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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살림프랜즈 펴냄)는 르포 작가 박영희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 열두 명 이야기다. 저자가 전국을 돌며 만난 열두 사람은 남들보다 볼품없이 살지만, 아니 버거씨병을 앓으며 다리를 절단했거나 꼽추이건만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장학금이나 불우이웃돕기 기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몇 년 동안 꾸준히 내놓고 있는 돈들은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주워 판돈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의 불편한 몸으로, 그리고 두 가지 반찬을 원칙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허리가 굽도록 농사일을 해 모은 그런 돈들이다.

 

"그런데 어르신 이 일을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벌써 3년째 장학금을 기부하고 계시잖습니까?"

 

"나 같은 게 무슨 기약이 있겠나. 하늘이 건강만 허락해 준다면 내 맘이 편해질 때까지 하고 싶네. 내 비록 내 자식들 가르치는 건 실패하고 말았지만 어려운 애들이라도 힘닿는 데까지 돌봐야지 않겠나?"

 

주인공 중 한사람으로 이 책의 제목을 짓게 한, "건강만 허락된다면 죽는 날까지,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주고 또 주겠다는,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 장학금을 내놓겠다는 왕재철씨의 나이는 85세(책속).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이런 그가 3년 전부터 돈이 없어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매년 수백만 원의 장학금을 내놓고 있는 이유는 조국이 어려울 때 성금을 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돈이 없어서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회한 때문이다.

 

혼담이 오갈 무렵 마을에 호소문이 나붙었다. 나라가 어려우니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라는 호소문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걸 본 왕씨는 속이 영 개운치 못했다.

 

"성금을 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수중에 돈이 있어야 말이지. 그리고 그때는 일본에서 벌어온 돈을 아버지한테 옴막(전부) 바친 뒤였다는 말일세."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며 아버지와 함께 소작농을 하고 화전을 일구는 등 온갖 궂은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일본으로 징용을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아버지 대신 징용을 자처, 일본의 건설 현장으로 끌려간다. 그의 나이 17세. 몇백 명 중 가장 어렸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 죽기 십상일 정도로 추운 홋카이도(영하 30도)에서 접시 밥을 얻어먹으며 몇 년 고생하고 받은 돈은 백만 원. 해방이 되자 그 돈을 소중히 끌어안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지을 땅을 사려고 하나 지주들의 떡고물에 불과한 돈이었다. 아무도 땅을 팔자고 내놓는 사람이 없어 그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기반이 없으니 평생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8남매(1남 7녀)나 둔 것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서. 아내가 내리내리 딸만 낳는지라 아들을 바라며 낳다보니 8남매까지 두게 된 것이다.

 

왕씨는 초등학교 3학년 봄, 일본인들이 학교를 부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는데, 말하는 것을 글자로 쓰는 공부에 대한 좋은 기억을 품고만 살았다. 아버지와 함께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면 무슨 일이든 끝없이 해야 했기에 공부에 대한 꿈은 꿀 수조차 없었다.

 

"다른 건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다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때를 놓친 자식들 공부만큼은 맘대로 안 되더라니. 뻐스 떠난 뒤에 손 흔드는 짓만 같고..."

 

그러니 공부에 한이 맺혔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이는 조국이 어려울 때 성금 한 푼 내지 못한 것과 함께 죽을 때까지, 주고 줘서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자신이 갚아야만 하는 그런 빚이 되고 말았다.

 

400평 임대 옥수수 농사로 3년째 장학금 내놓아

 

그는 밭 400평을 임대하여 옥수수 농사를 지어 3년째 수백만 원의 장학금을 내놓고 있다. 그가 옥수수 농사를 택한 것은 다른 작물보다 빨리 자라는지라 열심히 움직이면 이모작이 가능하기 때문.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곱절로 일해야 하는 이모작을 선택한 것이다.

 

글쎄? 돈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단절하기도 하고, 유산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형제간에 소송도 예사라는 요즘 세상에 왕재철씨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데 왕재철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책속 주인공들의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처럼 돈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숭고한 마음으로 나와 내 가족이 아닌 전혀 모르는 남을 위해 돈을 벌어 기부한다.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는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연들을 엮은 르포 에세이집이다.

 

왕재철씨 이야기 외에 ▲ 어느 날 갑자기 들리지 않는 귀로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고물을 모아 판 돈 천만 원을 몇 년째 기부하는 김영권, 배추선 부부 ▲ 버거씨병으로 다리를 절단했지만, 저금통 두 개로 이웃과 소통하는 노윤회씨 ▲ 도라지 농사 3년, 꼬깃꼬깃 접은 돈을 비닐봉지 한가득 모은 이공심씨의 백만 원 ▲ 시골 학교 평교사로 37년간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월급의 일부를 덜어 참교육을 실천한 유영빈씨 ▲ 시장 바닥에서 20년간 십장 노릇을 하며 모은 1억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정외순씨 ▲ 꼽추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의 곱지 않은 편견과 싸우며 온갖 궂은일을 해 모은 수천만 원을 기부한 양부억예 부부▲ 장학금을 기부하고 더덩실 춤추며 기뻐한 모복덕, 채동만 부부 등의 사연이 잔잔하게 소개된다.

 

덧붙여, 책속 주인공들은 나눔의 참된 의미를 온 몸으로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 누구는 "사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빚지는 일"이라고 말하고 또 누구는 "사람 나고 돈 나야 좋은 세상이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그들의 이야기는 누구의 사연이 특별하게 더 감동스럽다는 말을 못할 정도로 한 꼭지 한 꼭지가 저마다의 가치로 감동스러웠다.

 

게다가 우리들이 골목 어딘가 혹은 어떤 길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인 <길에서 만난 세상>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워낙 좋아하는 저자 박영희다.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릴 정도로. 이런지라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책을 읽는 그 몇 시간 동안 목이 뻐근했다(관련기사 :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었다, 울컥하며 읽은 책, 가슴이 짠하다 ).

 

그럼에도 유독 왕재철씨의 이야기를 우선 소개하는 것은 그가 '김제역이나 김제터미널서 5번 버스를 타고 가면 닿는 원평(성계리)', '원평에서 전주 가는 길목에 있는 1층에는 카센터, 3층에는 학원인 그 건물'에 살기 때문이다. 내가 자라 6년 동안 다녔던 초등학교 앞 그곳에 사는, 20세까지 자라며 수없이 스쳤을지도 모르는 아저씨인지라, 내 고향 누군가의 이야기인지라 조금 더 특별한 심정으로 읽었다고 할까. 고향 친구들에게 아저씨 이야기가 실린 이 책을 많이 알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ㅣ박영희 씀ㅣ살림프랜즈 펴냄ㅣ2011.9ㅣ1만2000원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 길 위에서 만난 나누는 삶 이야기

박영희 지음, 살림Friends(2011)


태그:#나눔, #기부, #장학금, #르포 에세이집, #박영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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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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