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물 뿜는 고래 그림(장생포 고래박물관에서)
 물 뿜는 고래 그림(장생포 고래박물관에서)

예로부터 한국인은 '술고래' '고래심줄' '고래등 같은 기와집' 따위의 말을 즐겨 써왔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도 있는데, 실제로 새우는 고래가 즐기는 먹잇감이기도 하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고래 관련 지명이 남한에서만 확인되는 것으로 180개에 이른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고래를 비늘이 없다고 해서 무린류(無鱗類)에 분류하고 따로 경어(鯨魚)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고래를 물고기로 간주한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일찍이 기원전 4세기에 고래를 포유류로 분류해 놓은 바 있다. 조선 성종 때 최부가 쓴 <표해록>에는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고래를 만난 근세인의 공포감이 실감나게 나타나 있다. 이 장면을 소설로 각색한 지문을 통해 읽어 본다.

"배는 서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최부는 갑판에 나와 서 있었다. 멀리 물결 사이로 알 수 없는 물체가 가물거리더니 차츰 그 형체를 드러냈다. 흑 빛을 띤 괴물체는 그 전부의 크기를 한눈에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수면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긴 행랑 같아 보였다. 괴물체는 하늘로 거품을 내뿜고 있었는데, 거품 주위로 파도가 나부끼고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초공 김고면이 적당한 크기의 소리로 말했다. '저것은 고래인데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은 배를 뒤엎습니다.'" - 김갑수 졸저 <오백년 동안의 표류> 중에서

한국인과 매우 친숙했던 고래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 편'에는 울산 인접의 동해를 따로 '경해(鯨海)'라고 표기해 놓았다. 이 일대에 고래가 유달리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송강의 <관동별곡>에는 동해 망양정 앞바다의 파도를 묘사하면서, '가뜩이나 성난 고래를 누가 놀라게 했기에 불기도 하고 뿜기도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라고 비유한 구절이 나온다.

이런 기록들에는 고래의 거대한 몸체에 대한 외경(畏敬), 고래가 물을 뿜는 것에 대한 신기함 등이 들어 있다. 물론 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몸체를 가진 동물이다. 대왕고래의 경우 최고 50미터의 길이에 190톤의 무게까지 나가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래가 물을 뿜는다는 것은 실상과 약간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고래는 허파로 호흡하는데 숨을 분기할 때 폐 속에 있던 따뜻한 공기가 해수면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면서 수증기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먼 데에서는 마치 물을 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쓰는 말 '고래'는 바로 이 물을 뿜는 기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고래의 어원은 '골짜기(谷)에서 물을 뿜는 입구'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다.

AD 77년 로마의 플리니우스(Gaius Plinius)는 <박물지>에서 고래를 물고기에 분류했는데, 서양에서는 이것을 약 1600년 동안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1758년 박물학자 샤를 드 린네(Charles de Linne)가 <자연의 체계>에서 고래를 포유류로 단정 짓는다. 고래는 외형상 물고기인 것 같지만 따뜻한 혈액, 소화기관, 호흡기관, 생식방법 등으로 보아 포유류로 분류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고래 사이의 '근연성(近緣性)'이다. 고래는 모성애와 가족애가 강하다. 출산을 하고 새끼에게 두 개의 젖꼭지로 젖을 먹인다. 어미고래는 인간의 작살에 죽어가는 새끼고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이때 아비고래도 필사적으로 주변을 맴돈다. 고래는 동료 간 우정도 각별하다. 그들이 청각적인 의사소통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점도 인간과 닮은 것이다.

암각화 확대 사진. 총 290여 개 중 46개가 고래 그림이다.
▲ 암각화 암각화 확대 사진. 총 290여 개 중 46개가 고래 그림이다.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많은 고래가 육지와 가까운 연안에 서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일찍부터 고래와 상접해 왔다. 지금도 울산 장생포와 구룡포, 그리고 포항의 다무포 등에서는 매년 고래맞이 축제가 열린다. 충남 공주군 석장리 구석기시대 주거지에도 고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런 사실들은 고래가 한국인의 중요한 생활문화전통과 관련됨을 증언하는 것이다.

지구에서 존속되어 온 고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것이 짧다. 고래가 지구에 출현한 것은 5000만~3000만 년 전이다. 공룡의 뒤를 이어 육상동물의 왕자였음직한 고래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다로 갔다. 물론 생물이 서식지를 옮기는 것은 거의 기후 변화 때문이다.

고래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앞다리는 지느러미로, 뒷다리는 근육질의 꼬리로 진화하면서, 수직면의 일반 물고기와 다르게 수평면으로 자리를 잡는 바다짐승이 되었다. 이후 고래는 유구한 세월 동안 바다 생태계 먹이사슬의 정점 생물체로서 지위를 누려 왔다. 반면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아무리 길게 잡더라도 30만 년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시대는 고래의 시대에 비해 100분의 1도 안 되는 것이다.

