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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으로 변장했지만 일본인이 틀림없다. 일본인이 조선인처럼 변장한 것은 국모시해공범으로 도피 중이기 때문일 거다.'

명성황후(1851~1895) 시해 이듬해인 1896년 어느 날. 황해도 치하포의 한 여관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을 발견한 한 조선 청년은 이처럼 지레짐작하고 그를 때려죽인다.

<대한유사> 겉그림
 <대한유사> 겉그림
ⓒ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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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청년은 잡혀 수감된다. 그 스스로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공표한 포고문에 자신의 거처를 적어 벽에 붙였기 때문이다.

청년의 나이는 당시 20세. 이름은 김창수였다. 그의 본명은 김창암. 동학에 입도하여 김창수라 개명한 후 활동한 '열혈'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일본 경찰이나 재판관에게 당당하게 밝혔다. '사사로운 원한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조선 청년으로서 조선의 국모를 죽인 것'이라고. 청년은 해주 감옥과 인천 감옥을 오가며 판결을 기다리게 된다.

일본은 어떻게든 청년을 사형시키려고 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런지라 심정적으로는 청년의 편을 들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국모 보수(國母 報讐)'란 죄목으로 사형 재가를 국왕인 고종에게 올리게 된다. 당시 국왕은 여러 사형수에 대한 재가(안건을 결재하여 허가함)를 하고 있었다.

'국모 보수라…. 그럼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것인데…,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야.'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마지막 밤, 그날의 입직승지인 승정원의 한 승지가 '국모 보수'란 청년의 죄목을 보고 어전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문서를 보인다. 이에 고종은 즉시 어전회의를 열고 청년의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한다.

고종은 직접 인천 감리 이재정에게 전화를 걸어 사형을 집행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김창수는 죽기 직전에 목숨을 구했으니 구사일생 주인공 김창수는 훗날 김구(1876~1849)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범이다.

사실 백범은 운이 좋았다. 고종이 인천 감옥에 직접 걸었던 전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외 전화로 기록되고 있는데, 서울~인천 간 전화 개통이 바로 사흘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 전화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1893년경이지만 대중용 공중전화가 선보인 것은 1902년 3월 20일 대한제국통신원이 한성과 인천 사이에 시외전화 한 회선을 개통하면서부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전화가 없었다면 백범은 젊은 나이에 부득이 생을 마감해야만 했을 것이다. 고종이 전화를 걸은 날이 사형 집행 예정일이었던 까닭이다. - <대한유사>에서

당시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다면, 그것도 3일 전에, 시외전화가 먼저 개통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독립 역사는 어떻게 쓰여졌을까. 김구 선생이 사형 직전에 전화 한 통화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 일화는 몇 번을 되생각해도 짜릿한 감동이 몰아친다. 예전처럼 파발마로 어명을 전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목적지 전달까지 하루는 족히 걸렸을 터, 그의 목숨은 이미 끊어진 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화 개통이 사흘만 늦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달라졌을 것 

혹자들에게 김구 선생은 전화 때문에 목숨을 건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전화 한 통으로 김구를 살린 고종은 전화를 적극 이용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고종이 왜 그리 전화를 좋아했을까.

고종은 동구릉에 안장된 대비 조씨의 무덤에 전화로 조석 문안을 드렸는가 하면 당시 '덕률풍'으로 불린 전화로 칙령을 자주 내렸다고 한다. 당시의 관리들이 친러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왕의 명령을 왜곡하기 일쑤였는지라 고종은 신하들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고 고육지책으로 덕률풍을 내려 자주 이용했던 것이다.

이때 철선을 이용한 탓으로 전화 감도가 너무 나빠 통화가 끝날 때까지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상태에서 일손을 멈추었다 한다. 한편 우리는 전화기를 사용할 때 자판을 누르거나 돌리면서도 '전화 걸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전화 도입 초창기의 전화기 사용 관습에서 유래했다. 즉 당시의 자석식 전화기는 수화기를 고리에 '걸고' 손잡이를 돌려 교환수를 찾아야 했는데 여기서 비롯된 표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신호가 갈 때 '뚜우우' 하는 소리와 신호 중일 때 '뚜뚜뚜'하는 소리는 전화가 발명되기 이전 사용되었던 모스 부호에서 나왔다. - <대한유사>에서

여하간 왕의 전화는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어명이나 다름없는지라 아무렇게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직접 알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벨이 울리면 세 번 절한 다음 받는 삼배(三拜)하는 관습을 지켰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화기 일부
 우리나라 전화기 일부
ⓒ 우정사업본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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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은 한국 근·현대사의 서막을 연 사건으로 그 의미가 대단히 크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민주 정권의 출발로서 의미가 깊다. 더구나 이 기간에는 '대한(大韓)'이라는 자주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에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많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힘을 잃었는지, 일본이 어떻게 음모를 꾸몄는지 자세히 살펴봄은 물론 당대의 치열했던 재사(才士)와 모사(謀士)들의 두뇌싸움을 들여다보았다.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그 시대를 비추었으며, 열정에 휩싸인 혁명가와 욕망에 참 모사의 한판 대결 혹은 매국노들 간의 비열한 암투를 세세히 묘사하였다.

