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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친구가 하소연을 한다. 엄청 명망 있다는 출판대상 공모가 내일까지인데 마감 전날 오후 4시에 어떤 기자가 전화해서 마감을 알려줬다며 그 '애매한' 친절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한다. 출판대상에 공모하기 위해 그 친구는 그날 늦게까지 야근을 했을 거다.

출판대상에 선정만 된다면 수당 안 나오는 야근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게 출판 관련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생각일 거다. 출판대상이 아니라도, 어디 상을 받거나, 선정도서가 된다면, 쉽게 말해 책 표지에 떡하니 금박 표딱지 하나만 붙일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나.

출판사 직원들이 이렇듯 공모전이나 우수도서 선정에 목맨다는 건, 꼭 책을 많이 팔아먹겠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몇날 며칠을 고생고생해서 제목 짓고, 단어 하나를 붙잡고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몇 시간을 고민고민해서 문장 다듬고, 인쇄되어 나오는 날까지 무슨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중요한 문장에서 오타를 못 본 건 아닌지 마음 졸이며 만든 책이 나오자마자 무관심 속에서 사장되어버리는 걸 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더 크다.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져나오는 책들을 보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 거다. 토요일마다 일간지 책 소개에 아주 작게라도 우리 책이 소개되면 마치 베스트셀러 자리라도 예약한 듯 기쁘고, 어떤 파워블로거가 우리 책을 언급해주면 남들이 안 알아주던 품 안의 자식이 대기만성 한 듯. 세상에서 인정받은 양 기쁠진대,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에서 우리 책 가치를 알아주고 널리 홍보해준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겠나.

2008년에 이어 19종이 추가된 '국방부 불온도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2008년 국방부 불온서적 선정 보도 직후 '2008 국방부 지정 불온서적 23권 공개'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2008년 국방부 불온서적 선정 보도 직후 '2008 국방부 지정 불온서적 23권 공개'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 인터넷 서점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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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해마다 국가예산을 30조 원가량 쓰는 거대 국가기관에서 나름 도서목록을 선정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름하여 국방부 불온도서 목록. 지난 8월 공군 한 전투비행단에서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절한 서적반입 차단대책'이라는 제목으로 발송된 공문에 '불온서적 리스트'가 딸려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2008년에 선정된 책 23종에, 올해 추가된 책 19종을 더해 모두 42종의 책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관련기사 : <군 '불온서적 리스트'... 19권 더 늘었다>).

사실 2008년 국방부가 불온도서 목록을 발표했을 때 이 목록이 계속 업데이트 되지 않고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거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 당시 작가들 사이에선 "축에도 못 끼는 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어느 술자리에서 들었다. 풀어 말하자면, 우리 사회 잘못된 면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작가들이 여럿 있는데, 국방부에서 불온도서 목록을 발표하면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작가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예를 들자면, 우리 시대 대표적인 논객인 진중권, 국가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 박노자 같은 작가들이 '축에도 못 끼는 작가'가 되어 버린 거다. 당사자들로선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을 거다. 헌데 이 두 분은 이번에도 축에도 못 꼈다. 국방부에 뭔가 심하게 찍혀 있나 보다.

지난 7월 28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본사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에서 진중권씨가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 7월 28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본사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에서 진중권씨가 강의를 하고 있다.
ⓒ 최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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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추가된 목록을 보니 관심을 끄는 책이 좀 있다. <낯선 식민지 한미 FTA>(메이데이)가 포함된 것을 보니 국방부의 발 빠른 현실인식을 칭찬하고 싶다.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한미 FTA에 대해서 국민들이 혹시나 관심 없을까 봐 다시 한번 환기시켜주는 센스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사랑이 뭐길래 정치가 뭐길래>는 대체 어떤 책이기에 조선일보사에서 나왔음에도 불온도서 목록에 올랐는지 궁금하고, <6·25전쟁과 북한의 만행>은 제목만 봤을 때는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 같은데 왜 불온도서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책을 안 읽어봤으니 알 도리가 없지만, 읽어봤더라도 알 도리는 없을 거 같다. <달려라 냇물아>(녹색평론사)는 4대강마저 흐르지 못하는 세상에서 냇물보고 달리라고 했으니 불온도서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얼마나 더 '불온'해야 국방부 눈에 들 수 있을까

<나는 공산주의자다>(허영철 씀, 보리 펴냄, 2010년)
 <나는 공산주의자다>(허영철 씀, 보리 펴냄, 2010년)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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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출판계 종사자가 국방부 불온도서 목록 선정에 대해 기준을 문제 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다 국방부가 더 이상 불온도서 목록을 발표하지 않는다면 출판계만 손해 보기 떄문이다. 그래서 나는 국방부의 불온도서 목록 선정 기준이 다소 납득이 안 가더라도 이걸 문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도 조금 서운하고 아쉬운 건 말하고 싶다. 내가 제작에 참여한 책 가운데 불온도서에 충분히 들 수 있는 책이 여러 권 있는데 모두 누락된 거 같아서, 나도 '축에도 못 끼는' 편집자가 될까봐 여기 적으니, 국방부 관계자는 3차 목록을 선정할 때 꼭 참고해주길 바란다. <내가 살던 용산>(보리),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보리) 같은 책들도 불온도서에 오를 자격이 충분히 있지만 아쉽게 탈락한 책이 한두 권이 아닐 테니 그냥 넘어가고 딱 한 권만 이야기 하겠다.

바로 <나는 공산주의자다>(보리)라는 만화책이다. 이 책은 2008년 국방부 불온도서에 오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수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보리)를 만화로 다시 그린 책이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같은 내용인데 만화로 표현한 것만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면 좀 일관성이 없지 않나 싶다.

우리 회사 책만 홍보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국방부 불온도서 목록에 선정됐으면 하는 책 몇 권을 더 소개하겠다. 병역거부자들이 쓴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철수와영희)과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그린비)는 반드시 불온도서가 되어야 한다. 군대 안 가겠다는 병역거부자들 이야기인데, 다른 곳도 아닌 국방부가 이 책들을 놓친 건 좀 큰 실수가 아닌가 싶다.

노벨상 수상작이 훌륭한 작품인 건 사실이겠지만, 노벨상을 받지 않은 작품 가운데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작품이 수두룩벅적하다. 국방부 불온도서도 마찬가지일 테니, 눈 밝은 독자들은 국방부 목록에 오른 책들만 관심 가질 게 아니라 목록에 오르지 못했지만 깨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을 찾아서 보시라. 독서문화 확산보다 내 밥벌이를 더 걱정하는 출판 노동자의 간곡한 부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용석 기자는 보리 출판사 편집자입니다.



태그:#국방부 , #불온도서, #병역거부,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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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게 되고, 평화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출판노동자를 거쳐 다시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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