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국여행 첫날(9월 16일), 오후 5시 20분 인천항을 출발한 단둥(丹東)행 '동방명주호'가 항해를 한 시간 남짓했을까. 저녁 식사 안내 방송이 나왔다. 식사시간은 오후 6시 30부터 7시 30분까지. 인솔자는 식사시간을 넘기면 다음 날 아침까지 굶어야 한다고 했다.

도가니탕 식권(5000원)을 사려고 기다리는 승객들.
 도가니탕 식권(5000원)을 사려고 기다리는 승객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안내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방에서 나왔다. 안내실에는 식사 메뉴와 주의사항이 적힌 안내판이 걸려 있고, 승객들은 식권을 구입하려고 길게 줄지어 있었다. 여승무원이 가슴에 명패를 찬 단체손님은 식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메뉴는 도가니탕, 기대되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통로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만원이었다. 내 차례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배에서 처음 사 먹는 밥이고, 각양각색인 사람들 표정을 감상하며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사람들이 통로 옆 작은 룸을 들락날락했다. 입구를 천으로 가려놓아 호기심을 자극했다. 안에서 비밀거래라도 하는지 살짝 들여다보니 포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1만 원짜리 지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놀라웠다. 돈이 얼마나 많으면 종이쪽지 취급을 하는지, 그들이 걱정도 되었다.

생각보다 맛있었던 도가니탕.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로 맛이 좋았습니다.
 생각보다 맛있었던 도가니탕.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로 맛이 좋았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식당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으며 깨끗했고, 뷔페식에 셀프였다. 국수가 들어간 도가니탕 반찬은 깍두기, 어묵무침, 야채무침뿐. 국산 우유도 하나 나왔다. 국물이 그릇의 절반밖에 차지 않아 주방에 부탁했더니 두말없이 더 퍼주었다. 

음식 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도가니탕도 소가 헤엄치고 지나간 정도겠지 하고 포기했는데 국물이 진하고 톱톱했다. 건더기도 생각보다 많았고, 육질도 쫄깃하고 고소했다. 특히 적당히 익은 깍두기는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오니까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시계는 오후 8시를 향하고 있었다. 육중한 동방명주호는 미끄러지듯 북으로 항해를 계속했고, 엔진 소리는 낮게 깔리는 클래식 음률처럼 느껴졌다. 가슴으로 안기는 바닷바람이 선상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지인과 일행 몇이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중히 사양했다. 술을 마시면 계획했던 일들을 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객실로 돌아와 샤워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여행에서 만난 동창과 환담을 나누다가 메모장을 준비해서 밖으로 나왔다.

선상 카페가 있는 쪽으로 가니까 테이블마다 맥주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라보!", "위하여!"를 외치며 흥겨워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지붕 삼아 바닷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마시는 맥주는 낭만이 더해져 더욱 시원할 것 같았다.

동방명주호에서 만난 붉은 돼지. 벗고 싶을 때 벗고 다니는 그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동방명주호에서 만난 붉은 돼지. 벗고 싶을 때 벗고 다니는 그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눈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선상을 활보하는 '붉은 돼지'였다. 작년(2010년) 여름 항일유적지 방문차 만주에 갔을 때 여성가이드가 설명했던 그 '붉은 돼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꼴사납기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졌다. 

중국에서 '붉은 돼지'는 공공장소에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윗도리를 훌훌 벗고 다니는 사람들의 별명이다. 작년에도 공원과 기차 등에서 몇 차례 목격했었다. 그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하나같이 뚱뚱하다는 것. 그래서 볼수록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갑판으로 나와 희미한 달빛이 반사되는 밤바다를 감상하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닐기도 했다. 통로에 자리를 깔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도 많았다. 여행 중 우연히 술친구가 되어 큰소리로 시국을 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입에 착착 감기는 북한산 '쫀득이' 맛 끝내줘

지루한 줄 모르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남이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이었다. 40대, 50대, 70대로 보이는 승객 셋이 어포를 가운데 놓고 맥주를 마시면서 격론을 벌이는데 40대 젊은이의 북한 사투리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어포가 맛있겠다며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40대는 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 연길(옌지)에, 50대는 심양(선양), 70대는 서울에 살고 있으며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다. 50대 아저씨가 6인실 침대를 함께 사용하게 되면서 친구가 되었다며 껄껄 웃었다.  

