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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달 21일 밤 10시, 서울 집에서 챙겨간 열쇠로 고향집 대문을 엽니다. 늦은 시각. 열쇠 돌아가는 '딸깍' 소리와 '끼이익' 대문 여는 소리가 수돗가를 지나 계단을 타고 오르고 엄마의 장독대 위까지 맴돕니다. 흐린 달빛만이 고여 있을 줄 알았던 테라스에 거실 창 너머에서 옅은 전등 빛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열쇠로 현관문마저 엽니다. 문을 열자 썰렁한 기운이 훅 밀려듭니다. 내 고향집은 썰렁함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언저리에서, 옷을 두껍게 입으신 아빠가 소파에 등을 기대로 앉아서 홀로 TV를 보고 계십니다. 아빠의 시선이  '광개토대왕'에서 내게로 이동해 옵니다.

"아빠, 아직 안 주무셨네요?"

엄마와 아빠가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아빠가 홀로 앉아 계십니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지만 이제는 예상할 수 있는 풍경이고, 앞으로 익숙해져야만 하기에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합니다.

설날을 맞은 내 고향집의 첫 장면입니다. 작년 설과 추석 그리고 이번 설까지, 낯설게 변해버린 고향집 풍경에 내성이 생겨서인지 조금씩 아프지 않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향집에 가면 늘 허기가 집니다

고향집에 가면 언제나 허기가 집니다. 아마도 부모가 어린 우리들에게 먹이를 주던 보금자리 일지도 모르고 먹이를 부지런히 받아먹던 그 기억이 내 몸 안 어딘가에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향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몇 시이든, 그 전에 무엇을 먹었든 배가 고픕니다. 그게 아니면, 부모가 채워줄 수 있는 그만큼의 외로움이 쌓이고 쌓였다가 고향집 문을 열었을 때 그 외로움이 허기로 변하는 지도 모를 일이고요. 

밤 열 시 넘은 시각, 저녁으로 오리고기를 먹고 빵까지 먹었지만 고향집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아빠는 여전히 거실에서 '광개토 대왕'을 보고 계시고 나는 혼자 부엌으로 갑니다.

"아빠, 뭐 군것질 할 거 없어요?"
"강밥(강정) 해 놨으니까, 먹어라. 큰 거는 제사 때 쓸 테니까 놔두고 작은 봉지에서 꺼내서 먹어라."
홀로 마시는 맥주와 강밥
 홀로 마시는 맥주와 강밥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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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이 박힌 강밥을 접시 가득 담고, 부엌 한 쪽에 놓여있는(언제나 자식들이 찾아오면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맥주도 한 병 챙깁니다. 그리고  십여 년 동안 냉장고 문짝에 붙어 있었던 통닭집 병따개를 찾습니다. 그러나 병따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싱크대 서랍을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빠, 병따개 어디 있어요?"
"부엌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어디 구석에 있을 거다."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병을 따 보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손가락만 아파서 결국 맥주 마시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강정만 챙겨서 거실로 나가는데, 아빠의 얼굴에 왠지 서운함이 깃듭니다. 

"병따개 바닥에 떨어졌다니까, 찾아보면 있을 텐데, 그걸 안 찾고……."

아빠는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고향집을 찾은 서른 중반의 둘째 딸이 혼자 술을 마시려는 게 안쓰러워 보이지도 않나 봅니다. 오히려 병따개를 찾지 못해 술을 마시지 않는 게 더 안쓰러워 보이나 봅니다. 왠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 다시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식탁 밑으로 굴러갔다고 하니까, 식탁 의자를 꺼내고 엎드려 방바닥에 바짝 눈을 붙입니다. 식탁과 냉장고가 붙어있는 곳에, 냉장고 밑 틈새로 동그란 병따개가 보입니다. 팔을 뻗어 병따개를 꺼냅니다. 그리고 시원스럽게 병뚜껑을 열고는 컵에 맥주를 따릅니다. 아주 뿌듯하게 강정과 맥주가 담긴 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엄마 없는 빈자리, 아빠와 딸의 어색함

곧 드라마가 끝나고 아빠는 안방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맥주를 마십니다. 시각은 이미 11시가 다 되었는데, 허기진 배는 채워지지 않고 강정을 두 번이나 더 담아 와서 먹고, 아빠가 어린 조카가 먹으라고 사다놓았을 설탕 범벅인 빵과자까지 먹고서야 잠 들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어색함을 느낍니다. 뭔가가 빠져버린 듯 한 허전함. 아빠에게 아내가 없듯이 내게 엄마가 없기 때문입니다. 명절날 고향집을 찾으면 아무리 늦은 시각이라도 내가 도착할 때까지 자지 않고 계시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그 방으로 따라 들어오시던 엄마, 그리고는 내게 밤이 늦도록 결혼을 닦달하시던 엄마,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다가 조용히 TV를 끄고 안방으로 가시던 엄마, 그 엄마가 없습니다. 

