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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와 대학구조개혁위원회는 지난 5일 대학평가순위 하위 15%에 든 43개 '부실대학'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순수예술대학'을 표방하는 추계예술대학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추계예대 구성원들은 1인 시위와 농성을 진행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교수들은 전원사퇴를 결의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 09학번 허집 학생이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추계예대 학생들이 인사동에서 부실대학 선정기준에 반발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어렸을 적, 커다란 서점 근처에서 살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뽑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하룻밤 만에 독파하곤 했다. 늦었으니까 빨리 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책장에 차곡차곡 꽂힌 책들은 나의 기억창고 같았다.

 

책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기쁨과 죽음, 감정의 혼란이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내가 배운 새로운 것들을 부푼 가슴에 안고 잠이 들었다. 그때부터 어떤 책이 감동을 주고 어떻게 써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비과학적인 것은 배척받는 현대에도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만약 내가 쓴 책이 누군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면 그리고 그 만남으로 누군가가 변화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누군가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런 꿈을 가지고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교과부 논리대로라면 나도, 내 동생도 죄인

 

그런데 나의 이런 꿈이 정부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깡그리 짓밟혔다.

 

지난 5일 정부는 내가 다니고 있는 추계예술대학교를 '부실대학'으로 선정했다. 정부의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는 취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실대학의 부실학생에 불과하다. 미술전시회를 열고 세계 평론가에게 호평 받는 작품을 내놓아도 우리는 실업자다. 유명 오케스트라 악단에 들어가더라도 실업자고 관객 천만의 영화를 찍어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도 우리는 실업자다.

 

얼마 전 추석이 있었다.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친척들 입에서 부실대학 얘기가 나오면서 상황이 가볍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부실대학 선정 기준이 어떠한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 비판과 변명을 하면서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마치 대중 앞에서 심판을 받기 전에 열심히 자기변호를 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얘기를 들은 친척들은 모두 잘못된 부실대학 선정 기준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애초에 죄인이 아니었는데 누명을 벗었다고 기쁨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그저 씁쓸한 뒷맛만 남을 뿐이었다.

 

나는 그나마 양호한 경우였다. 친척들로부터 조롱 아닌 조롱을 받으면서 죄인 판정을 받은 학우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언제부터 죄가 되었을까? 내 여동생은 미술을 전공한다. 교과부의 논리대로라면 나뿐 아니라 내 동생 역시 죄인이 된다. 둘 있는 자식이 모두 죄인이라니, 참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불충한 자식들이 아닐 수 없다.

 

'취업률' 아닌 '국세청 납세자료' 근거로 하겠다?

 

 추계예대 학생들이 서울역에서 부실대학 선정기준에 반발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부실대학 선정 기준으로는 취업률, 재학생 충원률, 전임교사확보율, 학사관리, 장학금 지급률, 교육비 환원률, 등록금 대출 상환률, 등록금 인상률 등의 기준이 적용되었다. 교과부는 취업률 외에 다른 항목도 미달돼 부실대학으로 선정된 건데 왜 취업률만 붙잡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부실대학 사태에 대한 인터넷 반응을 보면 교과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다. 어쨌거나 다른 부분에서도 미달인데 대학운영을 부실하게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하지만 부실대학 선정 기준은 명백히 오류이고 잘못되었다. 우선 부실대학 선정 기준의 20%를 차지하는 현행 취업률 산정은 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4대 보험 직장 가입자를 취업률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처사이다.

 

교수님들도 총사퇴를 결의하는 등 항의가 거세자 교과부에서도 취업률 산정 기준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년부터는 건강보험 자료가 아닌 국세청 납세 자료를 근거로 취업률을 산정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차도 납득할 수 없다.

 

예술이라는 것은 보상이 보장돼 있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땅을 파서 보물 상자를 찾는다 한들 그 상자 속에서 '꽝'이 써진 종이 한 장만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예술이다. 그리고 그 보물 상자를 언제 발견할지조차 모른다.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국세청 납세 자료를 근거로 하겠다는 것은 소득 신고를 하면 취업자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인데 정기적으로 수입을 얻고 소득 신고를 할 만큼 예술이 만만한 것이었던가? 청년실업자 100만 명의 시대이다. 예술이 정기적인 소득을 보장한다면 우리나라에 르네상스가 왔을 것이다.

 

특별대우 요구하는 것 아냐... 예술을 예술의 잣대로 봐달라

 

교과부의 이런 몰상식한 행동은 사실 놀라울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교과부의 이번 행정은 그것이 표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인에 대한 복지나 지원 얘기만 나오면 시끌시끌해진다. 그리고 예술도 다른 분야와 똑같이 평가되고 경쟁해야 하며 예술이 대단한 것인 양 특별대우를 요구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예술인들 중에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 예술인이라는 스스로의 명예와 자부심을 먹고 사는 사람은 있어도 특권의식을 먹고 사는 사람은 없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

 

"나는 자주 예술가의 삶은 길고도 달콤한 자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삶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특별대우를 바랄까? 그러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예술을 예술의 잣대를 가지고 봐주기를 바랄 뿐이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온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 교과부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예술을 포기하고 취업을 하란다. 참으로 고맙지만 그 권유는 정중하게 사양하겠다. 그리고 내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오히려 당당하게 여기겠다.

덧붙이는 글 | 허집 학생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 09학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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