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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햇살은 따스하지만 아침 저녁 출퇴근길,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숨을 쉬면 하얀 입김이 나온다. 차가운 바람이 몇 번 불더니 고운 단풍도 아름다운 벽화같던 담쟁이 잎들도 어느 새 보이질 않는다. 달마다 따로 개성있는 이름을 붙인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달랑 숫자만을 붙여놔 나같은 사람에게 매월 그 달의 이름을 지어보게 한다.

내게 요즘의 11월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달'로 명명할만큼 하루가 다르게 늦가을의 풍경이 겨울의 것으로 바뀌어 간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가리켜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이라고 했단다. 그 옛날 아메리카 땅에서도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오면서 느껴지는 우울함과 스산함은 마찬가지였나보다.  

비도 몇 번 내리고 이젠 정말 마지막 가을이겠구나 싶던 지난 주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고운 모래밭과 백사장이 아름답다는 국내에 하나뿐인 모래강 내성천을 향해 나섰다. 내성천에서 가까운 마을을 찾던 중 눈에 띄는 곳이 유명한 회룡포가 가까운 경북 예천의 용궁면. 기차가 서는 용궁역도 있는 마을인데 기차가 하루 두번 서는 간이역이라 시간이 안 맞아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첫차에 애마 자전거를 싣고 '용궁'을 찾아가 보았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은 '용'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은 '용'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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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품고 사는 마을, 용궁면 

두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용궁면은 작은 마트 가게가 버스 터미널을 겸하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서울 떡집'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쐬니 배가 고파온다. 자전거 여행을 하려면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야 하기에 찾아간 '용궁시장'엔 다행히 이른 아침에도 순대국밥을 파는 가게가 있다. 뜨끈한 순대국밥에 몸도 마음도 훈훈해져 자전거로 마을을 돌아보다보니 동네가 온통 '용'천지다.

용궁면, 용궁 초·중학교, 용궁시장, 용궁역까지··· 혹시 마을을 홍보하려고 지자체에서 개명한 이름인가 했더니, 이래봬도 신라시대 때부터 (용궁현) 이어진 오래된 동네 이름이라고 면사무소에서 당직근무를 하는 분이 알려주신다. 기차가 하루에 두 번 선다는 한적한 간이역 용궁역은 역무원이 없는 무인 기차역이지만 앞발에 구슬을 쥐고 포효하는 용의 동상이 지키고 있어서 그런지 덜 적막하게 느껴진다.

 이제 겨울이 옴을 알리는 안개가 추수가 끝난 들녘을 감싸안은 사이로 회룡포를 향해 달려간다.
 이제 겨울이 옴을 알리는 안개가 추수가 끝난 들녘을 감싸안은 사이로 회룡포를 향해 달려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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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의 대표 자랑거리는 8km 정도 떨어져 있는 용이 휘돌아 가는 섬 마을 회룡포다. 잘보이도록 만든 큰 이정표를 따라 시래기가 빨래처럼 널린 농촌의 한가로운 마을길을 지나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추수가 끝나고 볏단들이 큰 바둑돌처럼 하얗게 포장돼 있는 농촌 마을 어디선가 볏짚을 태우는지 구수한 냄새가 난다. 도시에서 태어나 쭉 살아온 내몸 안에도 수천년간 이어진 농경민족의 유전자가 존재하고 있었나보다.

동네 마을길을 지나다 작은 버스 정류장에 할머니들이 앉아 있으면 왠지 말을 붙이고 싶어져 길을 모르는척 하곤 한다. 외지인이지만 반가워하는 할머니들의 반응이 정답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디 마실이라도 나가시는지 곱게 화장하고 버스를 기다리던 어떤 할머니는 자전거 타고 회룡포에 간다는 내 말에 혼자가냐고 '동무'랑 같이 안 왔냐고 하신다. 이젠 사어가 된 '동무'란 말을 오랜만에 들으니 어깨동무하고 등하교를 했던 어릴적 친구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육지속의 섬마을 회룡포에 건너가는 철판으로 만든 '뿅뿅다리'위에 서면 내성천의 맑은 물속 모래알이 다 보인다.
 육지속의 섬마을 회룡포에 건너가는 철판으로 만든 '뿅뿅다리'위에 서면 내성천의 맑은 물속 모래알이 다 보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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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고 아름다운 그래서 더 안타까운 모래강, 내성천

정말 큰 용이 마을을 휘감고 도는 것 같은 회룡포 마을 안내판이 보이자 마자, 웬 넓고 고운 모래사장이 불쑥 나타난다. 바닷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래벌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내성천이 마을을 휘돌면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이런 곳을 '물돌이 마을'이라고 부르나보다. 모래밭을 지나 내성천을 건너서 회룡포 마을로 가기 위해 공사장 철판 같은 '뿅뿅다리' 위를 애마 자전거와 함께 조심조심 건너간다.

구멍이 뽕뽕 뚫린 '뿅뿅다리' 밑으로 내성천의 맑은 물이 모래알들과 함께 굴러가듯 흘러간다. 회룡포 마을은 이렇게 초입부터 이채롭고 독특한 곳이라 그런지 둔중한 카메라를 든 사진가들이 많이 보인다. 때마침 자전거와 함께 내성천 위 뿅뿅다리를 건너는 내 모습이 특이했는지 건너편 모래사장에 사진가들이 떼로 모여서 찰칵찰칵 연신 셔터를 누른다. 이건 뭐랄까 공항에서 막 내린 유명 스타가 된 기분이다. 애마 자전거 덕분에 주인이 호사를 다 누린다.       

