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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기획자 송경동 시인(오른쪽)이 부산 영도경찰서에 자진출두하기 위해 15일 오후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직실장과 함께 부산에 내려왔다.
 희망버스 기획자 송경동 시인(오른쪽)이 부산 영도경찰서에 자진출두하기 위해 15일 오후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직실장과 함께 부산에 내려왔다.
ⓒ 유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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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고 한다.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다섯 가지쯤 되는데,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나는 법원과 검찰에서 무엇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또 법을 존중하고, 법의 양심과 이성을 믿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 '막연히'만큼 막막하고 허망한 것도 없다. 대한민국의 법이 법의 양심과 이성을 스스로 저버린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약소자가 목소리를 내어야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시위라는 형태로 이어질 때 여기에는 참혹한 면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은 시트콤이나 공익성 캠페인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립되는 물리적 폭력이 있고, 욕설과 비명이 있고,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가 있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잃는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시위를 한다는 것은 얼마만큼은 무법과 불법의 세계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 법이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떻게 될까? 누구든 무법과 불법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송경동 시인도 죄목이 다섯 가지나 된다. 특수공무집행방해, 일반교육방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공동건조물 침입,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 그것이다.

나는 가끔 경찰에서 검찰에서, 또 정치권에서 이런저런 미디어를 통해 어떤 시위를 불법적인 시위라고 규정하고 '법을 통한 원칙적인 대응'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내가 아는 법의 원칙이란 법이 강자보다는 약자를 보호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인데, 실제적으로는 '기계적인 법 적용'을 뜻하는 바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은 결국 너희들이 왜 법까지 어겨가며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법을 어기는 것인 줄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하는지 관심두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때의 명분이라는 것도 시민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약소자의 일부인 너희는 구속되고 처벌받고 진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인 대응'? 도대체 무엇이 원칙인가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 기획단 송경동 시인(앞줄 가운데)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앞에서 경찰조사에 대한 자진출석에 앞서 '희망의 버스 계획과 경찰수사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희망의 버스가 앞으로 멈추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버스의 기획자들이 되어달라"며 호소하고 있다.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 기획단 송경동 시인(앞줄 가운데)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앞에서 경찰조사에 대한 자진출석에 앞서 '희망의 버스 계획과 경찰수사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희망의 버스가 앞으로 멈추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버스의 기획자들이 되어달라"며 호소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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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대추리가 그랬다. 명분은 국익이었고, 외부세력 개입에 의한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미군기지의 빠른 이전을 위해 정부가 계산하고 주는 대로 돈 받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때에도 높은 분들께서는 '원칙적인 대응'을 들먹였다. 대추리 주민들은 몇 년을 싸우고 나서야 정부의 일방적인 행정 집행의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기륭은 어떠한가? 이것 역시 명분은 사회질서 유지였고, 역시 외부세력의 개입에 의한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인 대응'이 또 이야기되었다. 이 원칙 속에서는 초기에는 노동법에서 제시한 기준보다 10원을 더 주어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 교묘한 월급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 식의 일방적인 해고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 해고의 사유가 불분명확하거나 업무 시간에 잡담이 많고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비인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특수공무집행방해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공동건조물 침입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송경동 시인의 죄목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기륭의 여성 노동자들은 몇 년을 싸우고 나서야 진정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용산은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이때에도 '원칙적인 대응'이 이야기되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안전을 유지하고 불편을 해소하며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타협 없는 강경대응과 진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6명이 죽었다. 이 명분 어디에도 영세한 자영 상가들을 별다른 보상도 없이 내몰고 십수조의 돈으로 개발이익을 꾀한다는 자본의 논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6명이 죽고 나서야 여론이 들끓고, 여론이 들끓자 슬그머니 강경대응과 진압을 뒤로 무르고 유족과의 타협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법적용과 법집행의 한편으로는, 시위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예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시기가 끝나고, 정치적 민주화가 다소간 달성되면서 과격한 시위는 그 명분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탈냉전과 함께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이에 따라 속물주의가 팽배하면서 시위도 이익집단적 성격을 띠게 되고, 자본에 저항하는 시위 역시도 그런 부류의 시위로 오해받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적 세력이든 보수적 세력이든 시위의 주체들은 내외적으로 시위의 방식과 시기, 그 윤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저기 반성의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사회적 약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요원한 담론일 수밖에 없다. 자본의 차별과 배제의 논리에 몰려 자신의 생계와 가정이 위급한 상황에서, 그리고 세상이 여러 한계로 인해 그것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절박한 행동은 극렬함을 띨 수밖에 없다.

혹자는 2011년에 1980년대 방식을 고수한다고 환멸을 표명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들이 2011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11년은 물리적인 기준치일 뿐이지 삶의 양태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의 어떤 사람들은 이제 막 1980년대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심화 속에서 1980년대의 방식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을 수도 있다. 대추리, 기륭, 용산, 그리고 한진중공업, 이랜드, KTX 여승무원, 두리반 등 그 누가 자신의 감각과 목소리를 1980년대 방식으로 되돌리고 싶었겠는가.

내가 아는 한, 많은 시인들과 소설가, 더 나아가 지식인들이 그런 그들과 뜻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송경동 시인만큼 그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동고동락을 하며 함께 투쟁을 꾸려온 이는 많지 않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어쩌면 이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이 버린 이들과 함께 살아온 '유일한' 시인

309일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10일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이 희망버스 관계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309일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10일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이 희망버스 관계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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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영웅시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시인이나 소설가,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그도 그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나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11년에 1980년대 저항정신의 늦둥이로서 여전히 자본이 점령한 근대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근대를, 그리고 그 안의 대한민국을 꿈꾸며, 김남주 시인을 좋아하고, 자신은 어떤 당에도 시민단체에도 속해 있지 않고 오직 저 들판과 강에 속해 있노라고 말하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는 분명 문단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이다. 나는 그가 없다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법과 법 관료체계, 법의 역사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함부로 법의 정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또한 지난 날 한국의 광기와 폭력의 역사를, 또 현실적으로는 이런 저런 당파성과 이익집단의 자기 편의적 기준을 고려할 때 '기계적인 법률'의 미덕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송경동 시인을 법의 이름으로 구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더 심각하게 접근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듯이, 시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좋은 시가 반드시 문법이 철저한 시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 좋은 시인의 세계관은 언어에 대해 더 강력하거나 역동적인, 혹은 더 부드럽거나 비애스러운 감정을 투영할 수밖에 없고, 그 순간 언어는 문법이 규정한 논리와 질서의 틀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때로 좋은 시들은 그렇게 문법의 배려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꽃피운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가 언젠가 감명 깊게 본 <필라델피아>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톰 행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법을 사랑합니다. 법의 많은 면을 좋아하는데, 제가 법에 있어 가장 좋아하는 면은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법이 정의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정말이지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이재웅님은 한국작가회의에서 활동하는 소설가입니다.



태그:#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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