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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이날 제막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지난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이날 제막된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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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태어나 약 20년을 산 덕분에 나는 부산 사람들의 정서를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친가 외가 모두 본관이 경주라 친인척들이 거의 경상도에 계셔서 영남의 분위기나 정서에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고향을 방문하면 영남의 날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무조건 박근혜 아이가. 내는 이번에 박근혜 찍는다."

칠순을 막 넘기신 어머니는 TV 뉴스에서 명절을 맞은 정치인 동정 소식이 나오자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도 무조건 박근혜 찍을 거라예."

옆에 있던 형수님도 거들었다. 평소 정치 문제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으신 어머니지만 박근혜 관련 뉴스는 소상히 아시는 듯했다. 며칠 전에는 박근혜가 해병대 부대를 방문했다면서 뿌듯해 하셨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어머니께서 먼저 정치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막내아들이 대단한 야성향(말하자면 '영남좌파')임을 의식한 탓인지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거들은 보릿고개 모르제. 얼매나 가난하게 살았다고. 박정희 대통령 아니었으믄 다 굶어 죽었다…. 박 대통령은 딸도 참 잘 뒀제."
"맞습니더."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어머니의 '기습공격'과 형수님의 지원사격에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젊은 시절을 박정희와 함께 보낸 영남의 어르신들에게 박정희는 거의 신적인 존재와도 같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선뜻 반격에 나서지 못했다. 수십 년간 쌓여온 그 신념과 애착은 예컨대 지지도와 충성심이 가장 높다는 노사모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두 마디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본전도 못 챙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TV의 뉴스에서는 이제 야당 정치인들의 명절 동정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정치하는 놈들은 다 도둑님인기라. 다 똑같다. 지들끼리만 다 헤쳐묵고."

야권의 대선후보들이 화면에 비치자 인물평도 하신다.

"안철수인가 뭔가는 조용하게 연구나 하지 뭐한다꼬 정치할라 그라노. 문성근이는 디게 못된 놈 같드만. 문 뭐시기(문재인)인가는 누군지도 모르겠고. 유시민은 얼굴도 얍삽하게 생겨갖고 별로다."

이쯤에서는 나도 뭔가 할 말이 많이 생겼으나 속사포처럼 터진 어머님의 말씀을 비집고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도둑놈? 지금 정치인들 중에서 최고의 도둑놈은 한나라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현직 국회의장이 당내 경선에서 돈봉투를 뿌린 사건으로 측근들이 잡혀가고 본인이 직접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게다가 돈봉투 살포사건을 친박계의 선제공격으로 인식한 친이계는 지난 대선후보 경선 때도 돈선거가 치러졌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로비 청탁과 함께 수억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오빠 김재홍 KT&G복지재단 이사장이 2011년 12월 14일 저녁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탑승한 뒤 손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 MB 사촌 처남 김재홍 구속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로비 청탁과 함께 수억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오빠 김재홍 KT&G복지재단 이사장이 2011년 12월 14일 저녁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탑승한 뒤 손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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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대통령이 실정법을 위반한 이른바 내곡동 사건도 대표적인 '도적질'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대통령과 영부인의 직계 4촌 이내 친인척들이 각종 비리로 조사를 받고 있다. 시야를 조금만 더 넓혀보면 '도적질'의 범위와 깊이가 다양해진다. 20조가 넘는 돈이 들어간 MB의 대표적인 공약사업인 4대강 사업은 대통령의 모교인 동지상고 출신들이 막대한 이익을 쓸어가고 있는 반면 현장 노동자들은 일한 만큼의 임금도 못 받고 있다. 또한 4대강 사업이 진행되는 유역의 금싸라기 부동산은 대통령 친인척들과 정권의 실세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어서 이후 천문학적인 이익을 챙길 것으로 예상된다.

MB정권의 핵심 실세들은 카메룬 다이아몬드 사건에서 주가조작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이런 전례로 미루어 보았을 때 현 정부 들어서 진행된 각종 이권사업이나 대규모 해외투자사업 등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가 숨겨져 있을지, 정권 말기에 미국에서 무려 14조 원어치 무기를 구매하기로 한 현 정권이 무슨 뒷돈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권력을 이용해 국가를 수익창출의 모델로 뒤바꾸려는 가장 노골적인 노력은 인천공항 민영화에서 드러났고 지금은 KTX로 옮겨간 상황이다. 날치기로 처리된 한미FTA 덕분에 이제는 의료나 에너지, 공공 인프라 등 국가가 공익의 목적으로 고유하게 하던 일들이 민간으로 넘어가면서 사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되면 민간업체 수익보장이라는 미명하에 '도적질'이 합법화될지도 모른다.

