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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 열풍입니다. 평생 한 번 가보지도 못한 내곡동이 익숙해졌고, 관심 없었던 디도스(DDoS)가 뭔지도 알게 됐습니다. 블록버스터급 꼼수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 초대형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어떤 꼼수들이 숨어 있을까요.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일상 속의 크고 작은 꼼수를 모아 봤습니다. [편집자말]
12월은 각 대학의 기말고사 기간이다. 하지만, 시험기간만 되면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이 생기고, 읽지 않았던 고전이 술술 읽히고, 보지 않았던 드라마도 챙겨보게 된다. 모험가이자, 연구가이자, TV 홀릭이 되는 증상은 시험기간이 끝나면 자연스레 사라지지만, 이런 증상 때문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레 '꼼수'를 꿈꾸게 된다.

나는 보통 시험과 정면으로 승부해 장렬하게 전사하는 쪽을 택하는데, 가끔은 꼼수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낄 때가 있다. 이럴 땐 친구의 필기 요약본을 빌리거나 학과에 대대로 내려오는 시험 족보를 찾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커닝을 계획한다. 지금껏 꼼수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인생이지만. 모두의 행복을 위해 친구들에게 경찰 출동 안 하고 쇠고랑 안 차는 수준의 시험기간 꼼수를 알아봤다.

서로서로 감시하는 분위기... 꼼수는 쉽지 않아요

친구들은 시험기간 꼼수를 직접 감행해보지 않았더라도, 주변 친구들에게서 '그들만의 꼼수'를 많이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경희대에 다니다 휴학한 이병호(25)씨에게 시험기간의 꼼수를 묻자 두 가지 방법을 털어놨다.

글자 크기 6포인트, 색깔 진한 회색에 굵기는 진하게로 뽑으면 내용은 보일듯 말듯 한데 ohp필름이 눈에 띄게 된다. 그래도 종이보단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단, 손으로 만지면 글씨가 쉽게 지워지니 조심할 것.
 글자 크기 6포인트, 색깔 진한 회색에 굵기는 진하게로 뽑으면 내용은 보일듯 말듯 한데 ohp필름이 눈에 띄게 된다. 그래도 종이보단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단, 손으로 만지면 글씨가 쉽게 지워지니 조심할 것.
ⓒ 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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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이 해봤거나, 어디서 들어봤던 시험기간의 꼼수를 말해줘.
"사실 고전적인 꼼수인데, 시험 내용을 정리해서 OHP 필름에 인쇄하는 방법이 있지. 글자색은 회색, 크기는 3포인트 정도가 적당해. 인쇄한 용지를 책상에 두면,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지 않는 한 뭐가 있는지 잘 안 보인다고. 하하. 시험 볼 때 그걸 보면서 문제를 푸는 거지. 나름 유용하다고."

- 에이, 솔직히 너무 고전적이라 교수님도 알고, 조교들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좀 색다른 거 없어?
"여기서 발전한 게 있긴 있어. 비○○ 워터 같은 음료수 있잖아. 그 음료수의 라벨과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글꼴로 정리한 내용을 인쇄해 병에 붙여놓고 보는 거지. 글씨가 많은 제품일수록 활용 빈도가 높아지지. 근데, 요즘은 서로서로 감시하는 분위기라 꼼수 부리는 게 쉽지 않아. 걸리면 재시험을 치기도 하니 위험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커닝에 유용한 한 음료병. 음료 라벨과 똑같은 용지에 시험 내용을 인쇄해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커닝에 유용한 한 음료병. 음료 라벨과 똑같은 용지에 시험 내용을 인쇄해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음료수 병에 커닝 페이퍼를 붙이는 창의성이라면 그 학생은 뭘 해도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놀라운 창의성을 시험 꼼수에 발휘해야 하는 현실에 잠시 한숨. 이번엔 역시 휴학생인 윤성원(23)씨 이야기를 들어봤다.

- 너희 학교에서 자주 쓰이는 시험기간 꼼수가 뭐야?
"우리 학교에는 과목명은 같고 주간, 야간으로 시간만 다른 과목이 있어. 주·야간이 함께 시험을 치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주간반이 먼저 시험을 보고, 야간반이 나중에 시험을 보는 경우가 있지. 그런 과목은 교수님이 시험문제를 크게 바꾸지 않아. 야간반 학생들이 주간반 학생들에게 문제를 물어서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있지. 시간차를 이용한 꼼수라고나 할까?"

