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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모시듯이 정성껏 모시겠다는 생각으로 사드린 유기 그릇 한 벌이 이젠 정말 제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모시듯이 정성껏 모시겠다는 생각으로 사드린 유기 그릇 한 벌이 이젠 정말 제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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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90이 넘은 노모, 고관절 골절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92살의 어머니가 있는 상황에서 새벽 2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지난달 30일 새벽 2시, 아닌 밤중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깨어 있던 상태라 허둥대지 않고 받을 수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기를 드니 병상을 지키고 있던 형이 '아무래도 와봐야겠다'고 하는 말이 들려옵니다.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서둘러야 할 상황이 되니 허둥대기 시작합니다. 6년 전쯤 둘째 누나가 미리 마련해줘 집 안 깊숙이 넣어 두었던 수의를 꺼냈습니다. 지난 1984년에 찍은 영정사진 속 엄마는 너무 새댁이라서 작년 8월에 세 번째로 찍은 영정사진도 꺼내고, 만약을 대비해 미리 꾸려놓았던 가방 등을 챙기다보니 1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3시가 거의 다 돼 집을 나섰습니다. 이곳 대전서 엄마가 계신 충주까지는 대략 1시간 30분쯤이 걸립니다. 엄마가 입원해 계시는 병원이 30여 리쯤 남았을 때 전화가 다시 왔습니다. 좀 서두르랍니다. 서둘렀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엄마가 입원해 계시는 병실로 들어가니 엄마는 이미 5분 전에 운명해 계셨습니다.

잠을 주무시는 듯 반듯하게 누워 계시는 엄마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아직은 따뜻했습니다. 손과 발, 얼굴과 이마 어디를 만져 봐도 생전에 느끼던 엄마의 따뜻함이 그대로입니다.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엄마의 체온이 조금씩 식어갈 때쯤 의사가 들어와 청진을 하고, 동공을 확인하더니 2012년 1월 30일 오전 4시 30분으로 사망을 선고합니다.

100살은 살 거라고 하던 엄마

2010년 가을, 들국화가 피었을 때 엄마는 당신의 시부모 산소엘 가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2010년 가을, 들국화가 피었을 때 엄마는 당신의 시부모 산소엘 가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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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은 물론 주변에서도 100살은 너끈히 살 거라고 할 만큼 정정하던 엄마였지만 고관절 골절이라는 복병을 만나더니 이렇듯 황망하게 이승에서의 연을 놓았습니다.

엄마는 작년 12월 20일 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침대를 내려서다 주저앉으며 고관절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의학전문 지식이 미미한 입장에서야 뼈 하나쯤 부러진 외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노인들에게 있어서의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외상이 아니라 아주 치명적이었습니다. 담당 의사로부터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주일 동안은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평정을 되찾아 가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 달 사이에 자식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더니, 이 막내아들을 단 5분도 기다려주지 못할 만큼 급박하게 세상과 하직을 하셨습니다.

엄마와의 사별은 '마음에 부는 삭풍'

2010년 가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셔진 산소를 찾아 절을 올리고 있는 엄마
 2010년 가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셔진 산소를 찾아 절을 올리고 있는 엄마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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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와 애별이고, 회자정리와 생자필멸을 알고 있지만 당사자가 되어 직접 맞아들여야 하는 엄마와의 사별이라서 그런지 마음에는 더 없을 것 같은 삭풍이 불었습니다. 주검이 된 어머니를 장례식장으로 모셨습니다.

하루를 경황 없이 보내고 맞이한 밤늦은 시간, 영결식단에 모셔진 영정 속의 엄마를 마주보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52년 동안 잘해드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일부러 속을 썩이러 태어난 자식처럼 속만 썩여드린 세월입니다.

보물찾기를 하듯 그나마 엄마가 좋아했던 때를 떠올려보았습니다. 2010년 가을, 엄마는 들국화가 하늘거리던 10월, 당신의 시부모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엘 다녀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김에 당신의 남편인 아버지 산소에도 들러보기로 했었습니다. 

엄마
 엄마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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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에서 내려 얼마쯤은 걸어야 하는 곳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가더니 더 멀고 험한 길을 걸어야 하는 아버지 산소에 가는 것은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소싯적 생각으로야 한걸음에 다가갈 수 있는 지척이지만 막상 비탈진 산길을 걸어 오르다보니 기력이 달렸던 모양입니다.

말로는 가지 말자고 하면서도 눈빛은 꼭 가봤으면 하는 간절함이 절절하기에 차가 긁히는 것쯤 감수하고 4륜을 구동시키며 산길을 달렸습니다.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는 비탈진 산길은 어머니를 업고 기어올라서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엄마는 '너 때문에 와볼 수 있다'며 참 좋아했었습니다.

2011년 여름에도 엄마는 100일 정도를 막내아들에게 와 계셨습니다. 말벗이 필요할 것 같아 가능하면 많은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머니와 나누는 이야기는 어느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됩니다.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는 것도 고역이고,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해 유기그릇 한 세트를 샀습니다. 유기로 된 밥그릇 한 세트를 들고 들어가니 그게 뭐냐고 묻습니다.

매일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진지를 올리려고 사왔다고 하니 빙긋 웃으셨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정성으로 엄마를 모시겠다는 각오를 엄마에게 보여드렸지만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답답하면 혼자 훌쩍 밖으로 나가고, 졸리면 먼저 자고…. 그래도 엄마는 그 그릇에 담은 밥을 먹으며 좋아하셨습니다.

