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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4층에 진열 돼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4층에 진열 돼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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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독자를 맞이하는 것은 '화제의 신간' 진열대(front-of-store table)다. 하루에도 수천 권씩 쏟아지는 신간들은 이 진열대에 올려지기 위해 서점에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애플의 공동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 같은 책은 예외다. 출간 일주일 만에 미국에서 총 37만9000부의 판매를 기록하며 베스트 셀러로 등극한 이 책은 서점의 판매 전략에 따라 '화제의 신간'에 진열됐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이 출간되고 일주일 후인 지난해 11월 1일, 또 다른 자서전 한 권이 이 진열대에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인 <미지의 길>(The Uncharted Path)이다. 미국이 아닌 타 국가의 현직대통령 자서전이 '화제의 신간' 진열대에 진열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동안 몇 권이나 팔렸을까?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올해 1월 24일 현재까지 미 전역에서 1014권이 판매됐다.

전직도 아닌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에 거액을 들여 영문판 자서전을 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서전 영문 번역을 국가공무원인 청와대 공식 통역관이 했다는 점도 문제지만, 수억 원 이상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출판 비용의 출처 역시 명확치 않다. 미국의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자서전은 제목 그대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고 꼬집었다.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지난해 11월 1일 매장 입구 앞 '화제의 신간' 진열대에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이 진열 됐다.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지난해 11월 1일 매장 입구 앞 '화제의 신간' 진열대에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이 진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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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① 출판사 찾아 삼만리] "미국 주요 출판사 접촉했지만..."  

지난 1998년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자신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1995년. 김영사)를 미국에서 출판하려고 했다.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준비하던 이 대통령은 뉴욕의 한 한인변호사를 통해 영문 자서전 출판 가능성을 타진했다.

당시 이 대통령 자서전 영문번역 원고를 검토했던 한 관계자는 최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원고가 지나치게 직역인데다가 한국 국내 내용이 너무 많고, MB의 국제지명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미국 내 정식출판사에서 출판이 불가능했다"며 "그래서 돈만 주면 책을 인쇄하고 마케팅까지 해주는 보조금 출판사(subsidy publisher)를 소개해 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대법원에서 선거법 위반 및 범인 도피 혐의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고, 항소심에서도 유죄가 확정되자 서울시장 당내 경선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결국 이 대통령의 첫 영문 자서전 출간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이번에 출간한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 역시 <신화는 없다>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2007년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발간한 <어머니>,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등의 내용 중 일부가 삽입됐고, 지난 2002년 서울시장 당선 과정과 2007년 대통령 당선 과정, 퇴임 후 구상 등이 추가됐다.

이 대통령을 대리해 출판 계약을 전담한 곳은 에릭 양 에이전시이고, 책을 출판한 곳은 미국 시카고 서부 교외 도시 네이퍼빌에 소재한 '소스북스(sourcebooks)'다. 문제는 양씨가 랜덤하우스코리아의 대표이사라는 점이다. 양씨는 왜 랜덤하우스 영국 본사나 미국 계열사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출판 에이전트사를 통해 소스북스와 출판 계약을 맺었을까?

이와 관련 양씨는 지난해 6월 발간된 출판전문웹진 <퍼블리셔스위클리>(Publishers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내) 주요 출판사를 접촉했으나, 일부는 거부했고, 일부는 머뭇거렸다"고 말했다. 미국 내 주요 출판사들이 <미지의 길>에 대해 대부분 회의적이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양씨는 또 "소스북스가 한국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고, 이 대통령의 자서전 내용을 매우 좋아했다"며 출판사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연간 300여 권의 책을 출판하고 있는 소스북스가 1년에 자서전이나 비망록을 내는 비율은 1권 꼴 정도다. 그나마 정치인 자서전은 전무하다. 한국과 관련한 서적을 출판한 이력도 찾기 힘들었다. 주로 어린이 그림책, 로망·연애소설, 처세술책 등 상업적인 실용대중 서적을 제작하는 출판사에서 이른바 '고급독자와 식자층이나 관심을 보일' 한국 대통령의 자서전을 출간한 것이다.

