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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름에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비가 많이도 쏟아지더니 가을 들어서는 내내 가뭄이다. 호박 넝쿨이 목말라 죽겠다고 비틀비틀 꼬여가고, 고구마 줄기에도 힘이 없고, 국화도 시들어 간다. 물을 주어야지. 물을 주어야 해. 9월부터 한 달이 넘도록 날마다 그것들 물 주는 일로 직업을 삼았다.

며칠 전부터 비가 온다고 방송에서 야단이더니 개뿔이나, 호박잎이나 조금 적시다가 그만둬 버린다. 그리고는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댄다. 그것도 비라고 살짝 뿌려 놓고는 유세를 하는가. 철이 바뀌었다고 경고를 하는가. 그래, 그런가 보다. 연탄을 들여야겠다. 난로에 연통도 끼워야겠다. 가당찮다.

그래, 갑자기 뭔가가 가당찮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이럴 수가 있는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뭔가 무거운 것이, 무겁고 뜨거운 것이 발밑에서 꿈틀거린다. 어디 갔지? 엄마가 어디로 가버렸지? 아들을 오빠라 부르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낙낙이 웃기나 하던 엄마가, 엄마가 어디로 가버린 거야, 응?

한 백 일쯤 지나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아니 처음에는 보름 정도면 되리라 여겼다. 보름이 지난 뒤에는 한 달로 고쳐 잡았다. 한 달이 되어갈 즈음에는 두 달이면 잊어지려니 했고, 석 달이 가까워지면서는 그래, 적어도 백 일은 지나야겠지, 했다. 백 일이 지난 지도 한참인 이제 나는 더 이상 못 살겠다. 집을 나가야겠다. 나가버려야겠다.

가을이 너무 맑아서 타들어간다.
 가을이 너무 맑아서 타들어간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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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돌아가신 지 백 일... 아들은 길을 떠났다

그렇게 집을 나섰다. 양말을 신고, 항상 신는 슬리퍼가 아닌 구두 비슷한 운동화를 신고 자전거에 올랐다. 마을을 벗어나서 십 분이나 페달을 밟았을까. 아아,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무릎 관절이 가끔 말썽을 일으켜서 자전거를 타고는 멀리 못 간다. 해서 2인승 미니밴을 몰고 일단 선운사 쪽으로 향했다.

버스가 보였다. 버스를 보는 순간 다시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면 있는 사람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그렇게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와서 시외버스를 탔다. 고창에서 멀리 가는 시외버스는 첫째가 서울이요, 그 다음은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정도인데 가장 빨리 출발하는 것으로 군산행이 있어서 거기에 올라탔다.

군산행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와서 얼마를 달렸을 때 문득 한 사람이, 한 가족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교사 경력의 아내와 연극배우 남편 그리고 다섯 살 유치원생 사내아이 하나로 구성된 가족. 그 가족을 만났던 그 해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전라북도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이혼이라는, 내게는 아주 낯선 경험을 거친 뒤의 첫 번째 본격적인 외출이 그것이었다. 이혼이란 내 삶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일 뿐이라는 관념 같은 것이 아마 내게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혼이라는 절차를 거치고 난 뒤에 내게 찾아온 내상은 제법 깊었다.

2년 정도를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자빠져' 있었다.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어느 하루 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가 자전거를 발견했다. 그날 이후 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삶을 재정립해야겠다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길을 나섰다.

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그날'

그날은 김제 군산간 산업화도로를 지나면서 화물트럭에 치어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거쳤다. 죽다가 살았다는 기분인 채로 군산에 도착해서 채만식 문학관을 들렀다가 월명공원으로 들어가서 퍼져버렸다. 늘어지게 한숨 잘 자던 중에 아마 무엇인가 기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깨어났다. 잠에 취한 눈에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이거 뭐냐. 공원을 무대로 살아가는 조폭 똘마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월명공원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사자는 사자를 알아보고 토끼는 토끼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가슴에서 가득 찬바람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그는 으레 월명공원을 찾는단다. 연극배우인 그는, 관객도 별로 없는 작품 한 편을 여섯 달 동안이나 이를테면 장기공연 형식으로 끌어오다가 완전히 막을 내린 다음 날 아침부터 내내 월명공원에 죽치고 있었다는 거였다.

"잠에서 깨시면 글쎄, 막걸리 한잔 나누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가 말했다. 아, 막걸리! 내 입에서 감탄이 쏟아졌고, 그렇게 그를 따라서 막걸리집으로 갔다. 월명공원을 나와서 철도를 따라 한없이 걸었다. 뒤에서 해가 지고 있었고, 철도를 따라서 쭉 뻗은 우리의 그림자는 참으로 엉성하게도 길었다. 철도 옆으로 끝도 없이 늘어선 판잣집 오막살이에서 남자가, 혹은 여자가 이따금 연극배우 남자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러다가 무슨 소굴처럼 생긴 붉은 양철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갔다. 연탄화덕을 겸한 둥근 탁자 셋이 달랑 놓였을 뿐인 허름한 막걸리집치고는 특이하게도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젊은 아줌마가 주인이었다. 두 되짜리 주전자 한 개를 비웠을 즈음에서야 그들이 부부라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고 시인 지망생이었단다.

