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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에 넘친 칭호

몇 해 전 한 잡지사(민족21)의 기자가 당시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리까지 찾아와 대담을 하고는 그 기사에 '현대사 전문작가'라는 칭호를 붙이겠다고 양해를 구하기에 간곡히 사양했으나 나중에 보내온 책에는 그 칭호가 그대로 붙었다.

재미동포 허도성 선생이 보낸 편지 겉봉(상)
편지 속의 돈봉투(중)
일백 달러짜리 두 장을 싼 먹지(하)
 재미동포 허도성 선생이 보낸 편지 겉봉(상) 편지 속의 돈봉투(중) 일백 달러짜리 두 장을 싼 먹지(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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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 몇 매체에서도 같은 칭호를 붙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동안 내가 펴낸 책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지울 수 없는 이미지1․2.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한국전쟁․Ⅱ> <일제강점기>때문인 모양이다.

사실 나는 역사전공자가 아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33년간 국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퇴직교사에 불과하다. 근현대사에 까막눈이다시피한 사람에게 1999년 학부모요, 변호사인 한 독지가(이영기 전 전주지검장)가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를 보내주었다.

그때 그분은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 손자 김중생과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 증손 이항증 선생을 길 안내 겸 동행케 하여 보름 동안 상해, 북경, 동북삼성을 비행기로 고급 승용차(아우디)로 중국대륙을 누비며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서너 달 둘러보아도 벅찬 코스를, 보름 동안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둘러본 뒤 귀국하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독지가가 많은 돈을 들여 나에게 답사시켜준 것은 번듯한 항일유적답사기를 남기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 답사에서 돌아온 뒤 나는 그 빚을 갚고자 독립운동사 공부에 머리를 싸맸다.

다행히 내가 근무한 학교는 대학 부속고등학교로 대학도서관 대출증을 발급해주었기에 대학도서관(이대중앙도서관)을 무시로 출입할 수도, 도서 대출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학교를 떠나기까지, 그 뒤로도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출입을 하면서 근현대사 자료를 숱하게 뒤적였다.

미주 동포들의 독립성금

재미동포 이영씨의 편지 겉봉(상)
자기 명함 넉장으로 만든 돈 봉투(하)
 재미동포 이영씨의 편지 겉봉(상) 자기 명함 넉장으로 만든 돈 봉투(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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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대학도서관에서 독립운동사 자료를 들추는 가운데 미주 동포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성금을 보낸 동포의 이름과 금액이 적힌 기록을 보고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동포 이름 아래 1불(弗, 달러) 또는 5불 등의 금액이 적혔는데 매달 일정액을 상해임시정부나 독립운동 단체로 보낸 기록이었다. 당시 미주 동포는 하와이나 멕시코 일대 사탕수수농장에서 농장주의 채찍 아래 힘든 일을 했던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분들은 피땀 흘려 일한 품삯을 받으면 가장 먼저 일정액을 떼어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던 것이다. 상해임정정부 김구 주석은 그렇게 보낸 준 동포들의 독립운동 성금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하고, 동지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쌀을 사서 뒤주에 넣어주기도, 이봉창 윤봉길 의사 같은 인물을 발굴하여 일제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나는 그 기록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이미 고인이 되었을 님들에게 묵념을 드렸다.

독립운동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최일선에서 일제와 총칼로 맞서는 전사도 있었고, 펜이나 붓으로 필봉을 휘두르는 지사도 있었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 돈을 모아 성금을 마련하여 보내 준 이도 있었고, 그 성금을 상해 임시정부나 독립전사에게 목숨을 걸고 전달하는 연락책도 있었다.

지난해 작고한 김규동 시인 아버님은 함경도 종성에서 한약국을 하셨는데, 이따금 김약연 선생(북간도 용정의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세우신 분)이 오시면 200원 또는 300원 돈을 고액권 지전(종이돈)으로 바꾼 뒤 인두로 다려 그것을 흰 수건에 곱게 싸서 무릎을 꿇고 드렸다고 나에게 증언하신 적이 있있다.

또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외투 안에 비밀주머니를 만들어 그것을 다시 바늘로 촘촘히 꿰매 전달했다고도 한다. 우편을 이용할 때는 지전이 겉으로 비치지 않게 먹지로 싼 뒤 그 먹지를 다시 종이로 싸서 봉투에 담아 보내기도 한 모양이었다.

여섯 자녀를 부양하는 어느 제자

왕산 허위 선생 손자 재미동포 허도성 선생
 왕산 허위 선생 손자 재미동포 허도성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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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내가 이웃 안흥마을에 살 때였다. 강추위에 수도가 얼어 하는 수 없이 우물물을 길어오다가 눈길에 넘어져 골절상을 입었다. 그때는 한창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 중이었는데, 뜻하지 않는 사고로 깁스를 한 채 두어 달 나들이도 못하고 집안에서 맴돌 때였다. 그 무렵 미국 휴스턴에 사시는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 허도성 선생이 편지를 보내왔다.

두툼한 편지 속에는 긴 사연과 함께 또 하나의 작은 봉투가 나왔다. 그 봉투를 뜯자 접지된 먹지가 나왔고, 그 먹지를 펼치자 일백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이 나왔다. 그리고 편지 끝에 골절상에는 몸보신이 긴요하니 쇠뼈를 사서 곰탕이라도 끓여 드시라는 주문이 들어있었다. 그분은 지금도 친일파가 판치는 세상이 꼴 보기 싫어 고국을 떠나 먼 이역에서 세탁업으로 생업을 삼고 있다. 

그분뿐 아니라 그 댁 큰집 작은집 대부분 허씨(왕산) 후손들은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채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에, 민족 정통성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항일명문 후손들이다.

지난해 가을에는 미국 시카고대학에 근무하고 있는 한 제자(이대부고 21기 이영)한테 아주 긴 사연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넉 장이나 되는 긴 편지에서 30년 전 고교시절의 추억과 그가 사는 이야기 - 여덟 식구 가장으로 5녀 1남의 여섯 자녀를 두었다는 재미난 이야기- 를 쓰고는 "적은 돈(200달러) 동봉합니다. 사모님과 맛있는 것 사드세요"라는 덧붙임 말을 달았다.  
5녀 1남의 자녀를 둔 이영 부부의 가족 사진
 5녀 1남의 자녀를 둔 이영 부부의 가족 사진
ⓒ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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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속에서 명함이 나왔는데 그는 명함 넉 장 사이에 일백 달러짜리 두 장을 넣고는 스카치테이프로 사면을 봉했다. 해외에서 부부가 여섯 자녀를 부양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와 가까운 친구에게 들으니 그 제자는 고교시절부터 매우 어렵게 공부했고, 대학 및 미국 이민생활도 엄청 힘들었지만, 독실한 신앙심으로 자신의 운명을 잘 극복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즈음은 네 자녀가 대학생으로 앞뒤 옆도 돌아볼 수 없는 처지임에도 옛 훈장에게 편지 속에 현찰을 넣어 보내주는 것은 옛날 미주 동포 1세대가 보낸 귀한 성금처럼 내 마음을 울렸다.

그분들은 나에게 좌절치 말고 끝까지 글을 쓰라는 성원일 것이다. 나는 여러 사람에게 이래저래 빚을 많이 지고 산다.


태그:#독립운동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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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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