소스북스가 출판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말 소스북스의 헤더 무어 수석홍보담당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처음 기자의 취재 요청에 반가움을 표했던 무어씨는 며칠 후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갑자기 인터뷰를 거부했다. 기자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무어씨는 "책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는 답변만 보내왔다. 출판사 홍보담당자가 특별한 이유 없이 책과 관련한 기자의 취재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소스북스로서는 중대한 사업전략의 변화임에도 이번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언론사를 상대로 한 보도자료도 내지 않았고, 출간된 책들의 저자를 소개하는 웹페이지에는 이 대통령의 사진조차 게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무어씨는 앞서 <퍼블리셔스위클리>에서 <미지의 길> 출판 배경에 대해 "가난 속에 태어나 새벽 4시부터 쓰레기 운반을 하는 등 어렵게 공부한 고학생이 대기업 현대 CEO와 서울시장을 거쳐 한국의 대통령에까지 오른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미국인들이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4층에 진열 돼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The Uncharted Path).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 반스앤노블(Barnes&Noble) 4층에 진열 돼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The Uncharted 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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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② 이상한 마케팅] '화제의 신간' 진열대에 오른 MB 자서전, 판매는?

에릭 양(한국명 양원석)씨는 "소스북스가 혁신적인 마케팅 아이디어와 전략을 갖고 있다"고 했다. 영미권에서는 '명망 있는' 정치인의 자서전의 경우 언론의 서평을 통한 마케팅이 주를 이룬다. 이른바 '서평이 이끄는(review-driven) 마케팅'이다.

전 세계 영문 간행물을 모두 망라하는 데이터베이스 팩티바(Factiva. 다우존스가 운영하는 유료 사이트)를 통해 <미지의 길> 출간 한 달 전인 10월 1일부터 1월 20일까지 몇 번의 서평을 받았는지 찾아본 결과 총 5건이 검색됐다.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인 NPR(11월 15일), 매달 500여 권의 신간 하나하나에 대해 200~300자 서평을 싣는 커커스 북리뷰스(10월 1일), 캐나다 보수신문 내셔널포스트(1월 5일), 파키스탄 영자지 The Financial Daily(10월 22일), 베트남 일간지 Saigon Giai Phong(10월 25일) 등이다. NPR의 경우 서평이 아니라 이 대통령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책 출판 내용이 소개됐다. 내셔널포스트는 보수칼럼니스트가 <미지의 길>을 자신의 정기 칼럼의 일부로 소개했고, 나머지 동남아 신문들은 자서전 출판을 알리는 스트레이트성 기사였다. 미국 주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미지의 길> 서평을 단 한 차례도 싣지 않은 것이다.

출판 마케팅의 또 다른 한 축은 서점과 계약을 맺고 홍보하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반스앤노블과 지난해 파산한 보더스(Borders) 등이 메가스토어 전략을 취함에 따라 등장한 것이 출판사들과 맺는 '광고협조계약'인데, 이 계약에 따라서 출판사가 광고계약비를 지급하면, 서점은 그 책을 눈에 띄는 장소에 전시하게 된다. 특히 반스앤노블은 자사 광고비용 일체를 광고협조계약으로 충당하고 있다.

반스앤노블의 전기·자서전 구매담당자인 에드워드 애시 밀비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출판사와의 광고협조계약에 따라) 이 대통령의 자서전을 미 대도시 반스앤노블 대형서점의 '화제의 신간' 코너에 진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밀비씨는 광고협조비, 책 판매 현황 등과 관련해서는 "(비밀엄수 규정에 따라) 말할 수 없다"며 일체 함구했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출판산업 전문월간지 편집자 A씨는 "반스앤노블과 광고협조계약을 맺었다면 최소 10만 달러(약 1억2000만 원)에서 최대 35만 달러(약 4억 원) 정도는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지의 길>이 출간된 11월은 평소보다 협조계약비가 높게 책정되는 시기였다. 미국인의 성탄선물로 털 스웨터와 도서가 늘 1, 2위를 다투는 가운데, 연말 쇼핑철을 앞두고 서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진열대에 책을 올려놓으려면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 전국 체인서점의 판매량을 집계하는 북스캔에 따르면 <미지의 길>은 출판 후부터 지난해 연말까지 두 달 동안 미 전역에서 1000권도 채 팔리지 않았다. 금년 들어서는 불과 41권이 팔렸다. 반스앤노블의 700여 개 대형서점이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례적인 전시 공세에도 책 판매량이 매우 저조한 셈이다.