명절 전날(22일)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아빠의 부스럭거림이 방문 너머 부엌에서 들려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홀로 아침을 챙겨 드시는 아빠는, 언제나처럼 혼자서 새벽같이 아침을 드신 듯합니다. 잠결에 가스 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잠결에 설거지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는데, 그 소리에도 당신의 딸은 엄마가 살아 계시던 예전처럼 이불 속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밍기적거리기만 합니다.

부엌에서 건너오는 작은 소란스러움에 일어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도, 엄마가 살아계시던 그때처럼, 엄마가 방문을 열고 '아가씨야, 대체 몇 시에 일어날 건데, 아침 안 먹을 거야?' 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가 할 뿐입니다. 그러나 아빠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듯, 저 역시 새로운 상황에 적응을 해야 하고, 더 이상 염치없는 딸일 수만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빠는 이미 고사리 나물을 삶아 놓으셨고, 시금치까지 다듬고 삶아 놓으셨습니다. 

아빠는 고기를 삶고, 딸은 생선을 찌고…

아빠는 곧 부엌을 나가시면서 당신이 고기를 삶아야 하니까, 먼저 생선을 찌라고 합니다. 아빠가 미리 장봐 놓으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만 제사에 올린다는 걸 알고 있는 생선 아홉 마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생선을 찐다는 것, 제사상에 올리는 생선은 찐다는 것, 먼저 생선이 다 익었을 때 부서서지 않도록 생선머리부터 긴 꼬지를 끼운다는 것, 구멍을 조금씩 뚫어 은박지를 생선 크기대로 맞춤하게 잘라서 생선을 감싸주고, 그 상태로 아주 큰 찜 냄비에 담아서 생선을 찐다는 것, 생선이 다 쪄진 다음에는 그 은박지가 생선에 달라붙지 않도록 은박지를 잘 떼 내어 줘야한다는 것, 엄마와 보낸 마지막 명절이었던, 그나마 명절 분위기가 났던 10년도 추석 때 엄마가 둘째 딸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빠가 마련한 수육
 아빠가 마련한 수육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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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찌고, 아빠는 고기를 삶습니다. 아빠의 사위와 조카가 좋아하는 수육을 아빠가 직접 삶고 싶은가 봅니다. 큰 냄비에 고기를 넣고, 소주도 조금 붓고, 엄마의 장독대에서 엄마가 만들어 놓으신 된장을 알맞게 꺼내서 넣고 오래오래 끓입니다. 언제나 엄마가 하시던 고기 삶기를, 엄마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설날에, 아빠 두 손으로 물을 붓고 불을 켜고 아빠 두 손으로 꺼내십니다.

명절날(23일) 아침, 일찍 제사를 함께 지낸 결혼한 언니는 곧바로 시댁으로 떠나고, 또다시 아빠와 저만 남습니다. 한때는 할머니와 우리네 식구, 작은 아버지네 식구로 열 명이 북적였던  집에 아빠와 나, 둘만이 있습니다. 아침이 먹고 싶지 않은 나는 아버지에게 간단히 설날 아침상을 차려 드립니다. 엄마가 계셨더라면 수육도 썰고, 새김치도 가지런히 잘라서 접시에 담고, 김도 꺼내고 엄마가 만든 도토리묵도 수북이 담았겠지만, 아빠 혼자 드시는 명절 아침상에는 밥 한 그릇, 탕국 한 그릇, 나물 한 접시, 전 몇 개와 생선 한 마리가 놓일 뿐입니다.

너무나 소박해진 명절맞이
 너무나 소박해진 명절맞이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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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없는 아빠의 명절이, 엄마가 없는 딸의 명절날이 흘러갑니다. 엄마는, 제사를 지내고 식구들이 먹을 아침 준비와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곤한 잠을 주무셨습니다. 엄마가 잠을 자던 그 방에 홀로 누웠습니다. 이 딸이 결혼을 한다면 아빠의 명절은 어떠해질 지 머릿속이 복잡해져 갑니다. 그러다 그 딸도 예전의 엄마처럼 곤한 잠에 빠져들고 맙니다.


태그:#아빠,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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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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