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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의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 호수. 눈이 시리도록 파란 물빛이 인상적이다.
▲ 산정 호수 오리건의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 호수. 눈이 시리도록 파란 물빛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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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잠깐 악수에 응하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빼 두 팔로 내 등을 감쌌다. 포옹을 하는 거였다. 9월 9일 LA공항에서였다. 우리 부자는 남세스러워 평소 포옹을 잘 하지 않는다. 지난 10여 년 둘이 공항에서 헤어지고, 만난 게 대략 스무 차례는 될 것이다. 그러나 포옹다운 포옹을 한 기억은 없다. 아들이 초등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또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뭉클하고, 복잡한 감회가 순간 일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해안도시 크레슨트 시티의 공원에 놓여진 절단된 레드우드. 레드우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의 한 종류이다. LA로 돌아오는 길은 아들이 좋아하는 바다를 끼고 있는 1번 퍼시픽하이웨이를 탔다.
▲ 레드우드 캘리포니아 북부의 해안도시 크레슨트 시티의 공원에 놓여진 절단된 레드우드. 레드우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의 한 종류이다. LA로 돌아오는 길은 아들이 좋아하는 바다를 끼고 있는 1번 퍼시픽하이웨이를 탔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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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한달 반에 걸친 우리 부자의 미국 자동차 여행은 미국 LA공항에서 그렇게 '공식적'으로 마감됐다. 다 큰 아들과 헤어지는 게 슬프거나 안타까운 일일 수 없다. 아들을 외국에 혼자 떼어놓고 오는 게 실제로 요즘 세상엔 별스런 일도, 유난을 떨 일도 아니다. 그러나 공항에서 아들과 내가 헤어진 것은, 내게 단순히 달포에 걸친 여행이 끝나고 서로 떨어지게 됐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나의 귀국은 물리적으로 엄마가 없는 상태에서 키워온 아들과의 8년 이국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한 해안. 캘리포니아 북부와 이어지는 오리건 주의 앞바다는 미국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곳으로 원시 바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 시원의 바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한 해안. 캘리포니아 북부와 이어지는 오리건 주의 앞바다는 미국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곳으로 원시 바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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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뭔가 찌릿하고 또 조금은 울컥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내 중년의 10년 남짓한 세월이 먼지처럼 한동안 흔적으로 여기저기에 남아있겠지, 하고 생각하니 이런저런 기억들이 연달아 아스라하게 물결처럼 밀려왔다.

아들이 오리건 주와 캘리포니아 주 경계 인근의 한 야영장에서 침낭을 싸고 있다. 달포에 거친 야영 생활로 텐트치고 침낭 꾸리는데는 선수가 됐다.
▲ 침구 정리 아들이 오리건 주와 캘리포니아 주 경계 인근의 한 야영장에서 침낭을 싸고 있다. 달포에 거친 야영 생활로 텐트치고 침낭 꾸리는데는 선수가 됐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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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는 나의 미국 생활은 아들과 함께 한 8년 남짓과 온전히 중첩된다. 그 8년 남짓한 시간, 내 머릿속과 가슴을 지배한 것은 아들이었다. 아들 또한 반대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들과 나의 질긴 인연은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한 바위에 남겨진 화석처럼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에 선연하게 각인됐다. 선천적으로 너무도 다른 우리 두 사람이기에 그 각인은 서로에게 격려와 사랑의 메시지가 아니라, 대부분 상흔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조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막상 끝낸다고 하니, 좀 섭섭하기도 한데요" 오리건 주를 관통, 캘리포니아로 이어지는 5번 주간 고속도로에서 아들은 끝나가는 여행이 아쉽다고 했다. 매일매일 짐을 풀고 싸기를 거듭하는 유랑 여행이 아들에게 성격상 그다지 편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을 나타내는 걸 보면, 동반자인 아비가 썩 불편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 때는 "아버지 때문에(혹은 아버지가 있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는 아들이었다.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5번 주간 고속도로의 티혼 패스 인근 구간. 달포의 여행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는 길, 우리 부자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 LA 코앞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5번 주간 고속도로의 티혼 패스 인근 구간. 달포의 여행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는 길, 우리 부자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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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뒤돌아 보니, 지난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아들에게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다. 아무 주제나 얘기를 조금만 진행하다 보면 견해를 달리하거나, 언쟁으로 이어지기 일쑤인 우리였다. 집에서 아들과 함께 하는 날이면,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속이 뒤집어졌다. 그래서 화가 나면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더 큰 불화를 피하기 위해 아들에 대해서만은 화를 눌러두려 애를 써온 편이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아마 아들도 똑같았을 것이다.

헌데 3주가 조금 못 되는 둘 만의 여행 기간 동안에는 마음 속에서 아예 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한달 반 전, 아들의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여행의 초반부만 해도 화를 몇 차례씩 삭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달포 동안 둘 다 서서히, 그러나 꽤나 많이 변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샌타바버라 항구의 부두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여행도 끝났지만, 10년 남짓한 미국 생활도 접었다. 먹먹한 기분이었다.
▲ 샌타바버라 부두 아름다운 샌타바버라 항구의 부두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여행도 끝났지만, 10년 남짓한 미국 생활도 접었다. 먹먹한 기분이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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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넘는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상처가 달포에 치유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혹은 최소한 미지근한 피가 아들과 나의 심장을 이어주며 흐르기 시작했다는 걸 느낀다. 전에는 전혀 없었던, 혹은 너무 오래돼 기억에 없는 탓에, 생전 처음인 느낌이다. 아들이나 나나 여행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부지불식간에 서로에게 다가가려 애쓴 노력의 대가일 것이다. 달포의 북미대륙 여행이 속된 말로 그런 노력의 '꼭지'를 따준 게 아닐까. 매번 엇나가는 바람에 서로에게 상처만 더 크게 남기고, 영영 이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이제 사라졌다. 


태그:#이별, #LA, #아들, #미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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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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