A씨는 "그 정도의 마케팅으로 그 정도 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그 책이 반스앤노블 '화제의 신간' 진열대에 전시할 만큼 가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 전역 71개 공공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구입했다. A씨는 "그 숫자도 매우 낮은 편"이라며 "뉴욕만 해도 50여 개의 공공도서관 시스템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상업출판사인 소스북스가 '안 팔릴 것이 뻔히 예상되는' 이 대통령의 자서전 마케팅에 수십억 원을 쏟아 부었다는 점에서 비용의 출처에 이목이 집중된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출판 비용은 모두 출판사에서 부담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판매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The Uncharted Path). (화면 캡쳐)
 세계 최대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판매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자서전 <미지의 길>(The Uncharted Path). (화면 캡쳐)

[의혹 ③ 형식을 파괴한 책] 청와대 공식 통역관이 '자원봉사'로 번역?

<미지의 길> 출판은 청와대 제1부속실 이진영 국장이 총괄하고 이 대통령의 공식 통역관인 김일범(청와대 의전팀 행정관)씨가 영문 번역했다. 세금으로 녹을 받는 국가공무원이 두 명씩이나 공무가 아닌 대통령의 사적인 업무에 동원됐다면 권력남용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18일 <오마이뉴스>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보기에 따라서는 지적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개인이 좋아서 자원봉사 차원에서 업무시간 외에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진영 국장은 이 대통령이 지난 2000년 (BBK의 전신인) LKe뱅크를 만들 당시부터 비서업무를 담당해 왔다. 김일범씨는 외교통상부 출신 직업외교관으로 탤런트 박선영씨의 남편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 채 공무원들에게 여전히 기업 CEO 시절 자신의 비서처럼 일을 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미지의 길>은 책 자체로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우선 영문 번역서의 경우 번역자의 이름이 표지에 실려야 하는데, <미지의 길>은 책 표지가 아닌 내지에 작은 글씨로 김일범씨의 이름만 나온다. 또한 책 서두에 '감사의 말'이 형식상 들어가야 하는데, <미지의 길>은 책의 번역이 자원봉사로 이뤄졌음에도 오히려 '감사의 말'이 빠져있다. '번역자의 노트'가 저자 서문 마지막 페이지에 쪽글처럼 들어간 것도 영미권 출판형식에 맞지 않는 부분이다. 

이 대통령의 성에 대한 영문표기도 Lee와 Yi를 혼용해서 쓰고 있다. 책 표지 등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Lee Myung-Bak으로 표기되어 있는 반면, 내지에는 Yi Myong-bak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결국 소스북스는 대형서점 체인에 엄청난 금액의 마케팅 비용을 지불할 책의 영문 초고조차 제대로 검토하거나 편집하지 않고 표지만 씌워서 출판했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다.

'서평 알바' 동원(?) 의혹까지... "스티브 잡스가 통곡할 일"

<미지의 길>은 출간 직후 인터넷에서 '서평 알바' 동원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 등록된 자서전이 초기에 혹평을 받다가 이에 관한 한국 언론의 보도 이후 우호적인 평가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서전이 발간된 지난해 11월 1일부터 14일까지 전체 142명의 이용자 중 별 4~5개를 준 이용자는 28명에 불과했다.

혹평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글은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이 부패한 정치인의 싸구려 소설이 자신의 자서전 옆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본다면 무덤 속에서 통곡할 것"이라며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그가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11월 14일을 전후해 이 대통령의 자서전이 아마존에서 혹평을 받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12월 31일까지 전체 197명의 이용자 중 별 4~5개를 준 이용자가 159명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현재까지 별 4~5개를 준 이용자 220명 중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전에 아마존에서 어떤 리뷰도 써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한 이용자는 이 대통령의 다른 자서전까지 찾아내 똑같은 리뷰를 복사해서 올렸다.

언론비평 블로거 'deulpul'은 지난달 12일 자신의 블로그에 "별 5개를 줄 정도로 감명 깊은 책을 읽고 하나같이 달랑 두어 줄씩 서평을 썼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명박 자서전에 대한 평가 양상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이 책은 아마존에서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자서전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태그:#이명박 자서전, #영문자서전, #미지의 길, #이명박 대통령, #반스앤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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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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