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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이 도로를 바라보며 삐진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친구는 이 도로를 바라보며 삐진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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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뭘 그리 잔뜩 사가지고 가?"

돌아보니 친구가 혼자서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나무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가워합니다. 노래 좋아하고 웃음이 많은 친구입니다. 나는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친구 옆으로 앉았습니다.

"영감님은 어디 갔길래 혼자 앉아 있어?"
"며칠 전에 시골 큰댁에 김장배추 가지러 갔어. 전화 해 보니까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네."
"마중 나왔구나"
"여느 때 같음 마중 안 나오지. 해마다 아침에 가면 저녁에 배추를 싣고 돌아오고는 했는데, 글쎄 삐져서 가더니만 나흘 만에 돌아오지 뭐야."

나는 웃음이 났습니다. 친구의 남편은 눈빛이며 말씨가 따듯하고 털털한 사람입니다. 그런 어르신이 아이처럼 삐질 적도 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삐지셨는데?"
"글세 '나가수'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지 뭐야."
"그게 뭐 어때서?"

노래에 감동을 받으면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TV를 보면 <나는 가수다> 청중평가단들 중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나가수 보다가 딱 한 번 울컥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났었습니다. 인순이가 <그 겨울의 찻집>을 부를 때입니다. 가사도 노래도 사무치게 슬펐습니다. 감성이 짙은 호소력이 가슴을 아프게 때렸습니다. 나는 무대에서 인순이가 사라진 뒤에야 눈매가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나란히 앉아서 '나가수'를 보던 남편은 프로가 끝나자마자 말없이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내 눈매가 젖어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다 해도 피식 웃고는 말았을 것입니다.

"무슨 노래에서 눈물이 났는데?"

그러자 친구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합니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그 노래를 듣자마자 대학시절 남자친구가 떠올랐지 뭐야.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주 또렷하게 떠오르지 뭐야. 그때 내가 철이 없어서 그 친구를 뻥 찼다구."
"저런!"
"근데 이상도 하지. 그날 <그 겨울의 찻집> 노래가 끝나구 나니까, 아주 속이 시원해지는 거야. 비로소 정리가 된 기분이 들면서 말야."

친구는 나처럼 순수하게 노래가 슬프고, 감동을 받아 눈물이 났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노래를 듣다가 눈물이 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하나 뿐인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하자 남편과 같이 둘이서 노년을 예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어디를 가더라도 잉꼬가 부럽다고 할 정도로 언제나 나란히 같이 다녔습니다. 성당에 갈 때도, 장을 볼 때도, 놀이마당에 갈 때도, 은행 자동수납기에 공과금을 납부하러 갈 때도, 그들 부부는 붙어 다닙니다. 그런 사랑스럽고 예쁜 노부부의 사이를 호소력이 짙은 슬픈 노래가 나흘씩이나 갈라놓았습니다.

"나흘 동안 집이 텅 빈 것 같았겠네. 그동안 혼자서 뭐했어?"
"영감이 좋아하는 밑반찬들 만들었지. 참 퍼머도 했다구."

이제 보니까 친구의 머리 모양새가 달라졌습니다. 퍼머도 새로 했고 염색도 다시 했습니다. 평소에 립밤만 바르던 입술에 아주 엷게 립스틱도 발랐습니다. 원래 윤곽이 뚜렷한데다가 단장까지 해서 그런지 아름답습니다. 칠순의 나이가 무색합니다.

일부러 장을 봐다가 남편이 좋아하는 밑반찬들을 만들어 놓고 머리와 얼굴 단장까지 하고 남편 마중을 나온 것을 보면 친구는 <그 겨울에 찻집>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 물론 자기도 모르게 흐른 눈물이지만 어지간히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남편이 그 사랑스럽고 고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단풍도 보고 삐진 남편도 기다렸던 자리.
 단풍도 보고 삐진 남편도 기다렸던 자리.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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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근데 왜 이리 늦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벌떡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노란 은행나무 밑으로 가서 저 멀리 아파트 정문 쪽 도로를 바라봅니다. 바람에 날리는 노란 은행나무 잎잎들 때문일까.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는 그 모습이 <그 겨울의 찻집> 노래 못지않게 애절해 보입니다.

친구는 "차가 막히나 보네" 하더니 나를 돌아보고 웃습니다. 나는 장바구니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친구에게 등을 보이고 걸어가다가 돌아보았습니다. 친구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 표정이 아주 밝았습니다. 아마도 남편의 승용차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나 봅니다.

그 슬픈 노래가 나흘 동안이나 노 부부 사이를 갈라놓더니 이번에는 전보다 더 정겨운 부부로 만들어 주었나 봅니다. 친구의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입니다.


태그:#나가수, #삐진 남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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