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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갤턴은 찰스 다윈의 사촌이다.
 우생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갤턴은 찰스 다윈의 사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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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단종법'이라고 소개된 미국의 우생학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우수한 유전자를 보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등한 유전자를 모두 없앤다는 발상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 그 시초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영국에서 싹이 텄다.

우생학이라는 말은 1883년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갤턴이 사촌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영국 상류층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그들의 현재 지위는 대대로 이어진 유전적 우월성에 기초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그처럼 선별적인 번식을 통해 인간 종을 진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보다 조금 앞선 1880년에 미국의 한 의사는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중에 나팔관을 묶는 시술을 처음으로 시행했다. 그리고 1894년에는 남성에 대한 불임 시술로 거세를 대신할 수 있는 정관 절제술이 소개되었다. 우생학 프로그램의 실행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었다.

인간의 유전인자를 향상시키고 인간 사회에 부적합한 열등한 유전인자를 없앰으로써 골치 아픈 사회문제들을 척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1912년에는 제1차 국제우생학대회가 찰스 다윈의 아들인 레오나드 다윈을 회장으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을 명예 부회장으로 해서 런던에서 열렸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비롯해 여성 사회 개량가 마가렛 생어,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인사들이 이를 지지했다.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는 이를 토대로 유태인 말살정책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경도되어 곧잘 '광기'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성폭행 피해자는 정신박약?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우생학 프로그램을 합법화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다. 1907년 인디애나 주는 범죄자, 얼간이, 저능아, 강간범들은 단종시킬 수 있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2년 뒤 위헌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집행이 중지되고, 1921년에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 시절이라고 모두가 우생학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생물학자 토마스 헌트 모건은 실험을 통해 빨간 눈을 가진 초파리 계보에서 하얀 눈을 가진 초파리가 나오는 현상을 확인하고 유전적 전달체계가 우생학자들의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고, 종교계 특히 가톨릭 쪽에서의 반발이 거셌다.

그런데 이러한 기류를 뒤집는 사건이 1927년에 발생했다. 일명 '벅 대 벨' 사건. 18세 처녀 캐리 벅은 정신지체자인 여성이 낳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세 자녀 중 한 명으로 다른 집에 입양되어 학교를 다니고 6학년이 되었는데, 임신을 했다. 양부모는 사생아를 낳았고 선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신박약'이라는 타이틀을 씌워 간질병 환자와 정신박약자를 수용하는 시설로 보내 버렸다. 그런데 친모가 그 시설에서 딸을 데리고 나오려고 하자 불임수술을 받아야만 나갈 수 있다고 했고, 이게 법정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위헌 여부 때문에 버지니아 주에서 연방 대법원으로까지 올라갔는데, 결국 8대 1로 벅이 패소하면서 미국 전역으로 우생학 프로그램이 번져나가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벅이 임신을 하게 된 것도 양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양부모의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한 탓이었고, 학교에 다닐 당시 성적도 중간 이상이었던 것으로 조사됐지만 당시에는 모두 묻히고 말았다.

제2차 국제우생학대회 로고
 제2차 국제우생학대회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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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을 낳아 기르기에 부적절한 자들

이후 미국 전역 32개 주에서 이를 실행에 옮겼는데, 처음에는 주 내에 있는 정신병 및 정신지체자 수용시설을 대상으로 퇴소 전에 불임 시술을 권장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만행이 온 천하에 알려지면서 우생학에 대해 우호적이던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경우는 40년대말부터 우생학 프로그램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회복지사에게 불임시술을 할 대상을 가려내는 권한을 준 유일한 주였기 때문이다. 1946년에서 1948년 사이에 이르면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 대한 불임 시술이 시설에 수용된 사람에게 행해진 것보다 많아지기 시작해서 꾸준히 늘어갔다.