인간과 고래, 극화된 근연(近緣)과 적대(敵對)

일제 강점기 최대의 포경 전진기지였다.
▲ 장생포 일제 강점기 최대의 포경 전진기지였다.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인간과 고래는 6000년 동안 근연과 적대의 관계를 맺어 왔다. 물론 고래가 인간에게 의도적으로 근연성을 보였다는 실증적인 역사 기록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설화나 민담에서는 인간과 고래가 친밀하게 만난 사건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설화 <연오랑세오녀>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것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즉위 4년(157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미역을 따러 나갔다가 신발을 벗고 바위섬에 올라섰는데, 갑자기 바위섬이 움직여 일본으로 가게 된다.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그를 신이 보낸 비범한 인물로 여겨 왕으로 섬긴다. 한편 세오녀는 남편을 찾아 바닷가에 나갔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는 바위섬에 오른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바위섬이 움직여서 세오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연오랑과 세오녀를 일본으로 실어 나른 바위섬은 다름 아닌 고래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그리고 마치 바위처럼 연안에 의뭉스럽게 자리 잡고 있던 그 물체는 한국인과 친숙했던 귀신고래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연오랑세오녀> 설화에는 인간과 고래의 근연성이 소박하게나마 극화되어 나타나 있다.

서양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더러 전해진다. 아일랜드의 한 수도사가 바다로 나갔는데, 부활절에 고래가 나타나 자신의 등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오래 동안 물 위에 떠 있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역시 고래가 인간에게 선의를 베풀어 준 사례에 해당한다. <바이블> '요나서'의 요나가 야훼의 징벌로 물속에 던져져 고래 뱃속에서 3일 동안 체류함으로써 목숨을 건진 이야기는 더 유명하다.

암각화 절벽이 있는 계곡으로 가는 다리
▲ 반구대 다리 암각화 절벽이 있는 계곡으로 가는 다리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한국의 현대문학에서 고래와 관련된 것은 몇 개밖에는 없다. 윤대녕의 소설 <풀밭 위의 점심>에는 장생포 전직 고래 해부장의 딸 수연이 등장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래들이 가끔 해안으로 몰려와 죽어."
수연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원래는 고래가 육지에서 사는 동물이었대. 그래서 육지가 그리워 몰려왔다가 바다로 돌아갈 때를 놓쳐 죽는다는 거야. 오늘 아침에도 영덕 강구 앞바다에 여덟 마리가 몰려와 죽었다나 봐."

수연의 말처럼 고래가 해안에 몰려와 죽는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고래의 집단 자살을 놓고 그동안 견해가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청각이 유달리 예민한 고래가 군함에서 내는 음향탐지기(소냐)의 괴성에 시달려 판단력을 잃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편 위 지문이 삽입되어 있는 소설 <풀밭 위의 점심>은 사실 고래와의 관련성은 거의 없다. 정확히 말해서 왜 고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한 소설 같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두 청년과 한 여자는 암각화가 있는 반구대를 경유하여 인근 천전리 각석을 보러 갔다가 풀밭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는 여자가 뜬금없이 옷을 벗고는 나체로 두 남자와 사진을 찍는다는 아리송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세속성이 무질서하게 극화된 소설로 읽었다.

한편 천명관의 소설 <고래>도 정작 고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 소설은 고래가 아닌 벽돌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한다. 다만 작가는 이 소설에서 고래를 가지고 모종의 진지한 의미를 형성해 보려는 노력을 보인다. 고래 형상을 닮은 극장을 지은 여주인공 금복과 관련된 지문을 읽어 보자.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 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 천명관, <고래> 중에서

여기에서 여주인공 금복이 고래를 통해 보았다는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와 금복이 여자를 버리고 남자가 되는 인과적인 사건 설정을 어떤 의미 맥락으로 읽어야 하는지 필자의 능력
으로서는 논리화하기가 어렵다.

"'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 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 위의 책, '작가 인터뷰' 중에서

이 인터뷰에서 천명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설 속 서술자의 말, 즉 고래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큰 것에 대한 선망'을 부인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가 작가로서 말한 '거대한 것의 비극성'이라는 구절은 소설의 인물 금복이 아니라 필자 글의 논점인 고래에 대해서는 부합하는 것 같아서 인용해 사용하기로 한다.

천명관의 장황한 소설 <고래>에서 '고래'의 의미는 소설과 달리 매우 간명하다. 그것은 작가 말대로 '거대한 것의 비극성'이다. 주인공 금복은 비정상적으로 몸집이 크다. 그런데 인간은 근대 이후 몸집이 거대한 고래를 무수히 사살하고 처치했다. 고래의 비극은 제국주의의 발호와 함께 전개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해군력의 증강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몸집이 큰 데다 바다에 사는 고래에게 비극이 닥친 데에는 필연성이 있어 보인다. 특히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즈음한 시기에 인간이 고래에 보인 적대성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잔학성을 띠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계간지 <문학바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래이야기, #연오랑세오녀, #표해록, #오백년동안의 표류, #김갑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