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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이 늦춰지고, 비행기 이착륙도 제한되고, 주요 학교 부근의 교통이 통제된다. 수능이 치러지는 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조치들이 이루어지는데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이루어야 할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이면 대학입시는 과히 '국가지대사'라 할 만하다.

이 국가지대사에 반기를 들고 나선 이들이 있다. 가방끈이 짧은 것이 아니라, 가방끈이 아예 없는 '투명가방끈 모임'이다. '투명가방끈 모임'의 풀네임은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이다.

'투명가방끈 모임'의 핵심 활동가들은 10여 명 내외로, 19살이지만 대학진학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거나, 대학에 진학했다가 중퇴한 20대들이다. 지난 1일 20대 대학입시거부선언을 시작으로, 10일까지 청계천 광장에서 릴레이 1인 시위가 진행중이다.

무엇이 이들을 '대학입시거부'로 이끌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대학입시를 거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학입시를 거부, 아니 대학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요구한다!

청계광장에서 1인 시위 중인 둠코(19) 씨. 둠코 씨는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청계광장에서 1인 시위 중인 둠코(19) 씨. 둠코 씨는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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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낮, 청계광장은 한산했다. 푸른 빛깔 소라탑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시위 중인 '둠코'(별명·19) 씨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팔이 아프지 않냐는 내 물음에 둠코씨는 "다른 릴레이 집회 시위 참가자들도 계속 해 온 일이고, 그리 무겁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했다.

"거부를 위한 거부가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거부를 위한 거부가 필요하다고 봐요. 대학입시제도가 큰 부작용을 낳고 있는 암세포라고 한다면, 이 암세포를 떼어내자고 해야지 다른 암세포를 넣자고 할 수는 없잖아요?"

둠코씨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학기 만에 자퇴를 했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엔 대학 갈 생각을 했지만" 입학하자마자 진행된 1박2일 동안의 신입생 수련회에서 본 고등학교, 그리고 입시는 둠코씨가 보기에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학 가야겠다고 맘 먹고 입학했던 고등학교는 최악이었어요. 입학식도 하기 전에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학생들 앉혀놓고는 대학 수시·정시 모집 대비해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얘기하고, 서울 주요대학 등급커트를 읊어주더라고요."

그러나 한편으로 대학입시거부를 하는 학생들이 낙오자 또는 단순한 학교부적응자로 비추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공부를 못했거나 날라리일 거다, 그것도 아니라면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저럴 거라는 시선이 있어요. 해보지도 않고 그냥 겁나서 도망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듣고. 하지만 입시라는 것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크잖아요."

적극적인 거부가 낫다고 생각한 둠코씨지만 한편으론 대학에 갈 준비를 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선택이 쉽지 않은 길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단다.

"영어공부하고 취직하고 돈을 벌어서 언제쯤 자기 집과 차를 갖고, 대학에 가려는 친구들은 다들 장기 플랜이 있어요. 저는 아무리 길게 생각해 봤자 25살까지밖에 계획을 세울 수 없어요. 알바를 하다가 알바를 하다가 알바를 하겠죠?(웃음). 단순히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조금 더 천천히 고민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청계광장 한복판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 지긋한 한 분이 대학입시를 거부한다는 내용이 적힌 손팻말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성화를 낸다.

"시험이 아니면 학생을 뭘로 평가해? 글을 배워 가지고 거기서 인격이 형성됐을 때 사람을 평가하는 거지. 현대사회에서 대학도 안 가고 거부한다, 말이 돼 그게?"

너무 완강하게 말하시는 그분 말씀에 둠코씨가 꺼내는 말들이 묻혀 버리고 만다. 삿대질을 하시던 어르신이 자리를 뜬 직후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시민들이 "힘내라"는 말을 건넨다. "저런 분들 덕에 홍보가 더 잘 된다"고 웃는 둠코씨의 얼굴이 환하다.

힘들고 바쁘더라도, 유쾌하게 그리고 즐겁게

대학입시거부선언을 알리는 포스터. 충정로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투명가방끈 모임 활동가들이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학입시거부선언을 알리는 포스터. 충정로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투명가방끈 모임 활동가들이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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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코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찾아간 곳은 충정로 어디쯤에 있는 5층짜리 빌딩 맨 꼭대기에 있는 사무실. 바로 '투명가방끈들'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이날 취재에 응한 '어쓰(별명·20)'님은 언론사에 취재요청서를 보내고 각종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 요청한 좌담회 형식이 아니라 미안하다"며, 늦은 점심으로 누군가가 사온 김밥과 만두를 권했다. 출출했지만 취재가 우선. 꾹 참고, '투명가방끈 모임'이 어떻게 출발했는지를 물었다.

"수능거부 기자회견, 거리행동은 몇 년 전부터 있었어요. 올해는 93년생들이 제안하고 조직을 해서 '투명가방끈 모임'을 꾸렸는데, 청소년 인권그룹에서 활동하던 친구들이 많고, SNS와 웹자보 홍보를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참여한 경우도 있습니다."

둠코씨에게 개인적으로 가해지는 주변의 시선에 대해 물어봤다면, 어쓰씨에게는 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투명가방끈 모임이 단순히 대학입시에 대한 '소극적 거부'가 아니라 '적극적인 요구 또는 요청으로서의 거부' 차원에서 구상하는 정책·요구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이다.

"내년 총선, 대선 때 올해 수능거부한 고3학생들이 선거권을 갖게 되는데, 이 모임에서 교육과 입시 정책관련해서 정책제안을 해 보자는 활동계획을 준비 중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사무실은 원래 '진보교육연구소'나 '학벌없는사회'의 활동공간인데 여기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내놓은 것들도 있고요."

투명가방끈 모임 소속 활동가들은 "우리가 대학을 그만둔 것은, 가지 않은 것은, 더 좋은 삶, 나중이 아닌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며, "대학을 거부한 것이지 배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아가 '대학입시거부선언 8대 요구안'을 통해, 우리 교육이 "다양한 답을 인정하는 교육, 체험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교육, 참여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교육"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교육예산 부족을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좋은 교육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으로 보았고, 교육예산 확대를 통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의 완전한 무상교육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궁극적으로 하는 고민은 '현실적으로 대학 가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최소한의 먹고 사는 걱정 없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을 것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사회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대학에 가지 않으면 사람 구실 못한다는 인식 때문에 더러 빚까지 내서 대학을 다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허덕여야 하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종의 청소년 당사자 운동인 셈이다.

투명가방끈 모임 활동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맨 왼쪽이 어쓰(20) 씨, 맨 오른쪽은 최근 '서울대 자퇴 선언'을 한 공현(24) 씨.
 투명가방끈 모임 활동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맨 왼쪽이 어쓰(20) 씨, 맨 오른쪽은 최근 '서울대 자퇴 선언'을 한 공현(24) 씨.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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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투명가방끈 모임'의 전망을 물었다.

"일단은 계속해 나가야 되는 거겠죠. 시작을 끊는 의미도 있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 힘받으면서 계속 요구해 나가면 조금이나마 바뀌지 않을까요?"

수능일인 오는 10일에는 19살 고3 청소년들의 대학입시거부선언 발표가 있을 예정이고 12일에는 '경쟁과 학벌만을 강요하는 교육과 사회를 바꾸는 거리행동'이 예정돼 있다. 세부 일정은 투명가방끈 모임 카페와 투명가방끈 모임 트위터(@wrongedu)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정현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대학입시거부, #투명가방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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