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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군기지를 둘러싼 강정마을 주민들의 투쟁이 4년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를 둘러싼 강정마을 주민들의 투쟁이 4년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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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다!"

강정마을 중덕해안 초입의 중덕 삼거리, 도착해 배낭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한 여성의 외침이 들렸다.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여성 뒤로 주변 곳곳에서 나온 사람들 몇이 따라 뛴다. 쫓아가던 여성이 중덕해안 가까이에서 두 남성을 막아선다. 마을 동태를 살피러 왔던 해군들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여긴 국방부 소유니까 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국방부 소유야. (바로 옆 땅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가 내 땅이야. 당신들이 강탈했잖아."
"어떻게 강탈했는데요?"
"그럼 정정당당하게 가지고 갔다고? 내 땅 절차 밟고 갖고 갔어? 강제수용이 절차야? 어떤 절차를 밟았냐고!"
"자꾸 여기 와서 자극하지 마세요."
"국방부 땅에 해군이 오는 게 왜 자극입니까?"
"앞으로 주민들 앞에서 국방부 땅이라고 하지 마세요. 주민들 동의 받지 않고 가지고 간 거잖아요. 주민들이 여기에 해군이 들어오는 걸 용납 못한다는 걸 모르세요? 왜 매번 와서 이렇게 사람들을 힘들게 하시냐고요?"

몇 번 더 대거리하던 해군들이 해안가로 빠져 나가자 금세 봉고차 한 대가 나타난다. 숨을 가쁘게 쉬던 여성이 봉고차 안을 보며 말한다.

"삼촌, 왜 해군하고 같이 다녀? 경찰이 왜 해군을 모시고 다닙니까? 해군이 월급 줍니까? 우리가 월급 줍니다!"

봉고차 속 해군과 경찰들 별 얘기도 못하고 바로 돌아나간다.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의 일상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끈덕진 싸움이 벌써 4년을 넘어섰다.

염탐 온 해군, 딱 걸렸다

상황이 종료되자 기세 좋게 이들을 호령하던 여성이 땀을 뻘뻘 흘리며 기진맥진하더니 풀밭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강정마을 주민 김아무개씨(38)다.

"14년 전에 신장 이식수술을 했는데 이렇게 한 번씩 악 쓰면 기운이 빠져서 힘들어요. 병원에서 이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안할 수가 없단다. "해군은 우리 동네 주민들을 다 이간질시킨 놈들이어서 그냥 보기만 해도 열불이 나."

뒤따라왔던 사람들이 미량씨를 챙긴다. 그의 가쁜 숨이 잦아들길 조용히 기다려준다. 살뜰한 모습이 아주 오래 알고지낸 삼촌(제주에선 남녀 불문하고 윗사람을 삼촌이라 부른다)-동생 사이로 보인다. 사실은 이들이 만난 지는 몇 달 안 됐다. 강정마을에 힘을 보태고자 스스로 바다 건너 찾아온 '강정의 새주민'들이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도 있지만 제주에 여행 왔다가 중덕 해안에 마음을 빼앗겨 계속 눌러앉은 이들도 많다. 물론 흠집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외부세력'이라 갈라치기 하지만 미량씨는 손 잡아준 이들이 아니라 강정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는 해군 등이 '외부세력'이라고 분명히 구분지였다.

기운을 차린 미량씨를 일으켜 세운 들꽃(닉네임)씨가 옆 나무를 보더니 거미줄에 걸린 호랑나비를 빼준다. 생명의 고통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들이 지켜내고 있는 곳, 제주 강정마을이다. 지난 8월 12일부터 3일간 강정주민으로 살았다.

중덕해안으로부터 약 1.3km 떨어져 있는 중덕 삼거리는 중덕해안을 지키는 최전선이다. 해군은 구럼비바위가 있는 중덕해안을 사이에 뒤고 강정천에서 강정포구까지 약 2km에 이르는 바닷가 일대에 해군기지를 세울 계획이다.

최전선인 삼거리의 최전선은 현애자 민주노동당 제주도당위원장이다. 쇠사슬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다. 지난 7월 23일부터 대규모 경찰 병력이 강정마을에 배치되자 25일, 공권력 투입을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스스로 쇠사슬을 감고 인간방패가 되길 자처했다. 땅바닥에 달랑 깔개 하나 깔고 시작했던 노숙농성이 지금은 두툼한 스티로폼 바닥에 천막을 세워 지붕도 생겼다. 현 위원장이 "지금은 호텔수준"이라고 웃는다.

그의 막내딸 자연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농성에 들어오기 전, 딸에게 어떻게 얘기했을까.

"농성한다는 얘기는 안 하고 '엄마, 강정마을에 가는데 며칠 있을지도 몰라'라고 말했어요."

딸은 물었다.

"왜 꼭 엄마가 해야 돼?"

그가 답했다.

"엄마가 그동안 거기 지킨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근데 경찰이 와서 없앤다고 하니까 엄마가 꼭 해야 돼."

