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0월 31일 오후 1시 20분, 서울중앙지법 510호 법정.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선고공판이 열리는 날이라 기자들이 자리를 잡기 위해 법정 출입구에 몰려 있었다. 그런 젊은 기자들 사이로 초로의 한 인사가 눈에 띄었다. 현재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다. 

한명숙 전 총리 측근들은 강 전 국장을 '종군기자'로 불렀다. 지난해부터 열렸던 5만 달러 수수 의혹과 9억여 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 재판에 모두 참석해 재판내용을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기자들이 자리를 비운 때에도 펜과 취재수첩을 들고 묵묵히 법정을 지켜왔다. 그렇게 '기자본능'을 발휘한 것이 무려 19개월 동안이다. 이날 법정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가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 510호 법정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허허."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것은 곤란하다"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강 전 국장과 한명숙 전 총리의 인연은 노무현재단에서 본격화됐다. 한 전 총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인 지난 2009년 9월 설립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그에게 상임운영위원 겸 편집위원장을 직접 제안했던 것이다. 지난 2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평소에 노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한 전 총리의 제안을 수락했어요. 한 전 총리는 늘 알고는 지냈는데 가깝게 지낸 적은 없어요. 2002년 제가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그분은 환경부 장관을 했는데 그 때 한두 번 뵀어요. 그리고 그분이 국무총리 하실 때 전 초대 신문유통원장을 했구요. 저는 그분을 정치인보다는 여성운동을 열심히 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상임운영위원을 맡은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사건'이 터졌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인사청탁 명목으로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건넸다는 것이다. 특히 한 전 총리가 돈을 받은 장소가 총리 공관이었다고 알려지면서 지지자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한 전 총리는 검찰의 소환조사를 거부하다 2009년 12월 18일 노무현재단에서 체포됐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잖아요. 처음에는 실망감이 있었어요. 한 전 총리 주변 인사들의 반응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어요. 냉정하다는 이해찬 전 총리 등의 반응을 보고 '이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죠."

당시 언론들이 '5만 달러 사건'에서 보여준 보도태도는 강 전 국장이 한 전 총리 재판을 기록하도록 부추겼다. 그의 기자본능을 자극한 것은 특히 진보언론들이었다.  

"수구언론인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겨레>나 <경향> 같은 진보언론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이들의 보도태도는) 한 전 총리가 5만 달러를 받았다는 심증만 있고 (유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때 언론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었어요. 당시 <한겨레>가 논설위원 칼럼과 법조팀장 칼럼을 실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겁니다. '정치인은 늘 잡아뗀다, 한 전 총리도 돈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굉장히 실망했어요. 언론이 검찰에 농락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검찰과 결탁하는 걸 지켜봤어요."

이후 재판 참석은 강 전 국장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됐다. 딱 한번의 '조퇴'를 빼고 모든 재판에 참석해 검찰과 변호인단의 공방을 지켜보고 방청기까지 썼다.

그런데 곽 전 사장이 법정에서 진술을 바꾸기 시작했다. "인사청탁 명목으로 5만 달러를 한 전 총리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진술이 "인사청탁은 없었고 돈은 총리 공관 의자에 놓고 왔다"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핵심 증인의 진술번복은 '9억여 원 사건'에서도 되풀이된다.

"곽영욱 전 사장이 법정에서 횡설수설하는 걸 보면서 '한명숙=무죄'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곽 전 사장이 한 전 총리의 웃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었다고 하자 판사가 검사에게 '공소장을 바꾸는 게 어떠냐?'고 권고를 했어요. 검사들이 엄청 당황하더군요. 그리고 나중에는 '돈을 의자 위에 놓고 왔다'고 했어요. 그러자 검찰이 총리 경호원들과 비서관들을 증인으로 불렀죠. 그때 검찰수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느꼈어요. 검찰권 행사 범위를 넘어선 거죠. 있는 죄를 없는 것으로 할 수도 없지만 없는 죄를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더욱) 곤란합니다."

