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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됐네."

4년 전 내가 대학에 합격한 날, 멀리 사는 사촌 누나의 매형이 전화로 축하인사를 건네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매형 말로는 그 말씨가 하도 담담해서 내가 대학에 합격한 것이 아니라 무슨 사고라도 친 것처럼 들렸다고도 했다. 서울내기인 매형이 보기엔 누구라도 기뻐해야 할 일 앞에서 별다른 내색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다.

하지만 굳이 지역을 내세우지 않아도,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이는 우리나라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란 일 열심히 하고,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며,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가족을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이 강한 '가장'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쓸쓸한 뒷모습'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비슷비슷하다.

오히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다. 객지에서 생활하는 두 아들들에게 전화도 꽤 자주 하고, 내려가면 뭐 먹고 싶냐고 먼저 챙기기도 하고, 근황을 여쭈면 이런저런 얘기도 곧잘 들려주는 그런 아버지이다. 가족들에게 특별히 살가운 모습을 보인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거나, 하루 일과를 꼬치꼬치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머니 무릎에 얼굴 묻고 울던 아버지... "어디고? 니 얘기 좀 했다"

'세대간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 지난 여름 한 해수욕장에서 나와 아버지.
 '세대간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 지난 여름 한 해수욕장에서 나와 아버지.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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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몇 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문을 들추어보기 시작한 어느 때부턴가 아버지라는 존재가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 화를 낼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어렵게만 느껴지던 아버지도 그냥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단 우리 아버지에게서만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서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해 온 남성들에 대한 묘한 호기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고 할까.

이를테면 명절 때마다, 차례와 성묘를 치르고 난 '아버지들'이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거나 거실에서 조용히 티브이를 보는 모습을 보며 '수컷들은 다 저런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틀에 박힌 성역할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어머니들' 한켠으로, 잠시나마 찾아온 1년 중의 여유를 그렇게 조용히 만끽하는 지친 수컷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약간 신비스러운 구석도 있다. 설이나 추석 당일 저물녘에 그늘진 방에서 고요히 누워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해가 갈수록 어떤 무게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도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무게'를 느끼게끔 하는 사건이 있다. 내가 다섯 살이던 어느 밤, 어디선가 몹시도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보았더니 아버지가 어머니 무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엉엉 울고 있었다. 정확히 어머니 무르팍에 아버지가 얼굴을 묻고 있었는지 혹은 마루에 혼자 엎어져 울고 있는 것을 어머니가 옆에서 달랬던 것인지, 혼동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정황상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있는 아버지는 지역 출신으로 전교조 지회를 만들어 활동했었다. 탈퇴하지 않으면 해고되는 상황에서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해직되지 않은 채 학교에 남았다. 술에 취한 채 눈물을 흘린 그 밤에도 아마 아버지는 해직교사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연고도 없는 젊은이들이 자기 고향에서 해직 교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학교에서 지켜보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답답함과 미안함으로 얼룩진 가슴이 그렇게 술김에 터져 나온 것이, 어린 내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술을 먹으면 사람의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술 먹고 실수하는 숱한 경우를 일러 '진심'이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근데 아버지의 경우에는 그 말이 어느 정도 맞을 때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의 그 사건도, 평소에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자기 자신을 놓아버린 드문 경우였기 때문에 뇌리에 남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아버지는 술김에 전화를 걸어 평소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아들에 대한 불만이나 기대를 드러내곤 한다.

"지금 어디고? 술 한 잔 했다. 사람들 만나서 니 얘기 좀 했다."

술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으시지만, 대충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자랑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형한테 전화를 걸어서 내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형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가 너한테는 여러 가지로 맘에 안 드는 게 많은데, 나는 장가 안 간 것만 빼고 다 괜찮다고 하시더라. 킥킥."

정작 아버지는 기억을 못한다고 하시니, 그걸 통해서 자식들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들의 미래'라는 아버지...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될까

아버지와 나. 지난 겨울 등대가 바라보이는 고향 바다 근처에서.
 아버지와 나. 지난 겨울 등대가 바라보이는 고향 바다 근처에서.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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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철이 들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그 자리에 위치시켜보기도 한다. 누군가의 아들은 시간이 흐르면 대개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법이니까, 아버지는 그 자체로 아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 자체로 뒤따라오는 이에게 본보기로 남는다면? 아들에게 아버지가 그런 존재라면, 아버지가 평소에 별다른 감정적 내색을 하지 않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무디고 무뚝뚝해서 그럴 것이라는 내 생각이 어느 정도는 오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내가 아버지라면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좀 더 자주 표현할 텐데, 바라는 것이 있다면 좀 더 솔직하게 자식들에게 이야기할 텐데, 일상에서 겪는 개인적인 즐거움과 어려움을 더 자주 나눌 텐데 하는 것들 말이다. 진정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이라면 아버지에게 느끼는 아쉬움을 먼저 채워주면 되겠지. 어머니를 향한 고마움을 내가 먼저 전하고, 내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면 내 생각을 먼저 이야기하고, 별다른 일은 없는지 먼저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는 아들이 된다면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십 년 넘게 보아오면서 배운 게 있으니 나도 마음처럼 행동이 쉽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대가 바뀌고 세대도 달라졌으니 변한만큼 먼저 다가가는 젊은이의 특권을 충분히 활용해야 겠다는, 불필요한 다짐을 해본다. 다짐해서 될 것 같으면 벌써 하고도 남았을 테니 공수표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가 아니었던가.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먼저 다가서는 일을 시도해야 할 책무가 막중함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 내가 아버지 이야기를 글에 담는 것이 꼭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고? 이 글을 읽으실 수도 있는 어머니 섭섭해 하지 마시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중에 어머니 특집하면, 그때는 어머니 이야기로 또 한 번.


태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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