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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때였다. 우연히 시골집 장롱을 열어봤다. 안에는 여러 종류의 이불과 베개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누비이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목화솜을 넣은 두꺼운 솜이불이었다.

 

이게 언제적 이불일까? 어머니께서는 30년은 족히 됐을 거라고 하셨다. 30년이라면 1980년 이쪽저쪽이란 얘기. 그 긴 세월을 장롱 속에서 추억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니.

 

그 시절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왔다. 나 어릴 적, 1970년을 전후해 이 누비이불을 덮고 살았다. 누비이불은 정말 푹신푹신했었다. 추운 겨울밤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보온력을 발휘했다.

 

당시 겨울밤은 무지 추웠다. 지금처럼 난방시설이 잘 된 것도 아니었다. 아랫목만 뜨끈뜨끈할 뿐 찬기운이 방안을 감돌았었다. 하지만 누비이불 속으로 파고들면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이불이 무거운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 이불은 우리 형제들의 도화지이기도 했다. 돌아가면서 지도를 여러 번 그렸다. 특정 지역의 지도는 물론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지도까지 그렸다. 하지만 아무리 잘 그려도 칭찬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키를 뒤집어쓰고 소금 동냥을 나가야 했다.

 

한 번 그린 지도는 쉽사리 지워지지도 않았다. 이불에 솜이 가득 들어 있어 두꺼웠고 무거웠다. 물로 빨 수도 없었다. 빨더라도 하루 만에 마를 수도 없었다. 그날 밤 다시 덮어야 했기에 빨아서도 안 됐다.

 

오로지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말리는 게 최선이었다. 하루 햇살에 뽀송뽀송 말려 그날 밤 다시 덮곤 했었다. 그렇게 한 이불 속에서 식구대로 잠을 자며 살았다. 요즘 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아토피 같은 것도 없었다. 건강생활 그 자체였다.

 

누비이불의 속재료가 됐던 목화는 그 시절 지천이었다. 집집마다 목화를 심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딸자식이 많은 집은 목화를 더 심었다. 당시 목화솜을 넣은 이불은 혼수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목화는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이 목화는 동네 아이들에게 군것질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목화 열매인 다래는 훌륭한 주전부리였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들르는 목화밭은 '참새의 방앗간'에 다름 아니었다. 밭두렁에 서서 따먹던 다래 맛은 떨떠름했지만 달큼했다.

 

따사로운 햇살에 쩍 벌어진 하얀 솜꽃도 아름다웠다. 갈대나 단풍에 버금가는 가을의 서정을 담아냈다. 목화를 주제로 한 대중가요가 인기를 얻은 것도 그 때였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밤하늘에 별을 보며 사랑을 약속하던 곳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우리들이 헤어진 곳도 목화밭이라네

기약도 없이 헤어진 곳도 목화밭이라네

서로 멀리 헤어져도 서로가 잊지 못한 곳

조그만 목화밭 목화밭"

 

- '하사와 병장'의 노래 '목화밭' 앞부분

 

'목화'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문익점이다. 고려시대 원나라에 갔던 그이가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가지고 들여왔다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이렇게 들여와 재배에 성공, 온 나라에 퍼뜨린 것도 그의 공력이다.

 

그러나 1970년 중·후반부터 목화가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수입 원면과 화학섬유가 들어오면서다. 집집마다 목화솜 대신 화학솜을 넣은 이불로 바꿨다. 그 이불은 가벼웠다. 몸을 감싸주는 맛은 덜했지만 보온효과는 목화솜에 버금갔다.

 

80년대 이후엔 목화밭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장롱을 지키고 있던 목화솜 이불도 버려졌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목화가 차츰차츰 잊혀져 갔다. 교과서에서나 간간이 사진으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기억에서조차도 가물가물한 목화가 지천인 곳이 있다.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천 둔치에 있는 목화공원이다. 10여 년 전부터 겸면사무소 직원과 주민들이 부러 조성한 곳이다. 재배면적이 자그마치 2만㎡나 된다.

 

기성세대엔 추억을 선사하고, 어린이들에겐 자연학습 기회를 주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해서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지금 추억의 목화와 다래, 솜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여기에 지금 목화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꽃도 여러 가지 색깔로 뽐을 내고 있다. 하얀 것도 있고 연노랑색 빨강색 주황색도 있다. 옛날 군것질거리였던 목화 다래도 널려 있다. 다래가 익어 벌어지면서 드러난 하얀 솜꽃도 방글방글 피어 있다.

 

잠자고 있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목화밭이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생각나도록 해주는 곳이다. 아이들도 책에서만 봤던 목화를 직접 만져보며 마냥 신기해 한다. 가을 분위기도 목화밭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덧붙이는 글 | ☞ 겸면 목화공원은 호남고속국도 옥과나들목에서 가깝다. 옥과나들목으로 나가 좌회전, 곡성읍 방면으로 3㎞ 가면 순창과 곡성으로 갈라지는 평장삼거리 나온다. 여기에서 곡성읍으로 방향을 잡고 오른쪽을 보면 겸면천이 보인다. 이 천변 둔치에 목화밭이 펼쳐져 있다.


태그:#목화, #목화다래, #목화솜꽃, #목화공원, #목화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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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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