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 비치되어 있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 헬스케어 프로그램 홍보물 옆으로 환자 이송 라운지가 보인다.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 비치되어 있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 헬스케어 프로그램 홍보물 옆으로 환자 이송 라운지가 보인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글 : 송주민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고 하면,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듣는 이야기.

"전국민 무상의료? 좋아. 그런데 대기시간은 어쩔 건데? MRI 찍으려고 두 달 기다릴 수 있어?"

NHS를 둘러싼 온갖 악평과 괴담도 대부분 오랜 대기시간에 대한 것이다. '수술 기다리다 사람이 죽어간다'느니, '간단한 검사 하나 받으려 해도 수개월이 걸린다'느니 하는 소문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도 결국 대기시간이다. 실제 현지에서 영국인들을 만나 보니, NHS 자체에 대한 호의는 높았다. 하지만 기다림에 대한 불만 또한 적지 않았다.

[왜 존재?] 한정된 예산 효율적으로 쓰려면 '줄 서기'는 필수

대기시간은 말 그대로 환자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기시간이 없진 않다. 그러나 민간병원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단일한 기준의 대기시간이 있을 수가 없다. 공식적인 집계도 없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모든 국민이 단일한 국가의료체계인 NHS에 포괄돼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이 '줄을 서는' 게 명확히 보인다. 진료 시작과 함께 여러 기준에 의거해 '대기 순번'이 정해지고, 차례차례 순서에 따라 의료 서비스가 제공된다.

런던 교외의 아머샴 헬스 센터 우이혁 정신과 전문의는 "한정된 정부 돈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효과적인 시스템과 처리 절차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대기시간은 한정된 예산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필터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NHS에선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가 '문지기'로서 1차적인 거르기를 한다. 문지기를 통과해 NHS 병원에 의뢰되면, 생명이 위급한 환자는 앞줄에 선다. 반면 상대적으로 경미하다고 판단되는 환자는 뒤로 줄을 서게 된다. 각각 상태에 따라 순번이 정해지고, 급한 환자는 짧은 대기시간이, 덜 급한 환자에겐 비교적 긴 대기시간이 주어지게 된다.

[어떤 절차로?] GP→ 병원... "환자 상태만을 고려해 결정"

영국에서 아프다? 우선, GP에게 가야 한다. 증상이 경미하다면, GP의 처치만으로 진료는 끝난다. 중하거나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면, GP의 의뢰를 통해 NHS 병원으로 가게 된다.

GP의 판단과 의뢰는 대기시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GP는 환자의 상태를 살펴, NHS병원으로 의뢰서를 보낸다. 의뢰서를 받은 병원은 GP의 소견을 참고해 환자들의 진료 순번을 결정하고, 각각의 대기시간을 부여한다. 

GP는 어떤 기준으로 병원 의뢰를 할까? GP 세리언 초이(Cerian Choi)씨의 말이다.

"정부(NICE, 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가 정한 가이드라인이 있긴 하지만, 대개는 재량에 따라 판단한다. 기본적인 원칙은 응급환자는 곧바로, 중환자는 빠른 시간에, 시급하지 않은 경우 조금 여유를 갖고 병원을 이용토록 요청한다."

환자 상태와 질환의 경중에 따라, 병원에 의뢰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는 위장병을 예로 들며, 경미한 위염의 경우 직접 처방을, 심해 보일 경우 일반적인 검사 의뢰를, 위암이 의심될 경우 즉각적인 검사를 의뢰한다고 설명했다. 영국 현지에서 만난 김용수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노팅엄대 보건정책전공 박사과정)은 "영리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고 순전히 환자 상태만을 고려해 의학적인 판단으로 대기절차가 진행된다면, 그것보다 정의로운 방법이 있을까"라고 지적했다.

[실제 대기시간은?] 상태에 따라 가지각색... 정부의지에 따라 좌우

그렇다면 NHS에서 실제 대기시간은 얼마나 될까? 각종 괴담과 악평은 사실일까?

우선, GP 진료소 이용의 경우 문제가 없었다. 예약 시 하루 이틀, 늦어도 수일 후에는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오마이뉴스> 취재팀원이 몸 상태가 안 좋아서 GP 진료소를 찾은 적이 있다. 예약 없이 당일에 갔는데도 1시간여만 기다리면 즉시 진료가 가능했다.

로얄 런던 병원(The Royal London Hospital)의 응급실(A&E, Accident and Emergency) 입구.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다.
 로얄 런던 병원(The Royal London Hospital)의 응급실(A&E, Accident and Emergency) 입구.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응급실 대기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물론 개개인은 불만이 있을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4시간 규칙'이 있어, 4시간 안에 처치를 받게끔 되어 있었다. 지난 8일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대학생 오라이언 웰링(Orian Weilling)씨는 하필 그날 다리를 다쳐서 응급실을 이용한 상황이었다. 그는 "3시간 정도 기다려 치료 받았다. 길긴 했지만 그 정도 기다린 건 괜찮았다"고 말했다.

문제는 NHS병원 진료였다. 환자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파악이 쉽진 않았으나, 현지에서 만나고 들은 사례를 통해 대략적인 대기시간을 파악해 봤다.