또한 정치적 충돌만을 다루지 않고 그때 그 시절의 문화와 생활 풍속을 같이 다룸으로써 현대 문물 유입과정과 옛사람들의 관습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 <대한유사>에서

역사는 골치 아프고 어렵다는 청소년들에게 딱

<대한유사>(살림)는 '갑신정변(1884)~대한민국 정부수립(1948)'의 역사를 김구 선생의 일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는 책이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형식. 50여 꼭지의 우리 역사 이야기마다 이처럼 관련된 것들을 '문화이야기'란 별도의 코너로 연결 지어 들려준다. 고종이 한 통의 "전화를 걸어" 사형을 정지시켰던 이야기 끝에 별도의 코너로 '전화를 걸다'의 어원을 들려주는 것처럼.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우리 근·현대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복잡하게 엉켜 도무지 풀리지 않을 철수세미 같다'며 겁부터 내고 더 이상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외워야 할 이름과 날짜와 사건이 많은지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단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하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는 모두 47꼭지. 잠깐의 틈에 가볍게 읽으며 우리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도록 비교적 짧고 가볍게 썼는데 역사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전화기'나 전화를 걸다'처럼 우리 일상과 연관시켜 들려주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야기들이?
▲ '꼬드기다'라는 말은 연날리기에서 나온 말이다? ▲ '노다지'란 말은 어떻게 나왔을까? ▲ 성냥은 언제 들어왔으며 왜 성냥이라 하는 걸까?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은? ▲ '간에 기별도 안가다'라는 말의 어원은? ▲ 우리나라 최초의 디제이는?

▲ 왜 고려인삼이 유명할까 ▲ 전봉준이 '녹두장군'으로 불린 까닭은 ▲ 최초로 자동차를 탄 민간인은 ▲ 민비? 명성황후? 어떻게 불러야 할까? ▲ 구한말 집집마다 초상 사진을 걸어 놓았던 연유는? ▲ 을사늑약과 관계없는 '을씨년스럽다'유래

▲ 처음으로 명함을 사용한 우리나라 사람은? ▲ 대중목욕탕과 '목간하다'의 유래는 ▲ '해산하다'와 '미역국 먹다'의 어원은 ▲ '기미보다'의 뜻은? ▲ 미장원과 미용실은 다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장원은? ▲ '연애'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 '흐지부지'와 '유야무야'의 어원은?

참고로 '치하포 사건과 고종의 전화 한 통'이란 글은 김구 선생의 일화를 통해 ①김구 선생에 대한 지식과 ②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지 않았지만 사사건건 눈치를 봐야만 했던 우리 정부의 당시 사정과 ③ 명성황후 시해사건 ④당시 국왕의 역할 등과 같은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⑤오늘날 우리에게 생활필수품이 된 전화기 도입 역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한편 ⑥무심코 쓰는'전화를 걸다'라는 말의 어원을 알 수 있도록 썼다.

우리 역사 이야기가 골치 아프다? 어렵다? 청소년기와 지난날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토록 어렵기만 했던 역사를 쉽게 만나게 해 준 것은, 역사의 자긍심을 가슴 설레게 느끼게 한 것은 <양식과 오만>(갑인출판사, 1993년)이란 신봉승 작가의 역사 에세이 한 권. 그런데 아쉽게도 어른이 되어서야 읽었다.

청소년기에 그처럼 쉽고 재미있는 역사관련 책을 접할 수 있었다면 나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으리라. 요즘 청소년들의 역사 교육 부재와 그로 인한 역사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 뜨임과 가치관 형성 등 그 어떤 시기보다 중요한 시기인데 말이다. <대한유사>는 청소년들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 그 계기가 되어 줄 수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대한유사>(박영수 씀. 살림출판사. 2011.7 12000원)



대한유사 - 독립신문보다 생생하고 혈의 누보다 파란만장한 진짜 근현대사 이야기

박영수 지음, 살림Friends(2011)


태그:#전화기, #덕률풍, #치하포, #김구,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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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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