3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불법정치자금 9억여원 수수 혐의'에 대한 1심 선고에서 무죄를 받은 한명숙 전 총리가 강금실 변호사와 손을 잡고 법원을 나오고 있다.
 3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불법정치자금 9억여원 수수 혐의'에 대한 1심 선고에서 무죄를 받은 한명숙 전 총리가 강금실 변호사와 손을 잡고 법원을 나오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참여정부에서 도입한 공판중심주의 혜택 봐"

강 전 국장의 판단대로 한 전 총리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2010년 4월 9일). 하지만 무죄를 선고받기 하루 전날(4월 8일) 검찰(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은 건설업자인 한만호 한신건영 대표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피의사실 공표' 논란을 일으킨 '9억여 원 사건'의 시작이었다.

"선고가 나기 전부터 별건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거예요. 5만 달러 사건은 <조선>이 특종보도하더니, 9억여 원 사건은 <동아>가 특종보도했어요. 검찰이 정보를 이리 주고 저리 주면서 언론을 가지고 논 거죠."

이 '별건수사'를 접한 강 전 국장은 "이것은 한 전 총리만의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흐름은 끝났다고 봤는데 '한명숙 사건'을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노무현재단에서 얘기를 들어보니 이해찬 전 총리의 동생까지 뒤졌더군요. 그의 동생이 서울대 앞에서 서점을 하는데 세 번에 걸쳐 세무조사를 했다는 거예요. 이 전 총리뿐만이 아니라 유시민, 이병완, 양정철 등 (친노인사들을) 말도 못하게 뒤졌다고 합니다. 이병완 전 비서실장 친구는 검찰이 하도 뒤지는 바람에 사업이 망했다고 들었어요."

'30년 경력 기자'출신인 강 전 국장의 '기록본능'은 더욱 강해졌다. "한명숙 사건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검찰과 정치권력의 결탁이 얼마나 잔인하고 치졸한 공작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역사에 기록해야겠다"는 '거대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경향> 편집국장 시절에 신임 서울중앙지검장 S와 식사를 했어요. 그가 저보고 '정치는 절대로 하지 마라'고 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정치인은 100명이면 100명이 모두 교도소 담벼락을 다니는 사람이다, 100명 중에서 한사람이라도 깨끗한 사람이 있으면 정치를 권하겠는데 깨끗한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 답변하더군요. (S지검장의 대답을 지켜보면서) 검찰에게는 '정치인들은 걸면 걸린다'는 의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기왕에 잡으려면 거물을 잡으려고 해요."

강 전 국장은 그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한 전 총리가 왜 검찰의 표적이 됐는지를 설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야권통합의 구심점"으로 설 수 있는 인사는 한 전 총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전 총리를 표적수사했다는 주장이다.

"한 전 총리는 DJ가 발탁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키웠어요. (이전에는) 자기 색깔이나 빛을 못냈는데 DJ와 노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한 전 총리가 우뚝 서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MB검찰이 한 전 총리를 잘 찍은 거죠. 한 전 총리를 엮기 위해 한 전 총리 근처를 왔다갔다 한 사람들을 뒤지다가 곽영욱과 한만호를 잡은 거예요."

강 전 국장은 "한 전 총리에게 반드시 유죄를 씌워야겠다고 몰두한 검찰의 모습을 법정에서 봤다"며 "검찰은 예의도 없이 교만했고, 목표를 정하면 집요하고 기민했다"고 평했다.

"견제받지 않는 검찰권력이 기소독점권을 남용하는 것은 '독직((瀆職)'에 해당해요. 직무를 남용하는 거죠. 정연주 KBS 사장 사건,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사건 등에서 보듯 그런 일들이 MB정부에서 무수히 벌어지고 있죠. (기소독점권을) 마구 휘둘러야 검사도 인정받는 분위기가 검찰 안에 있고요."

하지만 검찰은 5만 달러 사건에 이어 9억여 원 사건에서도 패했다. 최고의 수사력을 자랑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한 전 총리에게 '1심 2패'하는 치욕을 당한 셈이다.

