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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가 철철 넘쳐흐른다
▲ 아빠의 꽃 애교가 철철 넘쳐흐른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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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생들이 그렇듯 김춘수의 '꽃'은 학창시절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였다. 이육사의 '광야'와 '절정', 김수영의 '풀', 조지훈의 '낙화', 유치환의 '바위' 등과 함께 줄줄 외우고 다녔으며, 내게 처음으로 인식론을 가르쳐준 바로 그 시.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연애를 할 때 꽤 자주 이 시를, 특히 1연과 2연을 인용하곤 했다. 여자 친구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데 있어서, 이 시구만큼 효과적인 구절도 없기 때문이었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니 얼마나 로맨틱한가. 게다가 정규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최소한 들어는 봤을 김춘수의 '꽃' 아니던가.

그러나 영원히 암기할 것 같았던 이 시도 시간이 지나자 어렴풋해져 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상에 찌들어 살다 보니 그 주옥 같은 구절 역시 가물가물해진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시를 읊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내는 가끔 함께 TV 드라마를 보다가 알콩달콩 연애하는 연인들만 보면, 우린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냐며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는데 김춘수의 '꽃'을 읽는 내 심정이 딱 그와 같았다. 김춘수의 '꽃'은 이제 지나간 과거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던 것이다.

'아빠'를 외침과 동시에 달라보이는 딸
▲ 날로 예뻐지는 딸 '아빠'를 외침과 동시에 달라보이는 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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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9월, 난 문뜩 김춘수의 '꽃'을 떠올리고 말았다. 처음 그 시를 접했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 그대로.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그 호명으로 난 그의 꽃이 되었다. '아빠'. 20개월 된 딸아이가 드디어 처음으로 '아빠'를 외친 것이다.

"아빠!!!"

김춘수 '꽃'의 부활... 그리고 딸바보의 탄생

살가운 부녀
▲ 부녀 살가운 부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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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듯하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까꿍이의 '아빠'. 물론 '아빠' 발음을 시작한 뒤로는 까꿍이가 뭘 해도 계속 '아빠, 아빠'를 외치는 바람에, 이제는 아빠를 그만 부르라며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딸자식의 '아빠' 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처음 까꿍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지금이야 네 자식이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보는 거지만, 나중에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아빠를 알아보고, 아빠를 부르기 시작하면, 그때는 진짜 요 녀석이 내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단다. 본능적으로 자기 자식 챙기는 여자들과 남자들은 좀 다를 수밖에."

진실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시큰둥하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건만, 막상 까꿍이가 '아빠'를 발음하고 나니 아버지의 말씀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다. 내가 '아빠' 한 마디에 이렇게 변하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내가 그동안 녀석을 의무감으로 사랑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딸
▲ 딸바보 우리 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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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밭의 부녀
▲ 하늘공원에서 억새밭의 부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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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해서 현관문을 열어젖히면 당장 '아빠'를 외치며 달려와 안기고, 회사에서 아내에게 전화하면 옆에서 "아빠? 아빠?"를 연신 물어대는 까꿍이. 어찌 그런 녀석이 예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소 아빠를 옆집 아저씨 보듯 멀뚱멀뚱 쳐다보던 아이가 이제 좀 컸다고 '아빠'를 연호하는데.

선배들이 이야기하기를 하루라도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고 하더니 이제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하더라도 선배들이 유난 떤다고 생각했으나, 이젠 바로 내가 퇴근 후 아빠 목을 감싸며 뽀뽀해주는 까꿍이의 조막만한 손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내는 늙어서까지 내 곁을 지킬 사람은 결국 자신이라며 딸에 대한 관심의 반이라도 자신에게 쏟으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어쩌겠는가. '아빠, 아빠'하며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녀석이 예뻐 죽겠는걸.

까꿍아, 이게 단풍이란다
▲ 가을 단풍 까꿍아, 이게 단풍이란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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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이에 대한 나의 사랑. 그것은 결국 딸바보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끼는 첫째 딸의 귀여움. 괜히 사람들이 첫째 딸, 둘째 아들을 100점 만점의 200점이라 하겠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아빠들은 첫째 딸 애교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만 보면 '뿌잉뿌잉'을 따라하고, 짱구의 '울라울라 춤'을 추는 딸자식의 애교에 어느 아빠가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이게 뭐야?"로 의사표현을 시작한 까꿍이

케이크를 맛 본 뒤 외치는 아이
▲ 이게 뭐야 케이크를 맛 본 뒤 외치는 아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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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월 만에 '아빠'를 부른 까꿍이의 언어능력은 그 뒤로 꾸준하게 늘어갔다. 그 전에는 엄마, 맘마, 아냐, 네 등 ㄴ, ㄹ, ㅁ, ㅇ으로 이루어진 단어들만 툭툭 내뱉더니 아빠를 발음한 이후에는 아이스크림, 뽀로로, 사탕, 싫어 등 자신에게 필요한, 꽤 많은 단어들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든 단어들을 분명하게 발음하지는 못했지만 까꿍이는 최소한 앞 글자만이라도 발음함으로써 아빠와 엄마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어차피 언어란 것이 본질적으로 의사소통의 도구임을 감안한다면 녀석은 충분한 언어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녀석의 언어 중 아내와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까꿍이가 17개월쯤 처음 구사한 문장이었다. 누가 특별히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아내와 내가 자주 쓰는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아빠도 발음 못하던 녀석은 다음의 문장을 처음으로 또박또박 구사했다.

"이게 뭐야?"

주머니를 못 찾은 건가?
▲ 어린이 같은 까꿍이 주머니를 못 찾은 건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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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이는 이 문장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뽀로로를 보고 싶으면 뽀로로를 가리키며 이게 뭐냐고 물었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매트의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이게 뭐냐고 물었으며, 똥이나 오줌을 싸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이게 뭐냐고 물었다. 요즘에는 "이게 뭐지?", "이게 뭐예요?" 등 어미를 바꿔가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내고 있는 까꿍이.

문제는 까꿍이의 언어능력이 그 이상 눈에 띄게 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빠를 외친 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발음함으로써 양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는 있으나, 주위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녀석의 어휘능력은 분명 높은 편이 아니었다.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언어 구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러나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아내와 나는 그런 까꿍이를 특별한 조기교육 없이 지켜볼 생각이다. 언어능력의 발달이란 것이 어차피 사람 따라 그 속도에 차이가 있을 터, 지금까지는 그냥 두고 봐도 크게 상관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의 경험이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난 만 3살, 즉 5살 때까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위에선 어머니 등 뒤로 아이에게 뭔가 문제 있는 거 아이냐며 수군거렸다고 하는데 결국 5살이 지나 난 말문을 텄고, 그때 말을 많이 못해서인지 오히려 말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지금까지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 나의 하지 못한 말들을 풀어내고 있지 않은가. 까꿍이 역시 나의 딸이라면 말을 조금 늦게 하는 대신, 많이 하겠지.

아빠 나랑 같이 가
▲ 아빠 손가락을 붙잡고 아빠 나랑 같이 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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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노는 건 너무 신나요
▲ 그네 타기 아빠랑 노는 건 너무 신나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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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로써,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수준만큼 발달한다. 따라서 까꿍이의 욕구가 좀 더 정교해진다면, 그 욕구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언어능력이 정교해질 것이다. 그리고 정교해진 언어능력을 가지고 다시 좀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사고와 욕구를 만들어내겠지. 첫째의 경우 그 욕구의 생성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을 뿐.

"까꿍아. 늦어도 괜찮아. 스트레스받지 말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렴. 아빠도 조급해하지 않을게."


태그:#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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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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