판잣집보다는 훨씬 나은 양철집
 판잣집보다는 훨씬 나은 양철집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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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아주 이상해질 때면 언제라도 오세요"

초등 교사이면서 시인 지망생이 연극을 좋아했다. 군산에서 전주까지 거의 매일 저녁 출퇴근을 하다시피하며 연극을 보았다나 어쨌다나. 어제 이미 본 작품을 오늘도 보고, 오늘 본 것을 내일도 보는 식으로.

그런데 정작 연극은 핑계일 뿐이고 남자를 보러 다녔던 모양이다. 연극배우 중에 한 남자와 초등교사는 결혼을 했고,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되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막걸리집 아줌마가 되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연극배우 남편이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보다는 막걸리집 아줌마 아내가 훨씬 좋겠다고 개구쟁이 사내아이처럼 떼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는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로만 알았다. 그렇게 웃고 말았다. 전직이 무엇이건 따질 필요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나중에야 노조에 가입한 교사를 마구 해고하는 시대가 낳은 우울한 풍경이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까르르까르르 연신 웃어대는 그녀의 소리와 표정이 좋았고, 그런 아내를 그윽이 바라보는 그 남편의 깊은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가 좋았다. 남자는 가끔 자기 아내에게 "선생님, 시 한수 읊어주세요"하고 있었고, 그러면 그녀는 자작시로 짐작되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 사람들의 일상에 관한 시를 단아하게 읊는데 읊은 뒤에는 부끄러워 죽겠다며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고 웃어대고 있었다.

웃음소리로만 보자면 하나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홍시처럼 붉어지는 표정을 보면 말로는 다할 수 없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기이한 부조화의 조화는 매우 낯선 장면이면서도 자연스러워서 내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눈을 뜨고 봐도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더욱 환하게 보이는 그런 어떤 환희의 애달픔 같은 것이 그들 부부에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해장국까지 얻어먹고 그 댁을 나설 때 부끄러움 많은 그 아내가 말했다.

"삶이 아주 이상해질 때면 언제라도 오세요."

나는 주저 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아마 일 년 안에 올 것 같은데요."

철도 바로 옆의 판잣집들
 철도 바로 옆의 판잣집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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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관절염... 그리고 어머니의 '실종'

그때는 그랬다. 금방 다시 그들 부부를 찾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벌써 9년 하고도 3개월 전이었다. 2002년 6월에서 7월 사이 내 안에서 무슨 바람이 그렇게도 거세게 불다가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말았던가. 멀리는 이혼이었고, 가까이로는 관절염이었다. 이혼에서 온 지독한 내상을 치유하겠다는 듯이 그 어떤 산꼭대기라도 길만 있으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던 그 해의 7월 내 다리에, 무릎에 아주 낯설게 심각한 이상이 생겨 버렸다.

처음 자전거 여행을 나설 때는 그랬다. 전라북도를 구석구석 돌고 난 뒤에는 전라남도를 돌겠다고, 전라남도를 돌고 난 뒤에는 경상남도를, 경상남도를 돌고 난 뒤에는 경상북도를, 그리고 강원도를, 경기도를, 충청도를, 그렇게 국토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겠다는, 그런 거대한 꿈을 갖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군산을 떠나 부안 격포 채석강 근처에서 무릎이 아파 버렸다. 페달을 밟으면 굵은 바늘로 쑤셔대는 듯한 통증이 반복되면서 내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터졌다.

여행을 포기하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기를 얼마나 했던가. 드디어 관절염 그 나쁜 녀석을 잡았다고 좋아라 할 즈음 뜬금없는 집 문제가 불거졌다. 집을 팔아버렸으니 비워달라는, 너무도 뜻밖의 터무니없는 최후통첩을 받고 아아 집을 사야겠구나, 남의 집을 빌려 살면 이런 횡액을 당하게 되는구나, 하는 따위 뒤늦은 깨달음으로 동분서주 뛰어다니기를 5년여, 드디어 그놈의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조금 느긋해 할 무렵 어머니가 실종되었다.

경찰관들이 동원되고, 마을 사람까지 죄다 나서서 혹시 물에 빠졌을지 모른다고 시냇물 속을 뒤집고 산속을 뒤지고 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어머니는 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걷고 있던 중에 발견되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온전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돌아가신 지도 40년이 넘은 당신의 친정어머니 한 사람뿐인, 큰아들은 오빠가 되고 다른 자식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한 상태로 그저 웃기나 하는 날들이 일 년 지나 이 년 지나 삼 년을 너머 계속되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홍시...익어가는 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삼 년여 동안 어머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는 지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해서 어머니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너무 커서 다른 것은 생각해볼 여유도 사실은 없었다. 이러이러할 때 저렇게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저러저러할 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저렇게 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 이런 숱한 의구심들 속에는 요양원 문제도 있었다.