농민들과 함께 막걸리 마시면서 모내기하던 박정희도 밤에는 여자들 불러서 고가의 양주파티를 즐겼고 (10·26의 현장을 생각해 보라)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었던 정수장학회를 말 그대로 '도적질'을 했었다. 아니, 박정희는 총칼로 대한민국 자체를 도적질한 '대도'가 아니었던가. 그에 견주어 지난 10·26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선관위 홈페이지를 공격한 '부정선거 의혹' 사건은 수많은 의혹에도 지금 검찰의 발표만 놓고 보더라도, 집권 여당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부정하고 헌정질서를 유린한 총성 없는 쿠데타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도적질들은 예컨대 노무현이 억대 시계를 받았다는 '의혹', 한명숙이 5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 정연주 전 KBS 사장이 회사를 배임했다는 '의혹', 곽노현이 대가성 돈을 주었다는 '의혹'과 "쎔쎔"이 되면서 "정치하는 놈들은 다 도둑놈"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정권과 검찰이 야권 또는 야성향의 유력인사들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의혹을 터뜨리고 잡아가고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효과를, 적어도 여기 영남에서는 크게 보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런 '의혹'들의 대부분은 근거가 없다고 뒤늦게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훗날에 밝혀진 진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정치하는 놈들이 다 도둑놈들이라면, 그 도둑놈들을 모두 잡아다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법대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희한하게도 어차피 정치인들이란 다 도둑놈들이니까 그냥 힘 있는 사람 밀어주자는 해괴한 결론이 횡행한다.

"박정희가 죄 없는 사람도 마이 쥑있다 아입니꺼."
"그라믄 박근혜도 도둑놈인 거 인정하는 거지예?"

이런 식으로 말대꾸하려다가, 괜히 명절날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질까봐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극적 반전',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였다. 음력 그믐날의 밤도 깊을 무렵 도란도란 나누던 얘기는 막내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막내가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명절마다 친인척들 앞에서 어깨 힘주던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 박사학위를 받은 지 10년이 넘도록 아직도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연명해 오히려 다른 친인척들이 걱정해주는 처지가 됐으니 속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나는 내 근황과 우리 분야의 상황을 설명하다가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내뱉었다.

"… 이번 정부가 영어몰입교육인가 그거 한다고 그래갖고 대학들도 다 영어강의 한다고 난리치는 바람에 국내 박사는 별로 쓸모없다 이거라예. 미국 박사 아이믄 인간취급도 못 받는다 아입니꺼."

순간 어머니의 눈빛과 얼굴빛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정부의 '어륀지' 정책이 곧바로 대학의 영어강의로 직접 이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크게 조장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내가 아직 비정규적인 데에는 이보다 더 큰 이유들도 있지만 미국 학위자를 선호하는 풍토가 나 같은 국내 학위자에게 대단히 불리한 것도 사실이다.

아주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인과관계는 잘 모르더라도 어머니들은 뭔가가 자식들에게 좋을지 나쁠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또 직감적으로 알아낸다. 그밖의 세세한 문제들을 나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권 아래에서 막내아들이 더 대접받을 것인가? 어머니는 이미 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물론 아니었다. 평소에는 그냥 흘려듣던 이야기들도 양대 대형 선거가 다가오니까 어머니께는 더욱 민감한 문제로 느껴졌을 것이다. 한동안 말이 없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라믄… 민주당에서는 이번에 누가 나오노?"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현 정부의 이공계 '정책'에 대해서 다시 묻기도 하시는 게 아닌가. 평생 1번 찍으면서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무조건 박근혜" 하시던 분이 과학계 정책이나 심지어 야당에도 관심을 가지시니 이런 상전벽해도 없구나 싶었다. 순간 나는 "투표는 자기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노력"이라는 김어준의 말이 생각났다. 칠순의 어머니에게도 이 말은 사실이었다(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어머니께서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시게 돼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절에 다니시는 어머니는 설날이 지나면 못난 아들을 위해 돈을 들여서 불공을 드릴 계획이시란다. 어무이, 열 번의 불공보다 한 번의 투표가 더 확실합니데이, 라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려다 간신히 다시 들어갔다.

"부모의 자식사랑, 수십 년 된 투표신념도 뒤흔드는구나"

2011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한미FTA 반대 특별공연이 열린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공연을 즐기고 있다.
▲ <나꼼수> 여의도 공연 "이제 니들이 쫄 차례다" 2011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한미FTA 반대 특별공연이 열린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공연을 즐기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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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머니가 이번 총선대선에서 한나라당과 박근혜를 찍을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하지만 이번 설날 때의 대화 덕분에 아마도 어머니는 "무조건 한나라당"이나 "무조건 박근혜"를 선택하지는 못할 것 같다. 부모의 지극한 자식사랑은 수십 년 된 투표신념도 뒤흔드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도 어떤 후보가 내 어머니의 자식 걱정을 덜어줄 것 같으면 어머니는 그 사람에게 주저 없이 소중한 한 표를 던질 것이다.

모든 부모의 제1의 정치이념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자식걱정이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라도 여염집 부모들의 이런 평범한 고민들(출산에서부터 육아, 교육, 의료, 급식, 대학등록금, 취업, 결혼, 주택 등)부터 해결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원대한 이상이나 비전도 여기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공허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정치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여걸 미실은 젊은 시절 자신의 권세를 위해 자식마저 내버린다. 그런 미실은 제1의 세도가가 될 수는 있었지만 결코 나라의 주인은 될 수 없었다. 황제의 마음은 어버이의 마음과도 같기 때문이다. 미실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관련기사 : 덕만과 노무현, MB와 미실... 닮았을까).

올해는 선거의 해,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누구라도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국민의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기본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여염집 부모의 마음부터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치국과 평천하의 원리는 수신과 제가의 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선을 코앞에 둔 올 추석 때는 어머니와의 의견 차이를 더 많이 줄일 수 있을까? 벌써부터 다음 명절이 기다려진다.


태그:#총선, #대선, #설 민심,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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