이 때문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인구 비례보다 훨씬 많은 피해자가 나왔다. 전국적으로 피해자가 가장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 주(2만 1000명), 버지니아 주(8000명), 노스 캐롤라이나 주 (7600명), 미시건 주(3800명), 조지아 주 (3300명) 순이다.

불임 시술 대상자도 '자손을 낳아 기르기에 부적절한 자들'이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알코올 중독자 ▲간질병자 ▲장님, 귀머거리 및 다른 신체 장애인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 ▲범죄자 ▲정신박약자뿐만 아니라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 ▲강간 피해 아동 등까지 마구잡이로 법을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정부 보조금을 끊겠다는 등의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흑인 인구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면, 대다수의 대상자들이 젊은 흑인 여성으로 국한되어 갔다.

주정부 서가에 오랫동안 봉인된 채 베일에 가려져 있던 관련 서류들은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7000개가 넘는 케이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본인이 원해서 불임 시술을 한 경우는 446개뿐이었다. 게다가 2000건은 18세 이하 청소년에게 시행됐다. 개중에는 10세 어린아이에게 시술한 사례도 있었다. 미성년자의 경우 부모나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관료주의자들의 설득과 농간으로 결정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불임 시술 권고를 받은 케이스들은 우생학위원회에서 투표로 가부가 결정됐는데, 90% 이상이 15분 내에 통과되곤 했다.

흔히 판단의 근거로 쓰였던 것은 IQ 테스트 결과였다. 지금은 IQ 테스트가 가진 함정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 당시는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는 데 충분한 자료로 쓰였다. 'IQ 70 이하'는 아이를 낳아선 안 된다는 게 그 시절의 믿음이었다. 백인에 의해 백인 아이들을 평가하기 위해 개발된 평가방식으로 흑인 아이들, 특히 교육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행해진 테스트는 잘못된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하지만 생존해 있는 피해자 가운데 법정 소송을 벌인 소수의 사람들은 IQ 70 이하라는 판정을 받고도 대학을 나오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케이스는 IQ 70 이상이었는데도 규정을 무시하고 진행되기까지 했다.

<윈스턴-살렘 저널>은 2002년부터 별도의 웹사이트를 마련해 방대한 양의 관련 자료와 기사들을 올렸고, 결국 주정부 사과에 이어 피해자 보상을 하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윈스턴-살렘 저널>은 2002년부터 별도의 웹사이트를 마련해 방대한 양의 관련 자료와 기사들을 올렸고, 결국 주정부 사과에 이어 피해자 보상을 하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 Winston-Salem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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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권력의 치졸한 결탁

2002년부터 몇몇 주에서 강제 불임시술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이어질 때,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네 번째, 포시스 카운티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 윈스턴-살렘 시의 지방 신문인 <윈스턴-살렘저널>은 별도의 웹사이트를 마련해 우생학 프로그램과 관련된 방대한 양의 정보와 기사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피해자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그 배경으로 대중에게 알려야 할 중대한 사실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이 어떻게 이 일에 관련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윈스턴-살렘 시에는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가 있고 거기에 의과대학이 있다. 1953년, 생겨난 지 얼마 안된 유전의학 부서에 10만 달러의 기부금이 들어왔다. 기부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장본인은 뉴욕의 자선사업가인 위클리프 드레이퍼였다.

드레이퍼는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리서치들에 돈을 대고, 나치 우생학 컨퍼런스에도 참가했으며, <화이트 아메리카>라는 소책자의 자금 줄이었고,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은둔자처럼 베일에 가려진 그는 우생학 운동을 진흥시키고 급진적인 인종 정책들을 지지하는 데 아낌없이 돈을 써 왔다.

