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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

 

낯익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어디서 많이 본 사진이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렸던 사진이다. 젊은이가 벙거지같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벽에 기댄채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슴엔 구직(求職)이라 씌어진 종이를 끈으로 묶어서 보여주고 있는 사진이다.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덕수궁에서 사진전을 하고 있었다. 1월 31일, 날은 추웠지만 카메라 하나 챙겨서 집을 나섰다.
 
난 지금까지 사진은 그냥 보이는 대로 찍으면 되는 것인 줄로만 생각했다. 구도만 잘 잡아서 찍으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요즘 와서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연수도 받고, 사람들과 모임도 하면서 잘못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은 셔터만 누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피사체보다 구도보다 더 중요한게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어느 작가에 의하면 "손떨림없는 사진이 텅 빈 가슴을 대신하지 못한다"고 한다. 즉 대상보다도 구도보다도 마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카메라만 가지고 꾹꾹 눌러댄다고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가 있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사물을 보는 법, 대하는 법, 아름다움을 보는 법을 먼저 훈련하는 것이 순서인 게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임응식 사진전은 의미가 있었다. 작가 임응식은 1912년에서 2001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임응식이란 인물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그는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사진예술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 그가 남긴 족적은 가히 한국사진예술사라 할 수 있다. 한국 사진가협회를 결성하고,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에 가입시켰다. 사진작가의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작가의 국제적 진출을 꾀하기도 했다.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1964년 국전에 사진부문을 증설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고, 또 1955년에는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사진강의를 개설하는 등 미술학과가 있는 대학에서는 사진학을 가르치게끔 교섭하는데도 온힘을 기울였다.
 
그의 삶은 온전히 사진만을 위해서 살았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작가로서, 사진 예술 개척자로서, 교육자로서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진 작가로서의 길을 짚어보자. 그는 일제시기인 1930년대에 회화성을 보여주는 작품 활동을 한다. 이름하여 살롱사진 예술가라 한다. 즉 인물사진인데도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고 그림 속에서 조형물처럼 부수적이고 윤곽도 또렷하지 않은 그림같은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보는 사진 작품은 해방 후이다.
 

해방 후의 사진 작품을 보면 기록성과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종군기자로 차출됐으나 전쟁의 참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쌓여 있는 즐비한 주검 사진이나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들의 모습보다는, 전쟁고아의 시선을 통해서 아픔을 보여주거나, 폭격을 맞아 허물어진 벽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구성해 조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전쟁터에 나서서 3일 동안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주로 예술 사진을 찍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마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나목>이다.
 
'생활주의' 사진의 선구자
 
잎사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은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나무를 찍었건만, 나무조차도 조형적으로 보여지는 작품이다. 한국전쟁 후 이념논쟁에 휩싸여 혼란스러울 때, 그는 리얼리즘이라는 말 대신 '생활주의' 사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정착시켰다. 1960~70년대,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없는 힘든 상황에서 그는 시선을 문화재 쪽으로 돌렸다.
 
그는 프레임을 문화재로 가득 채우던 전통적인 문화재 사진과는 다른 기법을 사용해 문화재의 한국적인 전통과 미를 재발견하면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을 해나간다. 
 
임응식은 문화재 사진을 통해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기록성과 예술성을 성취하는데 기여를 한 것이다.
 
그는 잡지 <공간>의 주간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재물 '이달의 인물' 사진을 싣기 위해 예술인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연재가 끝난 후에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속됐다고 한다. 예술인 자체를 하나의 무형 문화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죽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의 초상을 남겨 두기 위함이었다. 초상의 주인공들은 건축가, 서양화가, 동양화가, 배우, 작곡가 등 예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 그는 예술가들의 직업을 대표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서양화가 천경자였다. 보통은 클로즈업 샷(어깨까지만 보여주는 사진)이나 바스트샷(가슴부분까지만 보여주는 사진)으로 찍는데, 천경자의 사진은 그의 작품을 배경으로한 작업실에 앉아 있는 순간을 담았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뒤의 작품으로 보아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맨발에 꾸미지 않은 옷차림, 오른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보며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은 순간 포착... 진실은 어디까지?
 
한 가지 일화가 더 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한 것이기에 사진의 진실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예로 김환기 화백의 사진이 있다. 한 손에 붓을 야무지게 잡고,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임 작가의 말로는 김 화백은 단정한 양복을 입는 경우가 거의 없이 자유로운 복장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을 보는 사람은 김 화백은 늘 단정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봤던 익숙한 사진이 하나 더 있었다. 작곡가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다. 이 사진은 국내에서 연주회가 있을 때 직접 찾아가서 찍은 사진인데, 한참 뒤 정부 기관에서 안익태의 사진이 필요한데 안익태의 사진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단다.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때 임응식의 사진이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사진의 기록 가치가 값지게 발휘됐던 셈이다.
 

전시회 주최 측은 해설 시간을 따로 마련해뒀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진을 보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 친근하다. 마치 역사 속에 내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전시는 1~2층에 걸쳐 세 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그리고 네 번째 구역에선 그의 개인사와 한국사진사를 나란히 전시하고 있다. 명동의 변화를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으로 보고 수십 년에 걸쳐 관찰하고 곳곳의 변화를 사진으로 남긴 것, 그의 하루를 'L씨의 하루'라고 해 지금은 사라져 버린 명동의 옛 모습을 현재와 비교한 작품 등이 있다. 
 
참 볼거리가 많은 전시회. 전시 기획자의 고민과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입장료가 결코 아깝지 않은 전시회였다. 사진 전시를 보고 있는데 눈이 펑펑 내린다. 사진을 잘 보고 덤으로 눈까지 내려주니 참 행복해진다.

덧붙이는 글 | '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 임응식 사진전' ▲ 기간:2012년 2월 12일까지 ▲ 전시장소:덕수궁 미술관
▲ 관람시간: 월요일 휴관 / 화~목요일:오전 10시~오후 7시 / 금~일요일:오전 10시~오후 9시 ▲ 전시문의 :02-2022-0600


태그:#사진, #임응식, #한국근현대사,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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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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