옆에 이웃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그냥 요양원에 모셨더라면 좀 더 편안하고 즐겁게 오래 사셨을까? 군산의 어느 요양원에서 목사님이 아침 예배 참석을 게을리 하는 아흔두 살 할머니를 상습적으로 두들겨 패다가 발각되어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는 아아, 한숨을 내쉬었다. 요양원이라는 것이 국공립 시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종교단체에서 하는 것들인데, 종교가 없는 어머니는 십중팔구 얻어맞기 십상이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면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순간뿐이었다. 십 분, 아니 오 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위로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굴헝'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506평이나 되는 집구석 마당이 그렇게도 거칠게 광활해 보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을이랍시고 감나무에서 감들이 빨갛게 마구 익어가는 모습이 견딜 수가 없었다. 홍시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계실 때는 미리미리 따서 홍시를 만들고 곶감을 만들기도 하던 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글쎄, 저것들을 어디에 쓸 것이냔 말이다. 먹어줄 사람도 없는데 너는 뭐 중뿔난 재주를 지녔다고 자꾸 익어대느냔 말이다, 응? 그런 말도 안 되는 투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터져 나왔다.

9년 만에 찾아간 그곳, 그녀의 막걸리집

아, 정말이지 이상한 날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삶이 아주 이상할 때는 언제라도 오시"라던 그녀의 말은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도 까맣게 완전히 그들 부부를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군산행 버스에 몸을 태웠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던 셈이다. 우연히 그들을 만났듯이, 우연히 그들을 다시 생각해냈던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고창에서 군산까지 버스로 2시간, 그 시간 내내 그들 부부와 유치원생 아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아들은 이제 고등학생쯤 되었겠지. 아 이런,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버스가 군산에 도착했을 때는 뭐라고나 할까, 덜컥 겁이 나고 있었다. 선뜻 그쪽으로 발길을 잡을 수가 없어서 일단 월명공원으로 갔다. 군데군데 '근대역사 박물관 개관'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새로 문을 연 그 박물관을 찾아가 봤겠지만, 싹 외면하고 금방 공원을 나와서 횡단보도 몇 개를 건넌 뒤에 철도를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9년, 그 세월만큼이나 군산은 변해 있었다. 철도는 아직 그대로 있었지만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레일은 녹이 슬고 침목 사이에는 자갈 대신 흙이 깔려 배추라든가 무, 쪽파 같은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철길 옆으로 바싹 붙어서 쭉 늘어서 있던 오막살이 판잣집들도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더러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보이기도 했지만 태반이 비어 있었고, 이제 곧 중장비들이 들이닥쳐 철거공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조짐이 도처에서 보일 뿐이었다. 그랬다. 철도부지는 이제 명실상부한 사유지가 되어 있었다.

7시간, 아니 어쩌면 8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어디에 엉덩이를 앉혀보지 못하고 내처 걷기만 했다. 잠깐씩 멈춰서 푸성귀를 가꾸고 있는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여쭤보기는 했다. 그 결과 적어도 2008년쯤에 여객수송 업무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곧 화물운송도 중단되었다. 군산-익산간 철도는 원래 일제가 호남평야의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갈 목적으로 개설한 것으로, 산업도로가 뚫린 뒤로는 경제성이 없다는 말이 예전부터 있어 왔었다.

경작을 하지 말라는 경고판 옆에서 농사를 짓는 할머니
 경작을 하지 말라는 경고판 옆에서 농사를 짓는 할머니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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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내 삶은 왜 변하지 않았는가

아들이 하나 있고 남편이 연극배우를 하는 젊은 막걸리집 아줌마를 혹시 아시나요, 하는 질문을 했을 때 할머니는 눈을 오꿈하게 뜨고 내 뒤를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따야,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다더니, 꼭 그짝인 사람이 여그도 있었네야?"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그 말씀이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디 무슨 찜질방이나 여인숙 같은 데라도 가서 하룻밤 새고 다음 날 '근대역사박물관'이나 둘러볼까 하다가는 그만두고 서둘러 고창행 막차를 타기로 했다. 갑자기 초조해지고 있었다. 얼른 돌아가자 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비로소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었다.

만약에 그들 부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살고 있었다면, 나는 어쩌면 더 큰 굴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십 년 가까이나, 9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채로 그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살고 있었다면 내 마음은 어떠했을까. 물론 반갑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정반대의 무엇이 필경 오고야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독한 절망감에 치를 떨며 깊은 어느 산속 같은 데로 들어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인간의 삶은 왜 이다지도 오늘이 십 년 전이나 같은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어쨌든 나는 그들이 보고 싶다. 그들 부부의 그 애달픈, 그러면서도 신명이 나는, 오늘보다는 내일을 바라보며 살고 있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던 그들이, 아아, 정말이지 보고 싶다.


태그:#자전거여행, #기찻길옆 판잣집, #어머니, #죽음,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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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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