 주렁주렁 매달린 예쁜 감들이 곶감이 되기 위해서는 한 달을 더 건조해야 한단다. 먹고 싶어서 기다리기 힘들겠다.
 주렁주렁 매달린 예쁜 감들이 곶감이 되기 위해서는 한 달을 더 건조해야 한단다. 먹고 싶어서 기다리기 힘들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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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열가구가 안되는 육지 속의 작은 섬 회룡포는 감나무가 많은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집 마당 곳곳에서 나이 지긋한 주민들이 잘익은 감을 깍아 예쁘게 매달고 있다. 한 번 먹어보라며 아저씨가 건네준 물렁물렁한 작은 감 하나를 게 눈 감추듯 한입에 먹었다. 아직 곶감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달수가! 아직 나무에 달려있는 감들의 주황빛 때깔이 어찌나 고운지 마치 작은 등이 되어 동네의 늦가을 정취를 밝혀주고 있는 듯하다.        

마을에서 마성리 방면으로 나오면서 두 번째 뿅뿅다리를 건너 내성천가의 농로를 따라 본격적으로 강변 라이딩을 즐긴다. 화강암이 수천만 년 풍화되어 부서진 고운 모래가 물을 따라 흐르며 만들어 놓은 넉넉한 모래톱이 끝없이 이어진다. 맨발로 들어가고픈 모랫벌 위에 해오라기 한 마리가 명상하듯 외발로 서있고, 갈대와 바람만이 들고 나는 쓸쓸한 풍경이 손흔드는 저 갈대처럼 자꾸만 내 마음을 흔든다. 늦가을 강변 여행만의 매력이지 싶다.

 늦가을 강변여행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모래강, 내성천. 사진속의 작은 농로길을 따라 길이 계속 이어져 있어 자전거 타고 가기 좋다.
 늦가을 강변여행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모래강, 내성천. 사진속의 작은 농로길을 따라 길이 계속 이어져 있어 자전거 타고 가기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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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담리 구담교에 도착하니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엔 한창 모래준설과 제방쌓기 공사를 하고 있다.
 구담리 구담교에 도착하니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엔 한창 모래준설과 제방쌓기 공사를 하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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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낙동강을 달려 안동 하회마을로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으로도 귀하다는 모래강인 내성천은 그러나 상류에서 건설중인 영주댐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내년에 완공예정인 댐으로 내성천가의 마을이 수몰돼 주민 500여가구가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 하고, 무엇보다 댐이 물을 가두어 인위적으로 그 흐름을 조절하니 자연히 내성천의 모래가 점점 사라지고 생태계는 악화될 것이다. 국내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댐들을 보아왔다. 이 작은 나라에 지어진 댐의 수만 1만8000개. 아직도 짓고 있는 전국의 많은 댐들을 보며 깨닫게 된 건 바로 '사업을 위한 사업'이라는 것.

이런 사정은 내성천을 지나 구담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물줄기인 낙동강에서도 마찬가지다. 낙동강변에 들어서는 구담교에 도착하자 굴착기들이 강을 파헤치고 모래를 퍼내느라 로보트처럼 움직이고 있다. 강변엔 아스팔트 자전거 길을 만들어 놓아 자전거로 달리기 편해졌지만, 모래를 퍼내고 쌓은 콘크리트 제방으로 강변 고유의 아름다움과 생태계는 사라지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한강처럼··· 이렇게 사람들은 자전거 도로를 얻고 강가의 정취와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강건너 층암절벽 부용대와 만송정 소나무숲이 한폭의 그림처럼 잘어울린다.
 강건너 층암절벽 부용대와 만송정 소나무숲이 한폭의 그림처럼 잘어울린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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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회마을은 오래된 고택들도 멋있지만, 모래밭 사이로 무심한 듯 흐르는 강물의 풍경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하회마을은 오래된 고택들도 멋있지만, 모래밭 사이로 무심한 듯 흐르는 강물의 풍경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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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둥글게 휘돌아 가는 또다른 '물돌이 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세계문화유산답게 외국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오고 있다. 큰 마을이라 자전거 타고 넉넉히 돌아보기 좋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편의 강변 모래밭 뚝방길을 따라 가다보면 '부용대'라는 멋진 층암절벽과 만송정 소나무숲이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처럼 나타난다. 그 옛날, 마을의 서원에서 학문을 닦았을 선비들처럼 시를 읊으며 공부하기 참 좋은 곳이다.

초가삼간과 까치밥 감이 남아있는 오래된 나무들, 멋진 한옥 고택이 어우려져 있는 하회마을이 박제된 민속촌과 다른 건 그 안에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다. 마을안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절과 교회도 있다. 배추와 무를 심은 밭에 앉아 아낙네들이 무를 뽑고 무청을 다듬고 있는 장면을 구경하다 알싸하고 단맛이 나는 무맛을 보기도 했다. 이맘때의 무는 인삼보다 낫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껍질째 우적우적 무를 씹어 먹었다.        

낙동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마을을 구석구석 한바퀴 돌다 보니 서서히 해가 지고 오늘의 여행도 끝나간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강가의 모래벌에 내려가 바람을 타고 노래를 부르는 듯하고, 춤을 추는 듯한 갈대숲 사이를 걸어본다. 마을의 한옥 민박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어여 와서 저녁밥 먹으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용궁버스터미널 (용궁역)에서 출발하여 회룡포 마을 - 내성천 농로길 - 구담리 구담교 - 낙동강 자전거도로 - 광덕교를 건너 하회마을에 도착
 용궁버스터미널 (용궁역)에서 출발하여 회룡포 마을 - 내성천 농로길 - 구담리 구담교 - 낙동강 자전거도로 - 광덕교를 건너 하회마을에 도착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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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하회마을 안에 민박집이 많으니 하룻밤 묵어가면 더욱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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