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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밤. 피가 튀고 골수가 튀는 피의 광란은 도성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저자거리에 매달린 김종서 부자와 황보인,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조번, 이명민, 원구의 헝크러진 머리를 바라본 백성들은 경악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다문 입을 열지 못했다. 공포다.

명나라의 기본 법전. 조선은 이 법전을 사용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명률 명나라의 기본 법전. 조선은 이 법전을 사용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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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에게 풍향계를 맞춘 의금부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대명률의 모반대역조(謀反大逆條)의 해당절목에 '모반대역에 단순 가담한자라도 수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하고 그 아비와 자식은 나이 16세 이상이면 모두 교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또한 15세 이하의 아들과 딸, 처와 첩, 조손, 형제자매와 그 자식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 종으로 삼고 재산은 모두 적몰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안평과 그의 아들 이우직, 그리고 황보인, 김종서,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이명민, 김연, 조번, 김승규, 원구, 이현로, 하석의 아비와 자식의 나이 16세 이상인 자는 모두 교형에 처하고 백부, 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모두 유(流) 3천리에 안치하고 15세 이하 및 모녀·처첩·조손·형제·자매와 자식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 종으로 삼고 재산은 몰수하소서."

대소신료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입을 벌려도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 상생의 정치란 없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피(彼) 아니면 아(我)다. 적이 있고 내가 있을 뿐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되고 그 친구의 머리가 저자거리에 걸려도 입을 닫아야 한다. 공포의 계절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만 같다

임금 역시 피를 묻힌 숙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가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윤허한 임금의 손이 떨리고 턱이 떨렸다.

"왜 이렇게 떠십니까? 전하!"
"몸은 춥지 않는데 이가 시려서 그런가 보오."
"안으로 드시지요."
"안이나 밖이나 매한가지요. 숙부가 곁에 있으니 더 춥소."

수양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은 전하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추움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을 더 지피라 할까요?"
"불을 더 넣어도 매한가지일거요. 이곳 자체가 춥소. 이곳을 떠나고 싶소."

밤마다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가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부왕이 승하한 경복궁이 싫어서 만도 아니었다. 혈육이 그리워 궐을 나왔다. 누이가 있고 매부가 있는 영양위집이 좋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헌데, 이곳에서 살육이 벌어졌다. 피가 튀고 살이 튀었다. 거의 매일같이 봤던 신하들이 보이지 않는다. 환관들이 전하는 얘기로는 그들의 얼굴이 저자거리에 걸려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한다. 무섭다.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떠나다니요?"
"흉몽에 시달리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제발 여기를 떠나게 해주시오. 숙부!"

이건 하명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고 애원이다. 그동안 임금은 유명을 달리한 신하들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비명횡사한 노신(老臣)들의 목소리가 들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창덕궁 공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영양위 정종 집을 나와 경복궁 충순당으로 들어간 임금은 거기에서도 흉몽과 환청에 시달리어 함원정으로 이어했다.

경복궁에 있다
▲ 함원전 경복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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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청에 지휘본부를 설치한 수양이 참모들을 소집했다.

"전하는 내가 모시고 있다. 다음 계책을 말하라."
"정난은 편안할 정(靖)자를 쓰고 어려울 난(難)자를 써서 정난(靖難)이라 부르고 나라의 위난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배웠습니다. 아직 편안하지 않습니다."

권람의 표정이 무거웠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혁명은 성공했을 때 혁명이지 실패하면 반역이 됩니다. 우리의 거사를 성공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한명회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결의를 다졌다.

"북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우리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수양이 핵심을 짚었다. 함길도에는 이징옥이 있다. 철령 이북과 차현 이남은 배역의 땅이라고 옛사람들이 그래왔다. 함길도가 그 중심에 있다. 함길도가 공연히 의심받는 것만도 아니다.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동북면 지휘사가 된 이성계가 혁명의 꿈을 키웠던 곳이 함길도다. 그곳 진영을 찾아간 정도전이 '이만한 군대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라고 부추겨 결국 혁명에 성공했다. '나는 했지만 너는 하지 말라'는 경구가 유효한 곳이다.

내가 하면 구국의 결단, 남이 하면 반란

이징옥은 무예가 출중한 정통 무장으로 김종서 휘하에서 잔뼈가 굵었다. 육진 개척에 무공을 세워 김종서 후임으로 절제사에 올랐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하여 백성들의 신망이 두텁다. 하지만 그는 병장기를 밀반출하여 안평에게 보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최대의 관건이다.

"명만 내려주시면 이징옥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홍달손이 팔을 걷어 부치고 앞으로 나섰다.

"맞부딪치면 서로가 피를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우리가 받습니다. 최선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권람이 제동을 걸었다.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 순서를 역으로 돌리면 번잡하고 공연한 원망을 듣게 됩니다. 우선 새로운 절제사를 임명하여 내려 보내고 이징옥을 불러올린 다음에 극변에 안치했다 목을 따면 됩니다."
"역시 한방이다."

수양이 탄성을 질렀다. 황보인, 이양, 조극관을 해치울 때는 전광석화처럼 격살하고 이징옥은 낚시로 천천히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가히 완급의 귀재다.

"좋다. 한방의 안을 채택한다."

