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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는 그림으로 아래는 한자를 써놨는데 그림만 보고도 글자의 짐작될 만큼 명료하다. 낙서는 세계 공통인지 벽에 낙서가 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
▲ 동파문자 위에는 그림으로 아래는 한자를 써놨는데 그림만 보고도 글자의 짐작될 만큼 명료하다. 낙서는 세계 공통인지 벽에 낙서가 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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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쁜 그림이 글씨라고?

리장(麗江)에서 우선 눈에 확 들어온 것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그림이었다. 자세히 보면 위에는 간략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래는 한자로 써 있다. 이런 것이 리장(麗江) 곳곳에 그려져 있고, 나무에 새겨져 걸려 있다. 여행 첫날(1월 14일) 일정으로 흑룡담공원과 옥수채, 리장(麗江) 고성을 찾았다. 리장에는 나시족이 많이 살고 있다. 약 30여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소수민족으로서는 제일 많다.

백사촌 건물 벽에 장식된 동파문자
▲ 백사벽화 백사촌 건물 벽에 장식된 동파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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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촌에는 매화꽃이 파란 하늘 아래 곱게 피어 있었다. 곤명을 봄의 도시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시족 문화의 상징인 동파문자가 벽에 그려져(?) 있었다. 예뻤다. 한폭의 그림같다. 동파문자는 사물의 형태를 그대로 그리거나 일부분의 특징을 부각시켜 만든 문자다. 동물의 경우 말은 갈기를, 돼지는 입을, 호랑이는 얼룩무늬를 상징으로 해서 글자화했다. 이렇게 명료할 수가 있을까! 대담한 과장과 때로는 생략과 요약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나시족의 수제종이에 곱게 쓰여진 동파문자
▲ 동파문자 나시족의 수제종이에 곱게 쓰여진 동파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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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희노애락과 온갖 사물에 대한 관점을 원시적 관념으로 잘 표현해낸 듯하다. 동파문자는 많지 않지만 단어가 풍부하고 인간의 세세한 감정과 복잡한 사건, 시, 문학까지 표현하고 있다니 이들의 문화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도안으로 쓰면 대박나지 않을까? 옷과 벽지, 또는 인테리어나 컵문양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문자를 만든 나시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백사촌에 핀 매화가 봄인 듯하다
▲ 백사촌 백사촌에 핀 매화가 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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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나시족은 간쑤(甘肅)성과 칭하이(靑海)성 일대에 살던 티베트계 유목민족이었다. 인구가 많지 않아 주변 강한 민족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살아오다가 9세기경부터 이동해 리장(麗江)의 바이샤(白沙)에 살던 중 더 입지가 좋은 리장 고성의 다옌진(大硏鎭)에 정착했다. 여기서도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3세기엔 몽골의 침입을 받았고, 18세기엔 청나라의 박해가, 문화대혁명(1966) 시기엔 남녀모두 양가죽을 걸치는 유목민 특유의 복식문화와 독자적인 풍습을 금지당했다.

소원문을 목판에 써서 매달아 놓은 것
▲ 기원문 소원문을 목판에 써서 매달아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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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동안 부침이 있었지만 나시족은 그들만의 문화와 풍속을 잘 유지해왔다.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와 동파교, 전통음악 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중국내에 주민족인 한(漢)족 외에 자신들만의 문자나 언어 종교 등을 보존하고 있는 소수민족은 많지 않다.

리장 고성에는 골목골목 구석구석까지 수로가 연결돼 있어 친환경적이고 수로가 아름다와 수로변에는 카페가 즐비하고 마침 그 위에서 웨딩촬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리장고성의 수로 리장 고성에는 골목골목 구석구석까지 수로가 연결돼 있어 친환경적이고 수로가 아름다와 수로변에는 카페가 즐비하고 마침 그 위에서 웨딩촬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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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대에 사는 나시족의 주식은 주로 옥수수라고 했다. 집집마다 옥수수를 걸어 말리는 풍경이 눈에 많이 띄었다. 나시족 여인들이 부지런하고 생활을 꾸려가는 반면에 남자들은 별로 하는 일없이 한가하다고 했다. 집집마다 야크를 키우는데, 집안의 중요재산이다. 우리를 안내하던 현지 가이드는 리장에 살면서 나시족과 결혼해 자기도 편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나시족 부인을 얻으려면 야크 5마리는 있어야

"나시족 여인과 결혼하려면 야크가 있어야 해요."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아세요?"
"몇 마린데요?"
"최소한 5마리요."
"몇 마리 벌었어요?"
"아직 없어요. 그래서 지금 혼자예요. 열심히 벌어서 나시족과 할 거예요."

우리 일행은 폭소를 터트렸다. 야크 한 마리값이 한국돈으로 400~500만 원은 된다고 하니 가이드의 월급으로는 쉽지 않을 듯 했다. 과연 가이드는 나시족 여인을 얻을 수 있을까?

리장고성에는 집집에 옥수수를 걸어 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고 가옥 2층에는 옥수수를 대량으로 걸어 말리고 있다
▲ 옥수수 리장고성에는 집집에 옥수수를 걸어 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고 가옥 2층에는 옥수수를 대량으로 걸어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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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시족은 큰 변화의 물결 속에 놓여 있다. 순수하고 순박함에서 극도의 상업화로 치닫고 있다. 연간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으로 인해 생활이 너무 바뀌었고 박제화되어
간다는 느낌이다. 안타깝다. 세월이 더 흐르면 이들의 풍습도 사라지고 마는 걸까?

리장고성의 가옥을 들여다 본 모습과 골목
▲ 리장고성의 가옥 리장고성의 가옥을 들여다 본 모습과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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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장고성의 높은 곳 만고루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나시족 마을
▲ 리장 고성 리장고성의 높은 곳 만고루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나시족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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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족은 동파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동파교를 주관하는 사제를 동파라 한다. 동파(東巴)는 '현명한 사람'이란 뜻이다. 1983년경에 60여 명의 동파가 있었지만, 1995년 현재에는 70세, 74세, 85세의 세 명의 동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직계세습으로만 동파가 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동파들의 자녀들이 이를 이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동파교는 더 이상 나시족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더 이상 동파교를 이해하지 못하며, 믿지도 않는다고 한다.

리장고성 중에서도 번화가인 4방가의 화려한 야경-불타는 듯하다
▲ 리장고성 야경 리장고성 중에서도 번화가인 4방가의 화려한 야경-불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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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우리 것은 미개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우리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 글귀를 보며 씁쓸해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나시족의 웃는 얼굴에 겹쳤다. 

요즘에 와서 리장 지방정부에서도 잃어버린 동파문화를 제대로 살려보자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리장의 지난 10여년간 지속된 상업화와 중국 정부의 한족화로 많이 잊혀져가는 동파문화가 그 옛날의 찬란한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태그:#동파문자, #나시족, #리장고성,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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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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