눈은 왜 그렇게 많이 내리고 날씨는 또 왜 그토록 춥던지

소복이라도 입은 듯 하얀 눈에 덮인 고향길.
 소복이라도 입은 듯 하얀 눈에 덮인 고향길.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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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이틀째,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던 하늘이 끄무레해지더니 오후부터는 눈이 펑펑 내립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눈은 겨울밤의 추위를 더 춥게 하였습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은 불효한 마음을 야단치는 엄동설한의 회초리였고, 몇 십 년 만에 닥친 최고의 추위라는 기온은 고애자가 되는 마음을 더 시리게 하는 북풍한설이었습니다.

삼베로 기운 옷을 입고, 버드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조문객들이 올 때마다 '에고 에고' 하며 곡을 합니다. 곡소리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는 말을 꽤나 여러 번 들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다보니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엄마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어쩌면 고향 마을에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지금껏 고향마을에서는 누구라도 돌아가시면 꽃상여로 모시는 매장을 하였습니다. 상여축제로 이름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어느 곳의 상여 행렬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향 마을에서 꾸려지는 상여행렬은 실생활 속의 행렬이라서 그런 곳에서 볼 수 있는 상여행렬보다 훨씬 값진 행렬입니다.

그런 상여 행렬 앞에서 딸랑딸랑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넣는 게 바로 엄마의 막내아들인데, 막상 요령잡이의 엄마는 꽃가마를 태워드리지 못하는 서글픔입니다.

달구질을 하면 상제들이 이럿듯 노잣돈을 내 걸지만 엄마는 달구질을 하지 않아 노잣돈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달구질을 하면 상제들이 이럿듯 노잣돈을 내 걸지만 엄마는 달구질을 하지 않아 노잣돈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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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를 멜 연반계원들이 소집됐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일찍 돌아가신 큰 형님 산소를 한곳으로 옮기며 엄마는 아버지와 합장을 해 가족묘로 꾸리기로 하였습니다. 

장례 3일째 되던 날,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하얗습니다. 엄마를 실은 영구차가 미끄럼을 타듯 조심스레 충주시립화장장으로 들어섭니다. 엄마를 모신 관이 대차에 실려 화장로 안으로 들어갑니다. 화장로가 작동되고 있음을 알리는 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엄마의 몸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환원시켜줄 열기에 마음을 실었습니다. 장작도 아니고 새끼줄도 아니지만 엄마의 몸을 고스란히 환원시켜드리기 위해 마음을 태우는 마음다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빌었습니다.

이승에서 먹고 싶었지만 자식들 때문에 먹지 못한 것 저승에서 실컷 먹고, 생전에 가보고 싶었지만 자식들 때문에 구경하지 못한 곳 훨훨 날아다니며 보고,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행복, 부, 명예 저승에서 다 누리고, 이승에서 일찍 헤어진 아버지도 만나 오래오래 함께하라고 투정을 부리듯 기도했습니다. 엄마는 채 2시간이 되지 않아 불꽃도 보이지 않는 화장로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한 줌의 재가 된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나뭇가지마다 소복히 내린 눈은 주렁주렁 매달린 조등처럼 보였습니다. 자료사진
 나뭇가지마다 소복히 내린 눈은 주렁주렁 매달린 조등처럼 보였습니다. 자료사진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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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재가 된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찾아가는 고향은 사방천지가 소복이었고 조등이었습니다. 쌓인 눈이 15cm쯤 되니 발목까지는 푹푹 빠질 듯합니다. 버스에서 내려 장지까지 가는 길이 걱정됐지만 이미 깔끔하게 제설이 돼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밤샘을 하고 새벽에 먼저 출발을 한 고향 친구들이 트랙터로 비질이라도 한 듯 깨끗하게 닦아놓았습니다.

고향은 이런 곳이라서 좋은 곳인가 봅니다. 마지막 길을 가는 엄마를 배웅해줄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뭉툭뭉툭 서있습니다. 추위를 달래려 피워 놓은 모닥불은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위해 피워주는 향불처럼 보였습니다. 웅성웅성, 시끌벅적 한 가운데 황토를 구워 만든 항아리에 모신 엄마, 한 줌의 재가 된 엄마를 땅에 묻고 비석 하나를 세웠습니다.

소복을 한 상제들처럼 사방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선산,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덩이가 조등처럼 주렁주렁 내걸린 산길을 따라가 양지바른 선산에 아버님과의 합장으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고부갈등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엄마는 당신의 시부모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생전에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하셨던 시부모님 오른쪽(동쪽)으로 나란히 모셨으니 엄마도 좋아하실 듯합니다.

솜이불이 되고 모닥불이 돼준 분들께 감사

엄마가 떠나시던 날 고향 산천은 하얀 눈으로 소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자료사진
 엄마가 떠나시던 날 고향 산천은 하얀 눈으로 소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자료사진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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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눈이 내리고, 그토록 춥기만 한 날씨였기에 마음에는 불효의 고드름이 열리고, 몸뚱이는 동상의 화를 입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가친척들과 친구, 고향 사람들, 큰일을 함께 나누려는 많은 사람들이 전해주는 애도는 꽁꽁 언 마음을 감싸주는 솜이불이 되었고, 넉넉하게 베풀어주는 부의는 모닥불 같은 온기가 되어 막내아들로서의 도리를 하는데 기력이 되었습니다.

슬픔도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삼우제까지는 엄마와의 사별이 실감나지 않았는데 '엄마'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리니 이제야 가슴이 울먹거리고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집니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술이라도 마시면 헉헉 흐느끼며 펑펑 울게 될 거라는 생각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울먹거리는 가슴을 감싸주던 솜이불 같은 애도, 찬바람 부는 마음을 덥혀주는 모닥불이 된 모든 분들의 애도와 풍족하게 베풀어주신 마음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엄마를 모신 산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경
 엄마를 모신 산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경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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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좀 웃길지 모르지만 쉰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엄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태그:#엄마, #조등, #다비,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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