강 전 국장은 "참여정부가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했는데 검찰진술을 법정에서 다시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이라며 "그 혜택을 제일 먼저 본 분이 한 전 총리"라고 분석했다. 

강기석 전 <경향신문> 국장은 19개월 동안 2건의 한명숙 사건 재판을 취재했다.
 강기석 전 <경향신문> 국장은 19개월 동안 2건의 한명숙 사건 재판을 취재했다.
ⓒ 구영식

관련사진보기


"사냥본능이 살아 있는 언론이 많아져야"

한명숙 사건은 '검찰의 문제'만 드러낸 게 아니다. 검찰권력을 견제할 '최후의 수단'으로서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못했다는 것이 강 전 국장의 판단이다. 그는 "언론이 정보출구에 장악됐다"며 출입처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보의 출구를 장악한 사람에게 언론이 꼼짝 못하고 있어요. 그 정보출구에 밉보이면 무능한 기자가 되는 거죠. 특히 정보생산능력은 보수쪽이 강해요. 그것을 확대․강화해주는 게 출입처예요. 시각을 다르게 보려고 해도 같은 방에서 움직이고, 같은 정보원을 접촉하다 보면 비슷해지게 마련이죠. 기자들이 출입처 밖 취재활동을 하지 않아요. 결국 정보의 출구를 장악한 사람에게 농락당할 수 있다는 게 현재 언론의 비극이에요."

강 전 국장은 "출입처에서는 정보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기자들이 게을러 질 수밖에 없다"며 "그러다 보니 언론들이 사냥 본능을 잃어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국언론을 향한 그의 질타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한국에서는 (언론이) 공정, 객관, 중립, 균형을 버렸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예요. 조중동은 이런 가치들을 지킬 생각도 없고 특정정치세력과 결탁해 그들의 선전도구로 전락했어요. 정보창구를 보수언론과 검찰이 독점하고 있다 보니 진보언론은 정보가 부족해요. 게다가 게다가 조중동 프레임에 휘둘리다 보니 새로운 기사, 가치있는 기사를 발굴할 수 없죠."

한국 언론의 '냄비속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강 전 국장은 "한명숙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 언론들이 기사들을 엄청 써댔는데 사건의 진상을 따지는 재판과정은 경시했다"며 "몇차례 공판이 진행되면서 취재하는 기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1차, 2차 공판 때만 해도 일반 방청객들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기자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1진과 2진 기자들이 법정에 왔는데, 재판이 회를 거듭할수록 (한명숙 사건을) 잘 취급하지 않았죠. 몇몇 말진 기자들만 자리를 지켰어요. 그러다 보니 이 초년 기자들이 재판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지 못해요. 증인들의 섹시한 증언만 보도하는 등 '에피소드 중심'으로 흐르는 한계를 드러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9억여 원 전달' 정황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 보도되지 않았다. 한만호 전 대표의 한 전 총리 핸드폰 번호 입력시기를 둘러싼 논란이 보도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 2시까지 진행된 재판을 지켜봤던 강 전 국장은 지난 1월 9일 '새벽 2시 한명숙 법정에 있던 기자들은 무얼 했나'라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썼다.

"핸드폰 번호 입력 시기는 검찰 공소사실을 탄핵하는 데서 중요한 겁니다. 한만호 대표가 전화를 건 뒤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검찰이 주장해왔는데, 변호인단은 돈을 전달한 이후에 한 전 총리의 핸드폰 번호가 입력됐다고 반박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없었고, 새벽까지 남아 있던 일부 기자들도 이것을 보도하지 않았어요. 검찰이 언론의 속성을 잘 이용한 측면이 있어요. 검찰은 기사마감 전까지는 신문시간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와서 변호인단의 변론이 시작하면 기자들은 자리에 없어요."

강 전 국장은 "언론의 힘은 팩트(fact, 사실)에서 나오지 오피니언(opinion, 의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처럼 (사실을 추구하는) 사냥 본능이 살아 있는 언론이 한국에서도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그:#강기석, #한명숙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