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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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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계 최초이자, <오마이뉴스>의 새로운 얼굴 안내견 시민기자 김슬기입니다. 저는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으로, 우리 나이로는 아홉 살입니다. 저는 안내견 시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과 제가 아빠와 함께 다니면서 겪고 체험하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들을 앞으로 여러분께 소신껏 전하려합니다.

오늘은 제1탄으로 지난 가을 나들이 때 겪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개 얘기라고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끝까지 열심히 읽어봐 주세요.

안녕하세요, 안내견 김슬기입니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가 밤새 대지의 마른 목을 촉촉이 적셔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더불어 '수도권매립지'로 가을소풍을 가기로 했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앞이 안 보이는 아빠는 안내견인 제 견줄과 하네스(안내견 사용자가 잡고 따라가는 손잡이)만 잡고 따라 오시는지라, 우산이나 다른 물건을 들고 다니기가 어렵습니다. 저 또한 답답한 것은 아주 질색이라서, 안내견학교에서 나누어준 우의 입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어제 오후에는 그 굵은 빗줄기가 내리는 종로 거리를 아빠와 저 이렇게 둘이 걸었답니다. 저만 비 맞는 것이 안타까워서인지, 지나던 행인이 권하는 우산을 아빠는 한사코 거절하시더군요.

지금은 새벽 4시, 제가 항상 기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아침형 인간을 고집하는지라, 새벽 3~4시만 되면 일찍 일어나곤하십니다. 그리고 취침시간은 초저녁인 7~8시정도이고요. 그래서 제 아침식사 시간도 항상 이 꼭두새벽인 4~5시경이 되곤 한답니다.

아빠와 함께 살게 된 지난 7년여간 저는 한 번도 이 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하루에 단 한 번뿐인 식사 시간을 늦잠으로 인해 놓쳐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이윽고 아빠가 '부스럭 부스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는 베란다쪽 창문을 열어보십니다. 아파트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 소리가 아빠 이마에 주름살을 만듭니다.

"잉, 아직도 비가 오네…. 슬기야 우리 오늘 나들이를 가기로했는데 어떻게 하냐? 안내해주실 자원봉사자도 다 섭외해두었는데…."
"쯥쯥쯥…."

"여보, 오늘 일기예보가 어땠어?"

침상 이불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시는 엄마를 향해 아빠가 묻습니다.

"오전에만 약간 비가 오다 곧 개인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정말 그럴라나?"
"그렇고 말고요 아빠… 아무 걱정 마시고 우선 제 밥부터 챙겨주세요. 배가 고파 죽겠단말이에요. 어제도 혜화동으로 안국동으로 하루 종일 빗속을 걸으면서도 간식 하나 안 주셨잖아요…."
"야야, 니가 그런 소리 할까봐, 집 나서기 전에 먼저 간식부터 챙겨 주었잖니?"
"그래도 그건 집 나서기 전이고요. 자자, 그건 다 지나간 어제 일이고요. 오늘 아침밥이나 제발 빨리 주시란 말이에요…."

아빠의 늦은 걸음이 제 밥그릇을 들고 사료창고로 향하십니다.

"우우, 어째 저리 밍기적거리시는지 원…."

아침 식사가 끝나자 아빠가 스팀 타올로 제 온몸을 씻겨주십니다. 그러면서 항상 날려주시는 다정한 멘트를 또 제 귓가에 불어넣습니다.

"슬기야 사랑해…."
"히히히… 저도요…."

세면을 끝내고 목욕탕 밖으로 나와 보니, 창밖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습니다.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시는 엄마의 입밖으로 콧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아빠… 아침 용변 보러 가야죠. 저 똥 마려워요…."

황급히 아빠를 끌고 아파트 뒤편 조그만 채소밭 공터로갑니다. 그리고는 시원스레 용변을 봅니다.

"아빠, 비가 멎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어서 준비하고 우리 부지런히 나서보자구나."
"네…"

경쾌한 내 꼬리짓에 아침 햇살이 부서져 내립니다.

