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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가 문화재청의 의뢰로 조사하고 문화재청이 발간한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 보고서> 겉그림(왼쪽)과 <더글라스맥아더장군상(부조포함)> 내용(오른쪽) 부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가 문화재청의 의뢰로 조사하고 문화재청이 발간한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 보고서> 겉그림(왼쪽)과 <더글라스맥아더장군상(부조포함)> 내용(오른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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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최근 개화기 이후 1960년까지 전국에 들어선 한국 근대 조각 가운데 주요 작품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맥아더 장군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갔더니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가 문화재청의 의뢰로 조사하고 문화재청이 발간한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 보고서>(이하 보고서)가 있었다. (☞ 관련사이트 : 문화재청)

보고서를 읽어보니, 39쪽 나. 세부목록·기념조각 항목에 <충무공이순신장군동상>, <성장을지문덕상>,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부조포함)> 등과 함께 6번으로 <더글라스맥아더장군상(부조포함)>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상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66∼69쪽에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이가 만든 동상

우선 동상을 만든 작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보고서 66쪽 작품 내역에 작가인 표천(瓢泉) 김경승(金景承: 1915~1992)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졸업,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창설위원,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등의 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보고서의 설명을 읽고서는 그냥 평범한 조각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조사를 조금 더 진행하자, 단박에 '친일파'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친일인명사전을 펼쳐보니 1권 233∼235쪽에 그의 기록이 있었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940년부터 <목동>, <어떤 감정>,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해마다 특선을 했다. 상의를 벗은 채 어깨에 망치를 걸고 서 있는 남자를 표현한 <여명>은 동아시아 건설주의를 웅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의 모습은 당시 전쟁용 물자 생산에 매진하던 일본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 무렵 일본의 전시회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는 것이다.

왼쪽에 보이는 작품이 제 21회 조선미전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여명>
▲ 1940년대 김경승의 작업실 왼쪽에 보이는 작품이 제 21회 조선미전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여명>
ⓒ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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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2년 6월 3일자 <매일신보>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외에도 여러 친일 행적이 소개되어 있었다. 해방 후, 이런 친일 행위들이 문제가 되어 미술가들이 만든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국전 창설위원이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중등미술교과서를 발간함으로써 해방 후 미술교육의 골격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안중근 의사 동상, 김구 선생 동상 등 여러 항일 인물들의 인물상을 제작했으며, 4·19 묘지의 여러 조형물도 제작했다.

맥아더 장군상을 제작한 이가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실려있는 이 표천 김경승이었다. 보고서에는 맥아더 장군상을 포함하여 김경승의 작품 15점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것들 모두가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설명도 없이 근대 문화재가 되는 것일까?

보고서의 68쪽에 있는 작품 설명에 의하면,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상>은 1957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해 이기붕, 변영태, 조병옥 등 각계대표 50여 명이 '맥아더 장군 동상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들이 성금을 내어 제작한, 1950년대의 대표적인 기념조각이라고 한다. 맥아더 장군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자유의 사도'로 전후 한국민들에게 높이 숭상됐는데, 이에 이 동상을 세워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상은 철거하자는 주장과 사수하자는 주장이 부딪히며, 2005년 보수와 진보 사이에 큰 충돌을 불러왔다. 이런 사실을 의식해서인지 보고서에서도 "1980년대 이후, 분단에 대한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다양해지면서 사회적 갈등이 부딪히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은 "<더글라스 맥아더 동상>은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인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였다.

맥아더 장군은 어떤 사람?

맥아더 장군상
 맥아더 장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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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맥아더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더글라스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영향으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여러 전쟁에 참전했으며,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교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미국의 군인인 그가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아는 유명인이 된 것은 6·25 전쟁에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을 되찾았고, 북한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 후 현재의 휴전선까지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엄청난 수의 군인을 보낸 중국의 개입 때문이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위험에서 구해준 은인이며,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한 '자유의 사도'였다. 어린 시절 나는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맥아더 장군에 대한 다른 견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그가 만주에 핵폭탄을 투하하자고 주장했다가 해임됐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만주에 핵폭탄을 사용해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했다면, 유엔군과 국군은 북한 지역을 모두 점령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어떤 인터넷 신문은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으므로, 만주나 북한에 핵폭탄이 떨어졌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 맥아더 장군을 위한 변명)

하지만, 핵을 쓰자고 하는 주장은 만주와 우리나라 한두 군데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전면적인 전쟁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세계 3차 대전으로 확대될 만한 일이었다. 이것은 진보 역사학자인 한홍구 교수가 <대한민국사>에서 지적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 조갑제씨도 <조갑제 칼럼>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관련기사 : 대한민국,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이 살렸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모두 맥아더 장군을 숭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갑제 칼럼>은 맥아더를 비판했다. 맥아더가 중공군 참전에 대한 정보를 듣고도 무시하는 등 정보판단에 실패했으며,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는 등 정직하지 못했고, 부하인 리지웨이 장군의 공을 가로채려 했으며, 중국까지 수복하여 '아시아의 시저'가 되고자 했다며 맥아더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유엔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개입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갈 것이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더라도 북진은 기정사실이었다고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사대주의의 피가 흐르는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탁월한 군인으로 평가 받아 왔다.하지만 6.25 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한국전 확전 등을 계획해 일부는 전쟁광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탁월한 군인으로 평가 받아 왔다.하지만 6.25 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한국전 확전 등을 계획해 일부는 전쟁광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한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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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6·25전쟁 때처럼 쉽게 허물어졌다. 임진왜란 때는 20일 만에 수도인 한양이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는데, 6·25 때는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으니 6·25 때가 더 심한 상황이기는 했다. 이때 조선의 지배층은 명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명의 군대가 왔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왜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조선의 지배층은 평양에 무열사(武烈祠)를 짓고 이여송과 명나라 장군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의 지배층들이 재조지은(나라를 다시 살려준 은혜)의 은인 이여송 장군에게 감사하며 사당을 만들었듯이, 대한민국은 6·25 때 대한민국을 살려준 재조지은의 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동상을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갚으라며 출병을 요구해 나선정벌에 나섰듯이, 우리도 베트남 전쟁,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모두 미국의 재조지은에 대한 답례로 파병했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는 임진왜란 단원에서, 명나라 군대보다는 이순신 장군의 전투와 각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장들의 활약을 더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명나라의 도움에 대해 그닥 고마워하지 않는다. 재조지은 운운하며 조선의 지배층들이 지나치게 명에 집착하다 병자호란을 초래한 것에 대해 짜증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문화재 지정을 요구하는 측은 문화재로 지정되면 감히 훼손할 수 없기에 맥아더 장군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그리하는 듯하다.

미래의 우리 후손들은 문화재로 지정된 맥아더 장군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조선의 지배층들이 이여송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린 것에 대해 마뜩잖게 생각하는 것과 다를까? 이런 면에서 맥아더 장군상은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대한민국 시대에 반복하고, 지배층이 그 해결 방법마저 동일하게 반복한 역사의 증거물로서 말이다.


태그:#맥아더 장군상, #김경승,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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