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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 2월 6일자 B7
 <조선경제> 2월 6일자 B7
ⓒ 조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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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라는 학문은 인용됨에 있어 매우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특성을 지니기에 자칫 겉으로 드러난 문장만 보고 잘못 이해한 채 제대로 이해한 것으로 착각해 오용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2월 6일 치 <조선일보> 경제섹션 역시 이런 잘못을 피해가지 못했다. B7면에 실린 심층분석 기사 '파이 극대화가 우선인가, 어떻게 나누느냐가 중요한가'에서 저명한 철학자들을 통해 성장주의와 분배주의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공리주의'가 '성장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유진수 경제학부 교수가 쓴 것으로 나온 이 기사는 철학을 경제적 문제에 끌어올 때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잘못 인용함으로서 본래 공리주의 철학의 뜻을 훼손시켰다. 실제 공리주의는 결코 성장주의와 상통하는 이론이 아니다.

<조선일보>, '공리주의 = 파이의 극대화'라고?

우선 보도된 내용이 어떠한 지를 살펴보자. 유진수 교수는 성장주의는 공리주의, 분배주의는 존 롤스식 정의론으로 대변했다. 여기서 문제는 상장주의를 공리주의와 연관지은 것이다. 기사는 ▲ 공리주의(벤담의 공리주의)철학이 공동체 전체의 파이 극대화를 신경쓰며 파이를 어떻게 나누는 지는 중요치 않게 본다 ▲ 세율을 낮추어 투자를 증대시키는 것을 지지한다 ▲ 그리고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성장을 바람직하게 본다 등의 주장을 담고 있다. 세 가지 주장의 공통분모는 '공리주의는 사회의 경제적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리주의는 '경제적 총량 극대화'가 아닌 '행복 총량 극대화(쾌락 총량 극대화)' 를 추구하는 이론이다. 그렇기에 경제적 총량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공리주의는 파이의 극대화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견강부회다. 실제 국가 전체의 경제는 상당히 양호한 길을 걷는 듯 보이는데도 정작 국민들의 행복 총량은 '마이너스 극대화'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현재라면 더욱 말이 안 된다.

이를 의식한 듯 기사 초반에는 '국민들의 행복이 그들의 소득 수준과 비례한다면'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장이 담고 있는 오류는 변하지 않는다.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전제 자체의 문제, 둘째는 전제가 옳을 경우에도 발생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국민들의 행복과 소득 수준이 비례한다는 전제 자체가 틀렸기 때문에 전체적 주장이 성립될 수 없다. 실제 국민행복지수 1위 국가는 방글라데시 등의 극빈국들이 줄곧 차지해 왔다.

둘째. '국민들의 소득수준 상승은 곧 행복 상승'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파이'가 커지는 동안 서민들의 경제력은 더욱 악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가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서민 - 상류층 모두 소득 수준이 상승하지만, 상류층 재벌 등이 서민의 상승 수준과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을 누린다면? 유진수 교수는 이럴 때 결국 공리주의는 분배주의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 했다.

특히 두 번째 주장을 확대하면 오히려 '공리주의는 분배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공리주의적 사고의 본질에 더 가깝다.

이런 가정이 공리주의에서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가정이 공리주의에서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 조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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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는 급진적 분배주의 까지 확장되는 이론

'경제적 극대화가 행복의 극대화와 비례한다면'과 같은 성립되기도 힘들고, 논란의 소지 까지 있는 가정을 배제하고 공리주의를 현재의 경제 논쟁에 끌고 들어와 보자.

'최대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최대한 극대화 시킨다'는 벤담 공리주의의 주장은 '파이를 먼저 키우자'는 성장담론과 '그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 파이를 나누어 주는 것을 먼저하자' 는 분배담론 중 어디에 더 알맞을까.

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없다. 파이 키우기로 이익을 얻는 이는 소수지만 복지 정책 등의 분배로 혜택을 받는 이들은 앞의 소수들과 비해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리주의 원칙을 경제에 적용시키면,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 좋게 되고, 성장주의와는 대척점에 서게 될 수도 있다. 유진수 교수가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위에 달아 놓은 사진은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다. 공리주의가 무조건 분배주의와 상통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확장시 그렇게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진수 교수가 공리주의를 성장주의를 말하기 위해 끌고 온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 지식의 잘못된 전달 경계해야

성장주의가 틀렸고 분배주의가 옳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이론을 설명함에 있어 철학 이론을 끌어들이려 했다면 유 교수와 <조선일보>는 기사를 보다 잘 검토했어야 했다. 철학이론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이해가 현저히 낮은 오늘날. 기사에 가끔 등장하는 철학자들과 철학 이론들은 대중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될 가능성은 크다. 이는 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아 '잘못 해석된 철학지식'이 보편화 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유진수 교수는 분석 기사의 마지막에 '공리주의와 효율성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성장주의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을 대변했다. 이러한 식의 기사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공리주의가 경제적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조선일보>가 이를 통해 '경제적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행복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식의 잘못된 이해를 유도하려 했다면 매우 큰 잘못이다. 나아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학 지식의 잘못된 해석, 인용, 전달에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공리주의를 파이 극대화 이론과 연계지은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는 식의 정정 보도가 필요하다. 보는 이가 상대적으로 적은 기사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독자에게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기사를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언론의 사명임을 <조선일보>는 잊지 말아야 한다.


태그:#조선일보, #조선경제, #공리주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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