신나는 외출길... 준비할 게 많아요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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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인천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각장애인복지 콜'과 전체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콜' 등 두 종류의 장애인 전용 콜택시가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전용콜보다, 장애인콜이 요금이 조금 더 저렴하고 배차 차량 수도 많은지라 아빠는 대개 '장애인콜'을 이용하곤 하십니다.

오늘도 '장애인콜'에 전화를 걸어 차량을 예약하고 나들이 준비를 시작합니다. 우리 아빠는 등단 10년차의 시인이시며, 아마추어 사진가로 3회의 전시회를 가진 바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카메라와 여분의 배터리, 그리고 혹시 모를 비상 사태에 대비해 또 다른 여분의 카메라와 배터리를 준비하고 삼각대와 점자 컴퓨터인 한소네까지 배낭에 챙겨넣습니다. 그러고난 뒤에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허리를 펴고 일어서십니다.

오늘 나들이는 '수도권매립지'에서 열리고 있는 국화꽃 축제에 사진을 찍기 위해 나서는 것이니만큼 카메라와 배터리는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장비이지요. 그래서 전문 사진작가 자원봉사자가 아빠의 출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시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자원봉사자 사진작가이신 '멘토' 선생님도 오시고, 동료 시각장애 사진작가님도 오셔서 시간 맞춰 도착한 콜택시를 타고 오늘의 목적지인 '수도권매립지'로 출발합니다. 창밖으로 따가운 가을 햇살이 눈부십니다. 포도 위를 걸어가는 휴일 나들이객들의 바쁜 걸음걸이가 경쾌하게 이어집니다.

"와! 드디어 매립지의 꽃밭이 창밖으로 펼쳐집니다."

행락객들의 차량으로 가득한 주차장이 너무도 답답하게 이어지지만, 고개를 잡아빼고 창밖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봅니다.

"아빠, 저기 좀 보세요. 저기 코스모스가 너무도 아름다워요. 프레임에 담아보시면 너무도 소중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연신 침을 흘려가며 창밖을 바라보는 제 머리를 아빠의 다정한 손길이 가만히 만집니다.

"슬기야, 그렇게 좋아?"
"그럼요. 이게 얼마만의 외출이요, 얼마만의 꽃구경인데요…."
"
아, 아빠 저기 들국화예요."

잠시 후 택시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바쁘게 꽃밭 행사장으로 들어갑니다. 아빠와 친구분은 벌써 카메라를 꺼내들고 주변 정경을 설명해주시는 자원봉사자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셔터를 눌러댑니다. 저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흙의 내음과 갖가지 꽃향에 취해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멘토 선생님의 자상한 손에 이끌린 아빠의 투박한 손이 어여쁜 꽃잎의 정경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냅니다. 아빠의 가슴에 담긴 저 아름다운 꽃의 색깔은 어떤 색일까요? 13세 때, 완전히 실명했기에 아빠의 기억 속엔 다양한 색감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색 등 단색밖에 기억하는 색상은 없다하십니다.

사진 찍지 마세요... '견권'도 존중해 주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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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전진해가 노라니, 들국화 단지가 나옵니다. 저 아름다운 꽃들의 자태를 아빠의 프레임에서 새로이 인화해 낼 수 있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꽃밭 속에 서 있는 멘토 선생님과 제 모습이 나란히 아빠의 사진기에 담겨집니다. 저도 모르게 주변의 꽃내음에 고개가 돌아가는 자신을 멘토 선생님이 불러 돌립니다.

"슬기야, 아빠 봐야지…."
"저도 알아요, 그런데 이 꽃들이 저더러 자기네 한 번만 봐달라고 저렇게 아우성치고 사정이니 전들 어떻게 해요…."
"슬기야 아빠 봐."

아빠의 노여움 섞인 고함이 제 고개를 획 잡아 돌립니다.

"아빠, 귀청 떨어지겠어요…. 누가 몰라요? 자, 보자나요 아빠를…. 아무리 봐도 못생긴 얼굴, 뭐가 그리 좋다고 자꾸 보래는지 원…."

