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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일 무렵 진통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조로운 진행이었지만 "아직 멀었어요. 더 있어야 해요"라며 홀로 방치되었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 수술실을 겸한 커다란 방 한쪽, 평평한 분만대에 누워 진통촉진제를 맞았고 간호사가 내 배에 올라타 아이를 밀어내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때의 감정을 말로는 잘 표현할 수가 없다. 경악과 공포, 그리고 이제껏 맛본 적 없는 비애라고나 할까. 아이를 낳았다는 감동 따위는 없었고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출산 당시 찢어진 음부가 몹시 아팠고 젖이 탱탱 붓는 고통에 괴로웠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이 낳는 게 다 그렇지 뭐. 어쩔 수 없어'라고 체념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출산할 때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천장을 보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이상해', '음부와 유방이 아프지만 않아도 산후 고통이 10분의 1로 줄어들 텐데', '아기에게는 엄마 젖을 물려야 해'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에서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 겉그림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 겉그림
ⓒ 브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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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기를 낳는 여성들이 겪는 고통들이다. 대부분의 산모들은 이 같은 고통들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다들 그러니까, 어떤 출산이 산모와 아기에게 가장 바람직한지 몰라서, 의사가 그렇게 해주니까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니,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고통들이 중복되고 쌓여 우울증까지 앓을 지경에 이르러도 일단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이야길 들어 보면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그렇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이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출산의 고통을 줄일 수는 없는 것일까?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오오노 아키코 저, 브렌즈 펴냄)은 한 산부인과 의사가 '어떻게 낳을까 고민하는 예비엄마들에게 전하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포토에세이'다.

저자는 출산을 경험한 의사. 그런데 일반적인 의사와 많이 다르다. 처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작정하고 의학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의사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이처럼 출산을 경험, '어떻게 하면 출산의 고통을 줄일 수 있을까? 어떤 방법이 산모와 아기에게 가장 좋을까?'와 같은 이유로 자신의 전공을 버리고 의학을 공부, 의사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 진료소에는 분만대가 없다. 산모는 엎드리거나 누운 상태로 혹은 쭈그려 앉거나 선 자세 등으로 낳는다. 산도는 골반의 곡선을 따라 부메랑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다. 아기는 이 산도를 돌면서 내려온다. 선 자세는 중력을 받아 아기를 낳는 방법이다. 하지만 반듯하게 누워서 낳으면 중력에 반해 아기를 낳게 된다. 분만대에 누워 낳는 것이 생리적으로 불리한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서서 낳는 것이 출산의 생리와도 맞는다.

누워서 낳지 않는 출산이 정말로 좋은 건, 엄마 몸에서 머리만 나온 아기의 표정을 만날 때. 아기는 엄마의 산도를 돌면서 내려온다. 출구에서 아기 얼굴은 엄마 등 쪽을 향한다. 그래서 분만대에 누워서 출산을 하면 아기는 바닥을 보며 나오게 되고, 그러면 아기의 표정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분만을 하면 아기가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고 나온다. 먼저 이마가 보이고 눈, 코, 뺨 순으로 조금씩 천천히 엄마의 회음을 미끄러져 나온다. 그러곤 입이 보이고 턱이 나온다. 부드러운 뺨이 살짝 걸렸다가 나오는 아기도 있어 무척 귀여우면서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머리가 나오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아기도 있고 "응애!"하고 우는 아기도 있다. -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에서

'출산 진찰'은 곧 내진을 의미? 내진 없이도 건강한 출산 가능!

자연분만 과정으로 아기가 세상에 막 나오는 그 순간이다. 지금과 달리 가정 분만이 많았던 1960년대 태어난 나도 아마 이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까?
 자연분만 과정으로 아기가 세상에 막 나오는 그 순간이다. 지금과 달리 가정 분만이 많았던 1960년대 태어난 나도 아마 이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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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막 태어나는 아기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오래 전에 출산을 두 번이나 경험했음에도 처음 알았다. 아기가 엄마의 등 쪽을 보고 나온다는 사실을. 

출산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출산의 현장을 쉽게 알지 못한다. 병원에 따라 배우자나 가족 한 사람을 출산 현장에 있게 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출산의 현장은 쉽게 공개되지 않는다.

이런지라 사진으로 담기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러기에 아기를 낳는 산모조차 출산 현장 그 모습은 알지 못한다. 세상에 둘도 없을 고통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새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당사자인데도 말이다.

이 책에는 출산의 순간, 즉 아기 탄생 그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 풍성하게 실려 있다. 이런 점에서 무척 독특한 책이다. 그간 살아오면서 읽었을 수천 권의 책 중 이 책의 사진과 내용들이 가장 독특한 것 같다.