우선, 위급한 환자일 경우 즉각적으로 병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29년째 런던에 거주 중인 한현수씨는 "정말 급한 환자는 단번에 병원으로 가게 되더라"고 전했다. GP가 직접 병원에 급하다는 전화를 넣거나, 의뢰서를 당일 날 바로 전달토록 조치하는 경우에도 1~2주 정도면 병원 진료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GP가 아닌 병원 전문의의 의뢰를 통해 온 경우도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 보였다. 세인트 조지병원에서 만난 스틸 나이저(Still Niger)씨는 "심장 수술을 앞두고 전문의가 치과 검진을 받아보라고 해서 왔다"며 "2주 정도 기다렸다"고 말했다.

내시경이나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야 할 경우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한현수씨는 "병원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중병이 아닌 일반적인 의뢰의 경우) 내 경험상 대략 3주 정도"라고 전했다. 급하지 않은 환자의 경우, 2달 정도 기다리는 경우도 많았다. 취재팀이 런던의 로얄런던병원과 세인트조지병원의 피부과, 치과 등에 외래진료를 온 환자들을 만나 문의해본 결과, 대략 2달 정도 기다렸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 대기시간은 정부의 예산투자와 정책의지에 따라 급변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노동당 집권시절 정부의 의료비 지출을 늘린 결과, 1996년 평균 15주에 달하던 입원대기시간이 2010년 4.3주로 급감했다. 예산을 늘리면 대기시간이 감소하고, 예산을 줄이면 대기시간이 증가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불만 정도는?] 평 엇갈려... '문지기' 넘어가면 만족하는 편

영국 런던의 2차 진료기관인 세인트 조지스 병원(St. George's Hospital)의 치과 전문의 리차드 포터(Richard Porter)씨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2차 진료기관인 세인트 조지스 병원(St. George's Hospital)의 치과 전문의 리차드 포터(Richard Porter)씨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이 정도 대기시간에 대해 영국인들은 불만이 클까? 평은 엇갈렸다.

스틸 나이저(2주 대기)씨는 "불만은 전혀 없고 매우 만족스럽게 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치과 진료를 위해 2달을 기다렸다는 자넬 햇슨(Janel Htcson-eyn)씨도 "이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며 "진료에 만족한다"고 전했다. 반면, 피부과 진료를 위해 2달을 기다렸다는 로버트 스테판(Robert Stephen)씨와 모하마드(Mohamed)씨는 한 목소리로 "2달 동안 걱정과 불안이 컸다"며 불만을 표했다.

'문지기' GP를 거쳐 병원으로 오기까지가 대기시간이 길고 불만족스럽지, 막상 병원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면 만족스럽다는 평도 많았다. 2달 기다림에 불만을 표했던 스테판씨는 "전문의를 보고난 후부터는 치료 과정은 물론 친절한 모습까지 마음에 든다"며 "병원 진료가 시작되고서부터는 불만은 전혀 없다"고 전했다.

한현수씨도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가 답답하지, 막상 병원에 들어오면 매우 만족스러운 편"이라고 전했다. 그는 오른쪽 턱에 종양이 발견돼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임플란트 치료도 받고 있다. 모든 비용은 무료였지만 수술을 받기까지 일 년 넘게 걸려야 했다. 한 번은 위급한 암 환자가 들어와 다 잡아놓은 수술 날짜를 미뤄야 했다. 지난 12일 취재팀은 그와 함께 진료일에 맞춰 세인트조지병원을 방문했다. 진료를 마치자 한씨의 다음 예약 날짜는 2주 후로 잡혔다. 

[결론] 대기시간, 나쁘기만 한 걸까?

"유럽은 국민 모두 국가의료제도에 등록을 했기에 줄을 서는 게 보이는 것이고, 한국은 줄 자체를 서지 않을 뿐이다. 농촌이나 지역의 분들은 아파도 병원에 안가고 참거나 제대로 된 시설이 없어서 이용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미충족 수요'가 줄을 서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많이 존재한다."

지난해 <오마이TV> 토론회에서 김용익 서울대 의대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줄을 서는 것보다 줄조차 못 서고 투명인간처럼 방치돼 있는 게 더 문제"라며 "줄 서서 기다리는 게 문제인가, 의료비가 비싸거나 시설이 없어서 아파도 집에 그냥 있는 게 문제인가"라고 지적했다.

어느 사회든 의료자원이나 재정은 한정돼 있다.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문턱을 두기 마련이다. 미국은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문턱을 두는 전형적인 나라다. 한국도 미국보단 덜하지만, '병 때문에 집안 기둥뿌리 뽑힌다'는 소리가 여전하다.

대기시간은 돈이 아닌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의료서비스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미국과는 달리 영국은 GP(문지기)와 대기시간으로 문턱을 두고 있는 셈이다. 또 영국의 대기시간은 환자 상태의 경중에 따라서만 정해지고 있었다. 돈을 많이 낸다고 앞줄에 설 수 없고, 돈 없다고 뒤로 밀리는 경우도 없다. 환자가 노숙자이든 기업회장이든 상관없이 암이면 제일 앞에 서고, 감기 몸살이면 걸러낸다. 급한 환자가 오면, 앞줄에 있던 사람도 뒤로 밀리거나 양보(강제적일진 몰라도)하기도 한다.

줄서서 차례로 버스를 타고, 노약자, 임산부를 위한 좌석을 따로 양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기다리고 양보를 하는데도, 영국은 GDP대비 의료비 지출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낮으면서도 국민들의 건강지표는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은 편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기시간,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


태그:#NH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