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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의 사원에서
▲ 항아리와 동자승 치앙마이의 사원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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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뚝뚝'을 타고 '타페 게이트' 광장으로 나왔을 때까지도 열대의 열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안개처럼 부연 잠이 남아있었다. 옛 왕국의 수도답게 성곽은 견고하고 아름다웠으며 광장에는 이른 아침의 몽롱한 기운이 그림자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첫 미션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오늘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각자 모둠의 숙소는 알아서, 직접 구해야 한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1박 2일 간 치앙마이에 머물 동안 잠자리, 먹을거리, 구경거리에 필요한 비용을 나누어 주었다.

사실 이른 아침의 낯선 도시라면 굳이 어린 여행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막막할 만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군소리 하나 없이 재잘재잘 숙소 사냥에 나선다. 배낭을 지고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의 발걸음에는 오히려 설렘이 묻어 있다.

한 모둠은 왼쪽 길로, 또 한 모둠은 오른 쪽 길로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아내와 나는 곧바로 직진하기로 했다. 가이드북에서 봐 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하나 남은 윤미와 희경이네 모둠이 우리 부부를 따라오는가 싶더니 곧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지도 축적이 잘못되었는지 생각과는 달리 거리가 제법 멀었다.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할 즈음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냈다. 하지만 성수기답게 가격이 훌쩍 올라있었다. 잠시, 갈등. 결국 다른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방황을 시작한다.

그러기를 30여 분. 겨우 마땅한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구해 배낭을 내려놓고 보니, 아이들이 걱정된다. 성수기에다 아직 방이 비워지기 전인 이른 아침이어서 숙소 구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바쁜 마음에 쌀국수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아이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게이트 광장'으로 나갔다.

치앙마이 야시장에서
▲ 여행학교의 어린 여행자들 치앙마이 야시장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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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성문을 나서 광장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이모~! 삼촌~!"

아이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다. 그리고는 팔짝팔짝 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 가쁘게 자기들이 구한 숙소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리 숙소 대박이에요. 방이 진짜 크고요, 풀장도 있어요." 

다른 모둠 아이들도 질 세라, 자기들이 구한 숙소들을 연달아 자랑했다. 방이 엄청 깨끗하고 침대도 좋다고 했다. 가격도 싸단다. 그리고 론니플래닛에서 추천한 숙소이며 매니저가 진짜 친절하다고 했다. 길에서 '샘'이라는 재미있는 아저씨를 만났는데 그가 안내해 준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녀석도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진짜'와 '엄청'과 '쩔어요'와 '대박'과 같은 절대 만족의 단어들이 '진짜, 엄청, 대박' 날아다녔다. 아이들이 침을 튀기며 '자신들의' 게스트하우스를 자랑하는데, 누가 보면 그곳 게스트하우스에서 고용된 '임시 삐끼'로 오인당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아침 아이들은 하룻밤 묵어 갈 잠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마치 모래사막에다 새로운 도시를 하나쯤 건설한 것처럼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흔적은 아이들의 일기장에도 남아 있다.

"조끼리 숙소를 구하러 갔다. 풀장이 있다고 해서 기대도 조금 했다. 있어도 안 쓰지만. ㅋㅋ. 그런데 웬걸 풀장은 영준이 전용이었다. ……ㅋㅋㅋㅋ 그래도 방은 원더풀하였다. 수경이랑 나랑 둘이 쓰기엔 매우 넓었다." - 도솔(중3)

"여행의 재미 중 하나가 숙소 찾기인 것 같다. (중략) 오늘 가장 기대했던 숙소 찾기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350바트에 침대 2개에 냉장고, TV까지 있었다." - 성호(고1)

"우리 조끼리 모여 숙소를 잡는데 우리는 무척 좋은 숙소를 찾은 것이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숙소를 잡고 난 후 나중에 다 같이 모이자 숙소 자랑을 했는데 다른 조도 숙소를 무척 잘 잡은 것이었다. 유진이 언니랑 나도 질 수 없어서 막 자랑을 해댔다. 재밌었다." -서희(중1)

"우리끼리 잡은 숙소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 하영(대1)