바로 그때,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가 저를 향해 터집니다. 갑자기 기분이 상해버린 저를 대신해, 멘토 선생님께서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를 중지시킵니다. 왜 사람들은 안내견의 초상권은 무시해 버리는 걸까요? 아빠는 늘 어디서고 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못 마땅해 제게 속삭이곤 하십니다.

"슬기야, 우리 슬기의 견권 향상을 위해, 한 번 떨쳐나서 볼까…."
"네, 아빠. 제발 이 미모가 탐나는 건 좋지만 몰지각한 사람들의 무차별적인 카메라 세례 속에서 저를 보호해 주세요, 네?"

"명은씨, 이번엔 제가 슬기하고 함께 꽃밭에 앉을 테니 제 사진을 한 번 찍어주시겠어요?"
"그러죠 뭐.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멘토 선생님과 아빠가 자리를 바꾸시며 싱그런 미소를 교환합니다. 그리고는 아빠가 제 목을 끌어안고 볼을 붙여오십니다.

"아빠, 숨 막혀요. 이제 그만 끌어 안으라고요…."

아까부터 국악공연 실황이 스피커를 통해 큰 소리로 꽃밭을 채워댑니다. 큰소리에 놀란 꽃들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귀를 틀어막습니다. 불어오는 심술궂은 바람이 숙여진 꽃들의 고개를 쳐들고 도망갑니다. 자연의 온갖 희롱이 못내 싫지 않은 듯, 꽃들도 화사한 미소로 바람과 장난을 칩니다.

억새풍들이 서로 어깨동무하여 매스게임을 하네요. 오늘 행사의 절정인 듯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절도 있게 굽어지는 율동이 몹시도 아름답습니다. 아빠의 카메라가 억새의 군무를 담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빠, 저기 해바라기 한 송이가 홀로 피었네요."
"여러 그루의 해바라기 중, 유일하게 한 그루만 꽃을 피어냈어요…."
"그래? 어디? 명은씨 어서 가봐요. 해바라기가 제 안으로 들어와 피고 싶다네요."
"그래요 그럼. 어디 한 번 옮겨 피워보세요. 제발 죽이지 말고 말이죠."

"아빠, 저 이제 너무 다리가 아파요. 저 잔디밭에서 잠시 앉아 쉬어가요."
"그렇게 해요. 선생님."

저는 은퇴하기 싫어요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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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선생님의 지원 사격으로 우리는 잔디밭에 앉아 잠시 휴식을 즐깁니다. 아빠 무릎을 베고 누운 제 모습을 멘토 선생님과 아빠 친구분과 아빠가 셀프사진으로 열심히 사진기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저는 너무 피곤해 잠시 두 눈을 감고 오수를 만끽합니다.

"슬기야, 오늘도 수고 많았다. 네가 없으면 이 아빠는 무슨 낙으로 살고, 무슨 재미로 사진을 찍는다니? 이제 우리 슬기가 은퇴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데, 이 아빠는 숨 가쁘게 달려가는 시간이 너무도 아쉽고 두렵단다. 슬기야 사랑해…."
"저도 아빠를 사랑해요. 저 편하게 살지 않아도 좋으니 은퇴 안 하면 안 될까요? 제가 평생 아빠를 모시면 안 되나요?"

순간 울컥하는 울분이 제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자, 이제 시간도 많이 흘렀고, 콜택시도 도착할 시간이 되었으니 우리 주차장으로 나가봅시다."

불편한 분위기를 인지하신 아빠 친구분의 제안으로 모두는 자리를 털고 일어섭니다. 우리는 다시 걸어왔던 꽃길을 되돌아 주차장으로 걸어갑니다. 오늘 나들이는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히 우리 부녀의 가슴 속에 남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www.noulpoet.kr 제 홈페이지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안내견, #슬기, #수도권 매립지, #국화꽃 축제,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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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시인으로 10년째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해바라기'동인으로 활동하고있으며 역시 시각장애인 아마추어 사진가로 열심히 살아가고있습니다. 슬하에 남매를 두고 아내와 더불어 지천명 이후의 삶을 훌륭히 개척해나가고자 부단히 노력하고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탈시설만이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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