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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를 잡을 때, 선원들은 배에 가득 화려한 등을 밝힌다. 이것이 바로 집어등이다.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오징어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마련된 치명적인 유혹의 장치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오징어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 겉표지
 <철학이 필요한 시간> 겉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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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성적이 최악이라며 좌절하던 아이가 고민하다가 철학과를 선택했다. 입학 커트라인이 낮으니까 합격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수능 보기 직전까지 그 아이가 원했던 전공은 상경계열이었다.

하지만 수능시험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1년 내내 보았던 모의고사 성적을 통틀어도 수능처럼 낮은 등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물 수능'이라 점수는 올라갔지만 상대적 위치가 떨어졌다. 대한민국 수능시험은 전체 수험생을 한 줄로 세우는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철학과를 선택했다고 철학을 전공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입학해서 복수전공이나 편입 등을 이용해서 원하는 상경계열 학과로 갈아 탈 생각이었다. 취업에도 돈벌이에도 유리한 상경계열학과에는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고, 그렇지 못한 철학과 등의 인문학 계열 학과는 소위 인기학과에 닿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는 현실을 이 아이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라는 역할을 포기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수시·정시 전형료에 엄청난 등록금 받아 축적하고, 돈벌이 될 만한 곳만 골라 투자한다. 돈이 된다는 점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인문학 계열 학과가 좋은 대접 받기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인문학 계열 학과에 지원자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돈이 될 일에만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이 집어등의 유혹으로 배 주변에 몰려드는 오징어와 다를 게 뭘까. 오징어는 어부에 잡혀 횟감이 되고,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돈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자본의 포로가 돼 끝없는 경쟁에 말려들고 인간성조차 상실한다.

돈 되는 일에만 매달리다 상처 입은 사람들, 경쟁의 논리에 매몰돼 다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것은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다친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줄 수 있는 '학문'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평생을 두고 매달렸던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이 어떻게 우리에게 필요한지 알려준다. 니체, 스피노자, 원효, 데리다 등 철학자들의 사상이 어떻게 우리들의 고민과 불안을 해소해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들이 보는 '나'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고, 타인과 맺은 삐뚤어진 관계들을 제대로 잡고, 나와 너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속 가능한 소통을 위해 48명의 철학자들의 편지를 펼쳐 보여준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우월의식 떨쳐버리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도 벗고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도 다른 생명체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집어등 향해 몰려드는 오징어나 자본의 유혹에 속절없이 빠져드는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  

돈벌이에 도움은 안 되지만 철학은 꼭 필요한 학문이다. 사람이 오징어와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알려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씀|사계절|2011.9|1만7800원)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사계절(2011)


태그:#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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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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