무언가를 스스로 한다는 것. 더군다나 낯선 이국의 도시에서 부모나 교사의 도움 없이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스스로 해결해냈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 지라도, 많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치앙마이 야시장 가는 길에서
▲ 거리의 그림, 그리고 불빛 치앙마이 야시장 가는 길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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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두 아이를 키우는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정이 가까운 서울특별시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면 볼 수 있는 진풍경이라고 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불빛을 비춰주는 가운데 아이들이 과외교사와 함께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초등학교 줄넘기 과외 열풍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영어나 수학은 물론이고 요리를 하고 기타를 치고 심지어 놀이를 하고 줄넘기를 하는 것까지도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다녀야 할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스스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에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학교라는 곳이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성취함으로서 자아감을 획득 한다기보다는, 점점 더 빨라지는 선행학습에 늘 부족하다는 부담감과 열등감만을 키우는 곳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아이들은 각자의 게스트하우스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명함들을 내게 건넸다. 아내 역시 우리부부가 묵을 게스트하우스의 명함을 각 모둠별로 하나씩 나누어줬다. 이로써 우리들은 치앙마이에서의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공유함으로서 최소한의 연락체계를 확보한 셈이다.

이제 치앙마이 투어를 시작할 시간이다. 오늘 하루는 하영이와 유진이네 모둠과 함께 다니기로 했다. 모둠을 바꾸어주는 대신 동행을 선택한 것이다.

치앙마이 왓 체디루앙 사원에서
▲ 사원 투어... 아이들 치앙마이 왓 체디루앙 사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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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치앙마이의 여러 사원들을 돌아다녔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크다는 '왓 체디루앙'에도 갔고,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는 '왓 치앙만'에도 들렀다. 그러고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사원에 더 갔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사원의 크기와 시간의 흔적에 놀라고 즐거워했지만, 곧 넘치는 사원에 질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무엇을 보러 갈 지는 하영, 유진, 나운, 서희 이렇게 네 명의 조원들이 함께 의논했는데, 길을 찾아가는 것은 중학교 2학년인 나운이의 몫이었다. 말하자면 그이가 '오늘의 길잡이'다.

지도 한 장을 들고 앞장서서 걷는 나운의 얼굴에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있다.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하다. 두 손으로 지도를 꼬깃꼬깃 접어들고 지도와 이정표를 번갈아가며 살피면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여간 진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핏 새어나오려는 걸 참아내느라 애먹어야만 했다.

두 번째 사원에서 나와 걷고 있을 때였다. 자전거를 탄 윤미와 승현을 만났다. 자기네 모둠 친구들을 찾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자전거를 탄 희경이를 만났다. 숨바꼭질하듯이 그 녀석도 다른 친구들을 찾고 있었다. 자전거를 렌트해서 돌아다니다 친구들끼리 뿔뿔이 헤어진 모양이었다.

이 모둠은 윤미와 희경 두 고등학교 2학년 단짝과 함께 남학생 성호(고1)와 승현(중2)을 묶어주었더니, 조금도 거칠 것이 없다. 이방의 도시를 붕붕 날아다닌다. 만일 끈이라도 달아놓지 않으면 수소가스를 채운 풍선들처럼 하늘로 휘익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다. 

왓 치앙만에서
▲ 스님... 왓 치앙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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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의 사원에서...
▲ 항아리 치앙마이의 사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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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사원 투어가 끝났다. 나운이는 실수 한 번 없이 오늘의 길잡이 역할을 완수했다. 세상에, 긴장이 풀리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환하게 밝아지던 그 아이의 얼굴이란…. 이른 봄날 오후, 매일 지나던 길가에 느닷없이 피어있던 꽃송이 같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란 그런 것인가 싶다.  

모두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여행 떠나 처음이었다. 윤미와 희경이가 식당을 물색하러 간 사이에 하루 동안 생겨난 이야기들을 내어놓느라 아이들은 시끌벅적한데, 어쩐지 우리들을 조이던 끈 하나가 풀려나간 것처럼 나른하면서도 평화로운 공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식당에 자리를 잡은 아이들은 제각각 요리를 주문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몇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는 한 번이라도 먹어보았거나 잘 알고 있는 요리를 고집하는 친구다. 다른 하나는 무턱대고 이름도 낯선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는 녀석이고, 마지막으로는 형이나 언니, 친구들의 요리를 무작정 따라 시키는 꼬맹이들이다.

어쨌거나, 이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요리와 음료수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즐기는 폼들이 제법이다. 여행자 티가 조금씩 난다는 뜻이다. 오늘 하루 스스로의 생각대로 숙소를 구하고 관광을 하고 요리를 찾아다닌 그 시간들이 그렇게 어린 여행자들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다.



태그:#여행학교, #라오스, #치앙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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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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