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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일진을 뿌리 뽑겠다고 말해요. 하지만 잡혀오는 일진들이 전부가 아니에요. 걔네는 조폭으로 말할 것 같으면 행동대장 격이죠. 그 위에 '특진'들은 안 잡힌다니까요."

 

문한뫼(17)씨가 말하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학교폭력이 조직폭력과 비견될 만큼 구조화돼 있다는 심각한 증언이었지만, '특진'이라는 생소한 단어에서 실소가 번졌다. 그러나 문씨는 웃지 않았다. 그는 학교폭력에 시달린 피해자였다.

 

최근 학교폭력이 큰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면서 경찰은 "일진회를 해체 시키겠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또한 "학교폭력을 근절하겠다"며 나섰다. 정부와 교육당국, 경찰까지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당사자들에게 터무니없게만 느껴진다.

 

지난 25일 오후 2시 대학로 흥사단 사무실에서 열린 '학교 폭력의 해법 모색과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집담회'에 참석한 문씨는 "일진을 잡는다고 폭력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며 '어른'들의 대책에 실효성이 없음을 꼬집었다.

 

서울시교육청과 전교조,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등 총 6개 단체가 공동 주최한 이날 집담회는, 1부에 '학교 안 폭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2부에서 '폭력의 학교·죽음의 학교를 넘어서기'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폭력근절'이 아니라 '평화' 강조해야"

 

"최근 대구는 연달아 터진 학교폭력으로 비상이에요. 대구시 교육청에서 학교로 폭력대책을 지침으로 내려보내고 있죠. '나 홀로 학생'을 찾아서 교육하고 선도하래요. 그런데 저는 나 홀로 학생의 기준을 잘 모르겠어요. 방과 후에 혼자 있으면 나 홀로 학생이라는데 요즘 애들 집에 가면 다 혼자 있잖아요. 근데 또 학원을 다니면 아니래요. 학원 선생이 같이 있으니까..."

 

대구 칠성초등학교 교사 이희진씨는 이러한 나 홀로 학생을 조사해 보고하려면 "방학에도 아침 9시까지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윗선에서 이런 대책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내려보낸 건지 의문이다"라며 "해결할 의지와 생각이 없는 대책이 너무 많다"고 교육청의 학교폭력대책을 비판했다.

 

정부대책을 성토하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 참가자는 "학교에 경찰을 배치하겠다는 대책은 폭력을 없애겠다면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찰 처벌이나 학적부에 빨간 줄을 긋는 것, 자퇴를 권유하는 것은 가해자들과 사회의 단절을 야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박영아 한나라당 원내부대표가 "교육현장에 여교사가 과도하게 많아서 학교 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한 발언에 "도대체 어떤 근거로 나온 진단이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날 집담회에서는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원인과 관련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폭력의 원인에는 다양한 것이 있지만 크게 구조적·사회적·제도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가지는 구조적 문제, 가해자 처벌과 같은 제도적 문제, 지역사회 내에서 이루진다는 사회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학교폭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 참가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발제자들이 흥미로워한 사실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 경계가 모호한 것뿐만이 아니라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가해자가 되길 바란다는 진단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참가자들은 '학교에서 폭력을 뿌리 뽑겠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교실"로 학교폭력 해결방법의 지향점을 둬야 한다는 공감을 이뤘다.

 

뇌출혈로 쓰러진 고3 실습생도 피해자

 

학교폭력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지난해 영화 <도가니>로 잠시 사회적 관심을 모았던 장애학생에 가해지는 폭력과 함께 성소수자와 이주가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장애인부모회 최석윤씨는 "학교 안에서 먹이사슬이 있다면 장애인들은 그 구조 가장 아래에 있으며 늘 피해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학생을 보호해야 할 학교에서조차 '참아라, 안 참을 거면 도망가라'는 식으로 사건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다"며 "학교폭력도 문제지만 학교폭력을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 자체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성토했다.

 

성 소수자의 경우 본인이 원하지 않는 '아웃팅'의 문제가 주요한 학교폭력의 사례로 뽑혔다. 아웃팅이란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타의에 의해 커밍아웃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점점 늘어나는 이주가정 학생의 경우, 이들을 위한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가 미흡하다는 점을 꼬집었다.

 

최근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무리한 근무를 하다 뇌출혈로 쓰러진 한 고 3실습생 또한 '학교실적'이 만들어낸 또 다른 학교폭력의 피해자라는 지적이 있었다. 전문계고등학교에서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현장실습도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폭력이라는 것이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하인호씨는 "학생들은 교과부가 취업률로 압박하는 상황에서 학교에 의해 내몰리고 산업체에서는 단순노동대체인력으로 치부되며 실습생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신분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1982년 노르웨이에서 10대 초반의 소년 3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것이 학교폭력 때문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었죠. 그런데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위원회가 설치되고 1년간 사회적 토론을 거쳐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가 진행됐어요. 교실단위, 학교단위로 학교폭력 대책 프로그램이 아주 구체적이었어요. 그 결과 학교폭력이 50-70% 줄었어요."

 

한 발제자가 발표한 사례다. 최근 학교폭력문제가 불거진 것은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청소년들의 자살 때문이었다. 누군가 죽어야만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논란이 된다는 것에 참가자 모두 깊은 회의감을 보였다.

 

이 논란도 한동안 들끓다 언제 사그라질지 모를 일이었다. 참가자들은 이제까지 논란은 있었지만 해결책이 없었다는 점에 깊이 공감하며 앞으로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과 학교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의지를 촉구했다.

덧붙이는 글 | 강혜란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학교폭력, #일진, #왕따, #자살,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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