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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완성된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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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에 미륵불이 조성된 것은 776년(혜공왕 12년)이다. 당시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면서 금동 미륵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미륵불은 장육불로 2층의 산호전(珊瑚殿)에 모셔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미륵불은 1872년 대원군에 의해 훼손되기까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제속리사(偶題俗離寺)>라는 시에 법주사 미륵불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문장대 위엔 천 년 이끼가 덮이었고                   文藏臺封千古蘚
우타굴 앞엔 만 그루 소나무가 그늘졌네.            于陁窟蔭萬株松
용은 탑 속에 들어가 진골이 됐고                      龍歸塔裏留眞骨
노새가 바위 앞에 누워 거룩한 자취를 찾았다네.  騾臥喦前訪聖蹤
길이 삼한에 복을 내릴 분이 뉘신고                   永福三韓誰是主
산호전의 빛나는 금부처일세.                           珊瑚殿上紫金容

속리산 문장대
 속리산 문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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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쓴 박효수(朴孝修)는 속리사의 금부처가 우리나라에 복을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조선의 선비 정시한도 17세기에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해 <산중일기>를 남겼다. 그 글을 보면 미륵불이 2층 누각 안에 모셔져 있고, 그 모습이 크고 웅장한 것으로 묘사됐다.

1872년 훼손된 미륵불은 1939년에 이르러 조작가 김복진에 의해 되살아나게 된다. 이때는 청동을 구할 수 없어 시멘트로 미륵불을 조성하기로 하고, 높이를 60척으로 맞췄다고 한다. 그러나 1940년 김복진이 갑자기 죽어 공사가 중단됐고, 그 후 그의 제자인 윤효중, 권진규 등에 의해 작업이 재개됐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1964년 6월에야 문화재관리국이 주관해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때 임천이 설계하고, 신상균이 시공했다 한다.

금동미륵대불의 옆모습
 금동미륵대불의 옆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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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7년 콘크리트 미륵불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이를 철거하고, 청동 미륵불로 다시 만들기로 했다. 청동 미륵불은 160톤의 청동을 사용해 1990년이 돼서야 완성됐다. 그리고 2000년에는 청동불을 금동불로 만들기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 80kg의 금을 3mm 두께로 미륵불 표면에 입혔고 2002년 6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현재 금동 미륵대불은 8m의 화강석 기단 위에 안치돼 있으며, 높이가 25m에 이른다.

미륵대불의 기단부 안에는 용화보전이 조성돼 있다. 법당 가운데는 생각에 잠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앉아 있다. 그는 미래불로 수십억 년 후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용화보전의 천정에는 천녀들이 있는데, 마치 천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미륵보살의 나투심을 축하하는 듯하다. 기독교의 성당이나 교회처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돼 있으며, 장엄하고 화려한 느낌이 든다.

돌로 된 석연지와 쇠로 된 철확

석연지
 석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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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지는 돌로 만든 작은 연못(蓮池)이다. 전체적으로 한 송이 커다란 연꽃처럼 보이는데, 극락을 상징한다고 한다. 높이 200cm, 둘레 665cm의 화강석 조형물로,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8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다. 석연지는 전체적으로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와 하대석, 중대석, 석연지, 난간이 그것이다.

사각의 기단부 위에 팔각의 하대석이 놓여 있다. 하대석의 아랫부분에는 안상을 새겼고, 윗부분은 3단으로 각을 줄여가다 복련으로 위를 덮었다. 중대석은 가늘게 만든 데다 구름문양을 돋을새김해서 입체감을 살렸다. 상대석에 해당하는 석연지는 반구형으로 전체 조형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위로 올라가면서 3단으로 앙련을 새겼는데, 가운데 것이 특히 크다. 그리고 가운데 연꽃에는 보상화문을 새겨 넣어 화려함을 더했다.

석연지의 연꽃무늬
 석연지의 연꽃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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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위의 난간 부분은 석재가 다른 것으로 보아, 따로 조성해 갖다 얹었거나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난간의 아래수분은 천인상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은 손잡이 형태의 테를 둘렀다. 이러한 난간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에서도 확인된다. 이 난간 때문에 향로로 사용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법주사의 석연지는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연지 조각으로, 1962년 국보 제64호로 지정됐다.