웃음을 잃었던 수양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법도 절차도 없는 즉흥 임면과 살육... "불법도 성공하면 혁명"

상호군 이효지, 선공감정 최중겸, 사선서령 홍연, 부지통례문사 송처검을 의금부 도사에 임명했다. 절차 없는 즉흥 제수다. 수양은 이들에게 지정을 영암에, 정분을 낙안에, 조수량을 고성에, 이석정을 영일에, 안완경을 양산에 안치하라 명했다. 모두 안평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헌데 문제가 발생했다. 하삼도 도체찰사를 명받아 임지로 가고 있던 정분이 중도에서 정변 소식을 듣고 도망가 버리고 충청도 절제사를 제수 받아 부임준비를 하고 있던 지정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도망자를 색출하라 명한 수양은 고삐를 더 죄었다. 요망한 왕실 점쟁이 지화를 베고, 안평과 김종서의 하인들마저 영구히 변방 관노에 붙이라 명했다. 가히 싹쓸이다. 대청소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벌한 시기에 더욱 추위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징석과 김문기다. 이징석은 이징옥의 형이고 김문기는 이징옥이 함길도 절제사일 때 관찰사였다. 이징옥은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심정으로 목을 늘이고 있었다.

치면 당해야 하고 당하면 목이 저자거리에 걸려야 한다. 며칠 전, 명례궁을 찾아가 수양대군 눈도장을 받아둔 것이 절묘한 시간 포착이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나아갈 때와 들어갈 때는 아는 자는 군자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소인.'이라고 성현이 중용에서 설파한 말씀을 잊어먹지 않고 실천한 자신이 군자(君子) 인것만 같았다.

유교경전 사서삼경중의 하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중용 유교경전 사서삼경중의 하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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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사복소윤 구치관, 상호군 송취, 평안우도 도절제사 박호문을 대군청으로 불렀다.

"구치관 너를 지금 이 시간부터 의금부지사로 임명한다. 경성(鏡城)에 가서 도호부사 이경유를 베라."
"예. 알겠습니다."
"송취, 너는 지금부터 의금부 진무다. 함길도에 가 도절제사 이징옥을 압령하여 평해에 안치하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박호문, 너를 지헌대부로 승차한다. 지금 곧 함길도로 떠나 도절제사 직을 수행하라."
"예. 곧 떠나겠습니다."

평안우도 도절제사로 있던 박호문은 부인의 병으로 조정의 유시를 받고 한양에 와있었다. 잠시 들른 한양에서 함길도 도절제사를 명받고 떠난 것이다. 이것이 아내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지방 정치의 양 날개, 관찰사와 절제사의 함수관계

저승사자를 함길도에 떠나보낸 수양이 비밀리에 형조참판 김문기를 불렀다.

"함길도 얘기를 듣고 싶소?"

부탁 같지만 명이다. 답변 여하에 따라 목이 날아갈 수 있다. 관찰사와 절제사는 지방 정치의 양 날개다.

"지난 가을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때, 도적이 절제사 군영 창고 북쪽 벽을 헐고 침입하여 병장기를 훔쳐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징옥이 꼼꼼하고 까다로운데 병장기를 도둑맞은 일에는 부하들을 추문하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밖에는 들은 바 없습니다."
"정말이오?"
"결백합니다."
"이징옥이 병장기를 한성으로 빼돌린 것을 관찰사가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 되오?"

수양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도난이 아니라 밀반출이라는 것이다. 관찰사는 임금을 대신하여 제찰사를 감시할 권한이 있다.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할 의무도 있다. '은폐하지 않느냐?'는 추궁이다.

관찰사가 행정을 맡는 다면 제찰사는 군대를 쥐고 있다. 관찰사도 휘하에 도사와 중군, 판관을 두고 있지만 그 병졸은 행정을 위한 소수의 군사이고 정예 전투병은 제찰사가 지휘한다. 특히 함길도는 특수 지역이다. 야인들이 두만강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기 때문에 빈번하게 전투가 벌어졌다. 세종 때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했지만 아직도 위험지역이다. 보통의 지역은 종2품 관찰사가 정3품 제찰사에게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함길도는 제찰사의 영향력이 크다. 감시하고 견제하기가 매우 곤란한 지역이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믿어도 되겠습니까?"

김문기는 부왕 세종보다 두 살 적은 노신(老臣)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출사한 김문기는 사간원에서 능력을 인정 받은 강직한 신하다. 믿고 싶다. 하지만 이징옥과 엮여있다면 용서할 수 없다.

"믿어 주십시오."

김문기로서는 더 할 말이 없다. 개관적으로 증명할 증험이 없다. 답답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좋소. 단, 징옥과 연루되었다면 나라를 속인 죄, 나를 속인 죄, 삼족을 멸해도 여한이 없겠소?"

수양의 눈빛이 매서웠다.

"없습니다."
"알았소. 돌아가시오."

돌아가는 김문기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산에서 구르는 돌이 어디로 튈지 모르듯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징옥이 물귀신작전을 쓸 수 있고 제3의 인물이 걸고 들어갈 수도 있다. 사건이 확대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쓸려 내려갈 수 있다. 허나, 한 가지 믿음은 있었다. 한명회의 은밀한 통문을 받고 수양을 만난 것이 유효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튿날. 형조참판 김문기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발 빠른 처신이다. 명분은 사위가 임중경을 때린 구타 사건이었지만 속내는 수양의 복심을 읽고 자숙에 돌입한 것이다.

김문기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신에 들어가자 우사간(右司諫) 성삼문이 포문을 열었다. '병장기를 빼내는 것을 알면서도 덮어주었으니 왕법으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피바람을 부르는 스산한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주 2회 연재됩니다.



태그:#수양대군, #함영회, #이징옥, #성삼문, #김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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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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