'출산 진찰은 곧 내진'이라는 논리가 있는 것 같다. 출산 경과를 진찰할 때 내진은 유용한 방법이지만 내진을 하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의원에서는 내진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조산사는 물론 의사인 나도 일상적인 내진은 하지 않는다. 되도록 내진을 하지 않고 출산 진찰을 하고 있다. 출산 진찰이란 분만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현재 어떤 상태인지, 태아는 건강한지, 언제쯤 아기가 나올 것 같은지 등 상황을 종합해 그 출산이 정상적인 경과를 보이는지 또는 걱정스러운 징후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중략)우리가 일상적인 내진을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상적인 분만 경과를 이외의 정보로 추정할 수 있어 내진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또 내진은 임신부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부주의한 내진을 몇 번씩 반복하다가 자궁 내 감염증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따라서 내진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한다. -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에서

태어나 머리조차 감지않은 막 태어난 아기다.
 태어나 머리조차 감지않은 막 태어난 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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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나 젖을 빨고 있는 아기다
 갓 태어나 젖을 빨고 있는 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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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아기
 갓 태어난 아기
ⓒ 브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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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여성들끼리 산부인과 관련 이야길 하다보면 여성의 생식기 안에 손가락을 넣어 진찰을 하는 내진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심지어는 내진 후 피가 비치거나 냉이 심해지는 등으로 고생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임산부라고 다를까. 필자 역시 두 번의 출산 경험이 있기에 내진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지라 둘째를 가졌을 때는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여의사를 선택했다. 여의사의 내진도 유쾌하진 않지만 그나마 좀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경험이 많은 의료인은 진통이 시작되어 입원하러 온 임신부와 두세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또는 임신부의 모습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임신부의 정서 상태를 파악하는 정도로 분만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단다. 내진을 하지 않고도 말이다. 

필자가 출산을 한 1990년대 초중반 무렵만 해도 "초음파가 아기에게 그다지 좋지 않다. 초음파 진단시 탱크가 지나가는 정도의 소음을 느낀다"며 초음파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의사들이 많았다. 내가 선택했던 의사들도 그랬다. 

하지만 요즘에는 산전 진찰 때마다 초음파는 기본이라고 한다. 초음파와 같은 첨단 의료기기들 덕분에 자궁 안에 있는 아기의 몸 어디가 유난히 크고 작은 것까지, 그 부위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까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내진이 꼭 필요한 걸까? 저자의 병원처럼 내진을 가급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안전한 출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10년 전에 개원한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는 1500명 남짓. 임신 중이나 분만 시 다른 병원 이송률은 4%, 이중 제왕절개를 한 경우가 전체의 2%. 이밖에 분만 당일 예상치 못했던 신생아 이송이 1%, 골반위 분만(아기가 다리부터 나오는 분만)에 의한 제왕절개가 단 두 건뿐이란다.

내 딸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한국의 출산 환경도 이처럼 바뀌길

둘째였지만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루한 밤이 지나고 해가 높이 떠올랐을 무렵 드디어 아기가 나왔다. 탈진했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책속 사진 설명이다. 막 출산한 산모임에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왼쪽이 산부인과 의사인 저자.
 둘째였지만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루한 밤이 지나고 해가 높이 떠올랐을 무렵 드디어 아기가 나왔다. 탈진했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책속 사진 설명이다. 막 출산한 산모임에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왼쪽이 산부인과 의사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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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풍성하게 만날 수 있는 생명 탄생, 그 순간이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한편 출산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책속에서 풍성하게 만날 수 있는 생명 탄생, 그 순간이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한편 출산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 브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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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잊혀지지 않을 그런 사진이다. 둘째임에도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탈진까지 한 이 산모는 그럼에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이 산모의 모습에서 출산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닌, 행복하고 아주 특별한 만남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연스런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처럼 여타의 책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특별하고 인상 깊은 사진을 비롯 여성 혹은 예비부부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풍성한 책이다. 저자는 여성으로서, 의사로서 그간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아기를 어떻게 낳는 것이 좋은가? 자연분만이 왜 필요하고 어떤 점들이 좋은가? 모유수유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기와 만나야 하는가를 알려줌과 동시에 바람직한 출산 현장과 환경을 제시한다.

분만대도 없고, 제왕절개를 하지 않고, 내진도 가급 하지 않는 산부인과. 남편과 큰 아이 등 가족과 함께 진통을 이겨내며 하는 출산. 모유 수유율이 98%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의사와 간호사….

책을 통해 만나는 이와 같은 출산 현장과 산모들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하루빨리 우리의 출산 현장이 책속의 현장처럼 바뀌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출산 현장을 개선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듯한 그런 책이다. 산모 우울증을 줄이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해주리라.

소중히 간직했다가 먼 훗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내 딸에게 꼭 주고 싶은 책이다. 또한 내가 아는 누군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그(녀)에게도 꼭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다. 소중한 아기를 가장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놀라운 아기 탄생의 순간>(오오노 아키코 씀ㅣ미야자키 마사코 사진ㅣ이명주 옮김ㅣ브렌즈 2010년 12월ㅣ15,000원)



태그:#출산, #임신, #자연분만, #신생아, #브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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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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