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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내 재산 내 모든 것을 함께 묻어 주시고... 아버지, 어머니의 묘에 묻어 주시오."
"내가 죽거든 태우지 말고 묻어 주오. 난 재가 되고 싶지 않단 말이오..."
"친구들아, 네가 왕따시켜서 너무 속상하고 괴로웠어. 다음 생에 만나자!"

어린이와 청소년이 입관의식을 가진 후 쓴 유언장의 일부이다.

지난 여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19명이 '죽음'이라는 주제 아래 총 9회의 모임을 가졌다. '죽음'이 주제라고 해서 죽음 이야기만 한 것 같지는 않고, 삶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간의 작업을 모아 <나의 장례식-상여와 꼭두 이야기로 풀어본 나>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마련했는데, '장례식'에 걸맞게 지하에 꾸며놓은 어둑어둑한 전시장에는 그러니 죽음보다 삶이 더 드러난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섞여 죽음은 더없이 자연스런 일상이고 바로 우리 곁에 머무는 호흡이 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만들어 꾸민 상여
▲ 상여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만들어 꾸민 상여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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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현재의 나 알기>로 시작해 <미래의 나의 모습 떠올리기>, 그리고는 <죽어서 가는 길(상여스케치, 꼭두 제작, 상여 제작)>이 이어졌고, <나의 장례식인 입관의식> <기억의 함 속에 죽음의 세계를 색으로 표현하고 남기고 싶은 추억이나 물건 담기> <유언장 작성> < 지금, 여기에서 -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것 표현하기>로 마무리를 하였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도 특별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교육 수요자'로서 그냥 단순히 수업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공공미술 참여자', 즉 '작가'의 한 사람으로 각자 자기 방식대로 표현을 했고 또한 그것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아이들을 데리고 죽음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려움이나 주위의 거부감은 없었을까. 교육을 맡아 진행한 것은 물론 이번 전시 기획의 총책임자인 유성이 큐레이터(서울닭문화관 기획관리팀장)는 "물론 처음에는 주변 어른들의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진행과정에서 혹시라도 상처가 될 수 있는 부분을 고려해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했다"며, "진행하다보니 오히려 아이들 스스로가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놀랍게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죽음을 대하는 장난꾸러기들의 태도는 어땠을까. 다시 유성이 큐레이터의 말. "프로그램이 장난스럽지 않으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특히 입관의식을 할 때 차분하게 호기심과 진지함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순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전시장에서 입관체험을 하고 나서 소감을 쓰는 모습
▲ 입관체험 후 소감쓰기 전시장에서 입관체험을 하고 나서 소감을 쓰는 모습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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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직접 만든, 상여를 장식하는 꼭두 인형들
▲ 꼭두 인형들 아이들이 직접 만든, 상여를 장식하는 꼭두 인형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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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는 아이들이 그간에 해온 작업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를 해놓았는데, 특히 한가운데에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꾸민 상여가 놓여있는데 상여 아래 쪽에는 관이 들어있어 원하면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입관의식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입관체험 후의 느낌이나 기분, 남기고 싶은 말을 적어 봉투에 넣고 주소를 써두면 전시회가 모두 끝난 후 집으로 직접 우송해 준다고 한다.

전시회의 주인공들인 어린 작가들을 붙잡고 말을 좀 나눠보려 하니, 전시작 구경에 친구들과 노느라 바빠 건성 대답이다. 입관체험도 '재미있었어요! 깜깜했어요! 졸렸어요! 덥고 답답했어요!'가 전부였다. 기억의 함에 뭘 넣었냐고 해도 씩 웃으며 "몰라요!"하고 도망가버린다.

죽음의 세계를 색으로 표현하고, 남기고 싶은 추억이나 물건을 담는 기억의 함
▲ 기억의 함 죽음의 세계를 색으로 표현하고, 남기고 싶은 추억이나 물건을 담는 기억의 함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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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꼬치꼬치 느낌을 묻는 내가 잘못이다. 그때 그때 느낀 그대로를 마음 놓고 표현해 보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니겠니. 죽음이라고 해서 뭐 별다르겠니.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네게 다가왔을 때 눈 크게 뜨고 마주하렴, 아마도 이번 작업이 그런 힘을 가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거다...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며 작품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엣말을 했다. 그러면서 어느 덧 6년을 꽉 채워가는 어르신죽음준비교육 프로그램에 이런 공공미술 방식을 접목해 볼 수는 없는지 궁리에 들어간다. 과제를 안고 지하 전시장을 빠져나오니 눈부신 가을햇살이 눈을 찌른다.

어린 작가들과 부모, 관계자들이 박물관 앞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는다. 슬쩍 끼어들어 셔터를 누르는데, 에너지 넘치는 이 녀석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한다. 겨우 찍었다.

어린이와 청소년 작가들과 부모, 박물관 관계자들
▲ <나의 장례식> 기획전 참가자들 어린이와 청소년 작가들과 부모, 박물관 관계자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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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야기를 감추거나 피하지 않고 드러내놓으니, 어른들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알 수 있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 표현을 통해 그동안 혼자 품고 있던 것들을 서로 나누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죽음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와 맞붙어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죽음이 아이들에게 가니 아이들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엉뚱함에 힘입어 새롭다. 그렇다고 갑자기 죽음이 밝음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저 아이들의 밝음은 그 자체로 죽음과 조화를 이루며 우리들 삶의 한 줄기로 자연스럽게 섞여든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느낌도 어린아이들의 생기(生氣)에 힘입어 무겁지 않게 담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을 오후, 박물관 바깥 벽에 걸린 포스터 아래쪽에는 아이들이 타고와 세워둔 자전거들이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회동 언덕길을 어서 달리고 싶어 하면서...  

어린작가들이 타고온 자전거들...
▲ <나의 장례식> 기획전 포스터 앞에서 어린작가들이 타고온 자전거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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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공공미술 <나의 장례식> 기획전(~ 10월 30일까지 / 서울닭문화관 www.kokodac.com / 02-763-9995)



태그:#나의 장례식 기획전, #서울닭문화관, #죽음, #죽음준비,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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