞), 호등무(胡騰舞), 칠호병(漆胡甁), 취호왕(醉胡王) 등이 보이는데 이것은 대부분 소그드 사람들의 풍습이나 그들의 생활 도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장안에서 호풍(胡風)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소그드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손에 동전을 쥐어주고, 입술에 꿀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장사를 하면서 입으로는 좋은 말로 설명을 잘하고,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손에서 놓지 말고 꼭 쥐고 있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다섯 살이 되면 읽기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스무 살이 되면 다른 나라에 나가서 장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그드인들이 어려서부터 철저히 장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시 했다는 말입니다.

 

소그드 사람들은 대부분 실크로드를 무대로 장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낙타나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장사를 하는데 중아아시아 오아시스 여러 도시에 식민을 개척하여 거점을 중심으로 이어서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멀리 이동하는 수고를 덜 수 있고 효과적으로 이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중요 장사 품목은 비단이었습니다. 중국의 비단을 가져다가 로마나 유럽 지역에 팔고, 동쪽에서 향신료, 말, 노예 등을 가져다가 중국에 팔았다고 합니다.

 

소그드 사람들은 장사를 위해서 중국, 에후탈, 돌궐 등 여러 나라 조정의 힘을 빌리거나 조공무역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소그드인은 장사뿐만 아니라 선조부터 유목민족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말을 키우는 능력이 뛰어나서 나라의 부탁으로 말을 키워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소그드인은 손재주도 뛰어나서 무역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에서 필요한 견직물, 은 세공품 등을 직접 만들어서 팔기도 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보인 소그드인은 700 년 이슬람 세력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에 접어들어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참고문헌]

권영필, 중앙아시아 벽화고, <중아아시아 회회>, 일지사, 1990, 3쇄,

Mario Bussagli, Painting of Central Asia, 권영필 역, <중아아시아 회회>, 일지사, 1990, 3쇄

曽布川 寬·吉田 豊編,『ソグド人の美術と言語』,臨川書店, 2011

 

덧붙이는 글 | 박현국(朴炫國) 기자는 류코쿠(Ryukoku, 龍谷) 대학에서 주로 한국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태그:#류코쿠뮤지엄, #소그드인 , #OSSUARIES, #옥스아리, #오타니 수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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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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