북한 사투리가 익숙한 40대는 실제 나이가 53살이고 이름은 한봉천(韓奉天), 조선족 3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성함이 무척 높으시네요!"라고 하니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며 활짝 웃었다. 강원도가 고향인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갔단다.

결을 따라 찢어놓은 북한산 명태, 맛도 맛이지만, 냄새부터 수입품과 달랐습니다.
 결을 따라 찢어놓은 북한산 명태, 맛도 맛이지만, 냄새부터 수입품과 달랐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북한에서 ‘쫀드기’, 연변에서 ‘짝태’로 불리는 명태, 작은 게 흠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쫀드기’, 연변에서 ‘짝태’로 불리는 명태, 작은 게 흠이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한씨가 맥주나 한잔하시라며 컵을 주기에 사양했다. 그래도 반 컵을 따라주며 권하기에 받았다. 그는 바닥의 어포를 하나 짚더니 "쫀드기도 한 조각 드셔보시라요!"라며 주었다. 흔한 어포인 줄 알았는데 '쫀드기'라니 이름이 재미있었다.

"요거이 바로 명태입네다, 어때 맛이 좋제요? 요렇게 말린 것을 북한 인민들은 '쫀드기'라고 합네다. 아마 쫀득쫀득하니까 그렇게 부르는 모양입네다. 고런데 요사이는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라고 합네다."(웃음)

한씨 말대로 쫀득쫀득했고, 입에 착착 감겼다. "어쩐지 뭔가 다르더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씹을수록 담백하고 고소한 마른명태 특유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30~40년 전 맛보고 기억에서 사라졌던 그 맛이었다. 잊어버렸던 맛을 수십 년 만에 만나니까 반갑기도 했다.

옆에 있던 뚱뚱한 체격의 50대가 만주 연변에서는 쫀드기를 '짝태'라고 부른다며 거들고 나섰다. 그는 중국 슈퍼에서도 판다며 조선족 동포들, 특히 애주가들이 무척 좋아하는 생선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짝태', 그 이름도 재미있고, 귀엽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조국 국민 되고 싶은데 안 받아줍네다!"

맥주가 한 바퀴 돌고 시간이 가면서 대화도 깊어갔다. 한봉천씨는 두 아들을 두고 있으며 5년 전 한국으로 나와서 아내는 식당에서 일하고, 자기는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일을 해왔다고 했다. 아직 집은 장만하지 못했지만, 약간의 돈도 모았단다.

한씨는 어머니 혼자 연길 '철남'에 사는데 공사장에서 일하다 다친 무릎을 치료받으러 간다고 했다. 한국에서 5년이나 살면서도 4대 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의료비가 너무 비싸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것. 

연길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가 살았던 곳 이름이 낯설었다. 해서 재차 물었더니 철길 넘어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어서 '철남'으로 불러왔단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씨는 단둥에 도착하면 연길행 기차를 타야 하는데 곧바로 연결될지 모르겠다며 치료받으러 가는 사연을 설명했다.

한봉천씨 무릎. 상처 부위가 선명한데요. 보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며 억울해했습니다.
 한봉천씨 무릎. 상처 부위가 선명한데요. 보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며 억울해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한 달 전쯤, 바라시(구조물을 뜯어내는 일) 작업을 하다가설레 다쳐서 회사원들하구 병원에 갔드랬시요. MRI랑 찍고 했제요. 저는 못에 찍혀서 고통이 심한데 의사는 아니라잖아요. 나이를 먹으니까니 연골이 퇴화되고 약해졌다는 식으로 진단을 하드그만요. 그래 돈두 없구 그래서···." 

건축공사를 시공한 회사에서 치료를 안 해주더냐고 물으니까 한씨는 MRI 검사도 했는데 의사 진단이 어떻게 나왔는지 보상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며 어이없어했다. 사진촬영을 사양하던 그는 바지를 걷더니 상처 부위를 보여주었다. 무척 억울한 모양이었다.

한씨는 한국에 있는 동안 일당으로 10만~12만 원씩 받았다고 한다. 노동의 강도에 따라 노임도 차이 났다고.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니까 "할아버지, 아버지 조국 국민 되고십제요. 그란데 안 받아줍네다!"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행하다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여서 반갑고 즐거웠다. 그런데 얘기가 깊어질수록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객실로 돌아오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밤하늘의 하현달도 구름과 함께 흘러갈 뿐 말이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쫀득이, #북한산 명태, #조선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