석연지의 동쪽에는 쇠솟인 철확이 있다. 주철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120cm, 지름이 270cm, 두께가 3~10cm나 된다. 철확의 크기로 보아 법주사의 승려가 가장 많았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강원 옆 공양간에서 국을 끓일 때 사용했으나 현재는 문화재(보물 제1413호)로 전시 및 보전되고 있다.

팔상전

팔상전
 팔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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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은 오층목탑 형식의 전각으로 법주사의 중앙에 있다. 이름 그대로 네 벽면에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개의 그림(八相圖)으로 표현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 탄생 장면, 성문 밖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출가 장면, 고행 장면,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설법 장면, 열반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전각의 가운데는 동서남북으로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이들 중 동서남쪽은 좌상이고, 북쪽은 와불로 열반상이다.

동쪽의 석가모니불좌상 좌우에는 태자상과 호명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 서쪽의 석가모니 불좌상 좌우에는 태자애마상과 태자삭발상이 있다. 남쪽의 석가모니불좌상 좌우에는 제화갈라보살 입상과 미륵보살 입상이 협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북쪽의 열반상 좌우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이들 사면불 앞에는 하얀색의 천불좌상이 배치돼 있다.

남쪽면의 석가보니불좌상
 남쪽면의 석가보니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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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은 건물의 양식과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르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주심포 양식으로 지었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만들었다. 건물의 가운데에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을 배치하고, 그 주변으로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배치했다. 팔상전은 사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계단과 문을 만들었으나, 신도와 관광객들은 남쪽으로만 출입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6년(인조 4년) 벽암대사에 의해 중건됐다. 건물의 규모는 높이가 65m, 건평이 49평, 사용된 기둥의 숫자가 561개로 알려져 있다. 평면은 정방형으로 돼 있으며, 정면과 측면이 1, 2층은 5칸, 3, 4층은 3칸, 5층은 2칸으로 돼 있다. 내부는 정사각형으로 평면 중앙에 심초석(心礎石)이 있고, 네 귀에 우고주(隅高柱)를 세웠다. 여기서 심초석은 중심이 되는 기초석을 말하고, 우고주는 내부건물을 지탱해 주는 높은 기둥을 말한다. 1969년 해체·보수할 때 심초석에서 사리구와 명각동판이 발견됐으며, 이를 통해 건립 연대를 알 수 있게 됐다.

쌍사자석등과 사천왕 석등

쌍사자석등
 쌍사자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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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또 다른 문화유산은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이다. 720년(성덕왕 19년)에 조성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쌍사자석등이다. 이것은 또한 8각의 기둥 대신에 두 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특이한 형식이다. 그리고 머리 갈기와 다리 근육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예술성도 뛰어나다. 두 마리의 사자 중 한 마리는 입을 열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닫고 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첫째로 입을 다문 것은 수놈이고, 입을 연 것은 암놈이라는 세속적인 해석이 있다. 두 번째로는 공격과 방어의 형태를 취하는 금강역사처럼 아(입을 벌림)와 음(입을 닫음)을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세 번째로 사자는 스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때 입을 벌린 것은 스님이 염불과 경학을 하는 모습이고, 입을 다문 것은 참선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한다. 한 번 웃고 넘어갈 만한 이야기들이다.

사천왕석등
 사천왕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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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자석등에서 법주사 주전각인 대웅보전으로 향하다 보면, 그 앞에 사천왕석등이 있다. 석탑 형식으로 지어진 팔상전, 사천왕 석등, 대웅보전이 하나의 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탑, 석등, 부처님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절의 모습이다. 사천왕 석등은 8각의 기둥 위에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이 있는데, 네 개의 화창 외 네 면에 사천왕 조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석등으로 전체 높이가 3.9m나 된다.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복련과 앙련을 새겼으며, 상대석의 앙련 안에는 다시 보상화문을 조각했다. 사천왕상과 앙련의 조각기법이 특히 우수하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잘 맞고, 양식이 정제되어 있어 8세기 이후 불교미술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 희견보살입상
 석조 희견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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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법주사의 석조물로는 석조 희견보살입상(보물 제1417호)이 있다. 보살이 지대석 위에 서서 두 손으로 꽤나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희견보살이 부처님께 향을 피워 공양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살상의 마모가 심해 상호라든지 옷의 주름, 매듭 같은 부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이것을 가섭존자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전체 높이가 약 2m 정도에 이른다.


태그:#금동미륵대불, #석연지, #팔상전, #쌍사자석등, #사천왕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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