- 근데 주간반 학생들이 문제를 쉽게 말해줘?
"당연히 말해주지 않으려고 하지…. 이럴 때는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해. 친한 친구가 있으면 살짝 귀띔해주기도 한다고. 언젠가는 주간반 학생들이 시험 먼저 치는 것 때문에 교수님께 항의한 적도 있었어. 솔직히 손해 본다는 느낌이 없진 않았을 거야."

윤성원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번 학기에 들었던 과목 하나가 뇌리에 스쳤다. 과목이 같고 시간만 달랐던 수업. 나는 나름의 수완을 발휘했다. 친구에게 중간고사 문제를 미리 들었던 것이다. '이런 게 죄의식 없는 꼼수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미리 알아버린 나는 A+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셈. 하지만 성적은…. 문제를 미리 알고도 공부를 안 한 내가 죄인이 돼 버렸다.

김기석(25)씨는 "남자들끼리는 노트 빌려주는 게 아무렇지 않은데, 여자들은 조금 민감해하는 것 같다"며 "시험기간의 꼼수라면 주변에서 대놓고 하진 않아도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종이에 핵심 키워드를 적어 놓고, 길게 뽑아 펜에 감아 놓는 것은 어떨까"라며 "솔직히 해보지 않아 성공할지는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꼼수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 주변 사람들의 '꼼수'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수준의 '저급한' 꼼수들이었다. 하도 주변에서 글로벌을 외치니, 해외에 눈을 돌려보기로 했다. 다른 나라 친구들은 시험기간에 어떤 꼼수를 부릴까?

나라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꼼수는 없어요

한국의 교육열은 그 어느 나라보다 뜨겁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과잉 경쟁이 시험에서의 꼼수를 낳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교육열은 그 어느 나라보다 뜨겁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과잉 경쟁이 시험에서의 꼼수를 낳는 것은 아닐까.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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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들에게 꼼수를 물었더니 '대체로 꼼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험기간에 꼼수가 없다니! 다른 나라는 꼼수의 청정지대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내용을 들어봤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지성(25·코넬대)씨는 "내가 시험기간에 꼼수를 부렸던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이 부렸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지는 못했어요"라며 "이곳은 표절이나 커닝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이어 "여기 사람들은 남이 못해야 내가 더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과는 상관없이 내가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듯해요"이라고 덧붙였다.

이가연(20·보르도3대)씨는 "시험이 전부 교수님과 1:1 토론 형식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꼼수는 아예 꿈도 못 꿔요"라며 "내가 공부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의미가 있지 점수를 잘 맞고 못 맞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녀는 "시험 준비를 같은 과 친구들하고 함께하면 도움이 많이 돼서 시험기간에 다들 모여서 공부해요"라고 덧붙였다. 순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환경을 전하는 그녀가 부러워지기도.

그렇다면 중국은 어떨까. 중국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고 하니, 대학 안에서도 꼼수가 횡행하지 않을까. 길림대에 다니는 김기성(24)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에이~. 여기는 꼼수 부리는 애들이 거의 없어요. 학교에서 커닝 같은 거 하다가 걸리면 퇴학당할 정도로 처벌이 강력하거든요. 근데, 제가 보기에는 중국 학생들의 경쟁 심리가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고등학생 때까지는 대학에 가야 하니까 애들이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이길까' 고민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런 것도 거의 없어진대요. 대학 입학하는 학생 수가 고등학교 졸업생의 30~40%밖에 안 돼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해외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글로벌한 꼼수'를 들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되레 기분이 착잡하고 머리가 멍해졌다. 해외 대학생들의 경쟁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경쟁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랄까. 서로 간의 경쟁의식이 희박하니 꼼수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자 알아서 공부하면서, 쓰잘떼기 없이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밟고 올라설까'를 고민하지 않는 대학 분위기를 기대하는 건 나만의 사치일까.

며칠 전, 시험 기간에 필기 요약본을 빌려 달라던 친구가 떠올랐다. 오죽했으면 나 같은 '학점 빈곤자'에게 필기 노트를 빌리러 왔을까. '그래도 서로 돕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한 나는 그 친구에게 쿨하게 노트를 빌려 줬다.

근데 이게 웬일. 그 친구가 내 노트를 잃어버렸다고 하는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는 그냥 '괜찮아'라며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날 견제했던 것 같다. 학점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의 교실에서 꼼수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이제 몇 과목 남지 않은 기말고사. 꼼수의 유혹은 곳곳에 널려 있지만, 이번에도 한번 제대로 정면승부 해야겠다. 비록 장렬히 전사할지라도.


태그:#시험기간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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