"드레이퍼는 당시 불 붓기 시작하던 인권운동을 막는 한 방법으로 과학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럿거스대학교 심리학과 윌리엄 터커 교수의 분석이다. 터커 교수는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의 자금조달: 위클리프 드레이퍼와 파이오니아 펀드>라는 책을 썼다. 파이오니아 펀드는 지금도 활동하는 비영리단체로 인종 차이에 대한 연구조사를 지원하기 위해 드레이퍼가 세운 재단이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인 윌리엄 애플게이트 교수는 "지금이라면 절대로 그런 돈을 받아서는 안되겠지만, 제 선에서 전임자들의 행적을 판단하고 싶진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시대 탓이라는 소리다. 과연 그럴까?

드레이퍼가 의과대학의 우생학 전문가 내쉬 헌던 박사를 만난 때는 1949년. 그보다 한 해 전인 1948년에 드레이퍼는 미네소타대학교의 다이트 인스티튜트에 똑같이 1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었다. 조건은 '인간 유전학 프로젝트'. 그러나 이 기관의 디렉터였던 쉘톤 리드 교수는 그 해에 쓴 어떤 편지에서 그 돈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또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인물은 프록터 앤드 갬블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제임스 갬블과 그의 '백인우월주의'에 영향을 받은 상속자 클래런스 갬블 박사였다. 갬블 박사는 여성 사회 개량가 마가렛 생어와 함께 '니그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것은 미국 최초의 정부 지원 산아 제한 프로그램으로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갬블 박사는 주정부의 우생학 담당 위원회에 금전적인 지원도 했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IQ 테스트 연구와 불임 시술에도 자금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불임 시술을 홍보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를 우생학의 깊은 골짜기로 이끌고 간 또 다른 인물은 메리야스 업계의 황제 제임스 한스다. 한스는 1947년에 지역 유지들과 함께 인간개량연맹(Human Betterment League of North Carolina)을 설립한다. 이 단체는 우생학 프로그램에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고 뉴욕의 전문 광고회사를 끌어들여 대대적인 홍보를 조직화했다.

그리고 산아 제한에 적극적인 관료 웰라스 쿠랄트와 손잡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서비스'가 도달할 수 있게 노력했다. 쿠랄트가 복지부 디렉터로 있던 1945년부터 1972년까지 멕클렌버그 카운티에서 이뤄진 불임시술 건수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 내 어떤 카운티보다도 많았다. 쿠랄트는 미국 CBS 방송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찰스 쿠랄트의 아버지다.

다른 주들에서 하나 둘씩 우생학 프로그램에서 발을 빼기 시작할 무렵,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자본과 권력을 바탕으로 관료주의와 결탁한 엘리트들에 의해 본격적인 인종 차별이 서슴없이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의과대학 캠퍼스. 뉴욕의 자선사업가이자 백인 우월주의자인 위클리프 드레이퍼는 1953년 '유전의학'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의과대학 캠퍼스. 뉴욕의 자선사업가이자 백인 우월주의자인 위클리프 드레이퍼는 1953년 '유전의학'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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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

성경의 두 번째 책 <출애굽기>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구출해 냈는지 기록하고 있다. 날로 수가 늘어나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경계하다 못해 이집트의 왕은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사내아이거든 모두 강물에 버리라고 지시했다. 수천 년 전의 이야기지만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스스로 '청교도의 나라'라고 자부하던 20세기의 미국에서 이와 유사한, 아니 어쩌면 더욱 잔인할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씨를 말리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흑인들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오랫동안 사회 최하층을 이루면서 온갖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20세기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흑인 인권운동이 본격화되긴 했지만, 현대판 '모세'가 되어줄 인권운동가들조차 우생학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1973년과 1974년에 두 흑인 여성에 의해 '스스로 돕는 자'가 나올 때까지 '태를 막는' 역사는 계속되었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행해진 우생학 프로그램은 잘못된 과학이 자본과 공권력을 등에 업고 얼마나 치졸하고 비열하게 힘없고 무지한 시민들을 농락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자신들의 판단이 최선이라고 믿는 파워 엘리트들이 어디까지 비뚤어질 수 있는지 상기시켜 준다. 미국의 '지우고 싶은 과거' 앞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태그:#우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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