엄마의 농성 이후 자연이는 며칠씩 집과 농성장을 번갈아가며 생활하고 있다. 옆에 있는 강공주씨가 자연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들이 전화를 하면 처음 묻는 질문이 '이모, 엄마 잡혀갔어?'에요."

열두 살 어린 소녀는 엄마의 불안한 안녕이 늘 마음에 쓰인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가운데)을 비롯한 강정 주민들이 공권력에 맞서 쇠사슬 농성중이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가운데)을 비롯한 강정 주민들이 공권력에 맞서 쇠사슬 농성중이다.
ⓒ 한국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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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엄마 잡혀갔어?"

농성장 뒤로 10여 개의 1인용 텐트가 도열해 있다. 그중 농성장 제일 가까이에 있는 텐트 주인이 대구에서 온 공주씨다. "공권력이 들어오면 다 같이 위원장님과 함께 쇠사슬 묶고서 이곳을 지키려고 텐트에서 자고 있어요"라며 강정마을 텐트촌의 숨은 뜻을 설명했다. 그는 작년에 17년 동안 일하던 회사에서 잘렸다. "백수여서 쉽게 올 수 있었다"는 그가 20여 일 지낸 강정이 고향마을인 양 곳곳을 소개한다.

처음 안내한 곳은 삼거리 매점이다. 낡긴 했지만 가스레인지, 밥통, 냉장고 등이 있어 간단한 요리가 가능하다. 서너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탁자도 있다. 한 구석엔 밤에 불침번을 서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쪽잠을 자는 쪽방도 있다. 동네 어른이 포장마차를 하던 자리다. 투쟁하는 이들을 위해 선뜻 내놓으셨단다.

한 삼촌이 매점 주변을 분주히 살핀다. 음식물이 떨어진 가스레인지를 닦는다. 바로 옆 수돗가로 가서 백열등을 단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파이프 등을 정리한다. 어느새 매점의 터줏대감이 된 김훈섭씨다. 30여 년 동안 배타면서 목수 등 갖은 고생을 했던 훈섭씨는 능력자다. "이렇게 찾아와 주는 것이 고마워서 할 일이 없나 살핀다"는 그는 투쟁에 결합한 후 짬짬이 감귤농사를 짓느라 벌이가 시원찮다.

삼거리 입구 오래된 나무 밑에 어르신 대여섯 분이 앉아 있다. 오늘 낮 강정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번들이다. 마을 주민들이 조를 편성해 낮과 밤의 파수꾼을 하고 있다. 밤에는 제주지역 대책위 소속 시민사회단체들도 돌아가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경찰병력에 둘러싸인 강정마을은 지금 '계엄 상황'과 다르지 않다.

환갑을 넘긴 파수꾼들의 한숨소리가 깊다.

"우리가 절차만 잘 지켰어도 이렇게 안할 거야. 다시 제대로 찬반 여론조사 하고 타당성 검토해서 그래도 강정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인다니까."
"그렇고말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들대?"

이들의 절절한 마음의 소리를 바다 건너 국회와 청와대에 있는 정치인들은 들으려하고 있지 않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유치가 결정된 건 2007년 4월 26일 마을총회에서다. 윤태정 당시 마을회장은 바로 4일 전에 공고한 총회를 주민 1900여 명 중 87명만 참석한 가운데 치러냈다. 20여 일 후,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는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은 마을총회가 불법으로 이루어졌다며 마을회장을 해임했다. 같은 해 8월 다시 마을총회를 열었고 참석한 725명 가운데 680명이 해군기지 유치를 반대하면서 지금껏 반대운동을 해오고 있다.

강정마을 농성자들에 대해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결정이 내려져 강정마을은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강정마을 농성자들에 대해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결정이 내려져 강정마을은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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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치기 마을총회 물러라!

잠시 후, 사람들이 다시 부산스럽게 어딘가로 몰려간다. 이번에는 공사 관계자들이 나타났다. 제주 해군기지 시공은 삼성물산과 대림건설 등이 맡고 있다. 두 명의 업체 직원들이 기지 예정지 주변에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세워둔 가림막에 두 장의 경고문을 붙이고 있었다. 하나는 현장소장 명의고 다른 하나는 해군기지 방어사령관의 경고다. 해군의 경고문 속엔 이곳에서 영농행위 등을 하면 2년여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문구도 포함돼 있다.

4년여 동안 싸우면서 주민들이 낸 벌금만 벌써 5천만 원이 넘는다. 주민 14명은 2억89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한 상태다. 주민들의 집으로 경찰의 출두요구서가 계속 날아오고 있다. 해군은 법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순박한 농사꾼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

삼거리에 강달프가 나타났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다른 일 때문에 제주에 왔다가 강정마을부터 찾아왔다. 지난 7월부터 강정마을에서 살고 있는 문정현 신부가 '강정마을 힘내라' 스티커를 붙인 스쿠터를 몰고 삼거리로 들어선다. 평택 대추리, 한진중공업 등 아프고 고통받는 곳이라면 거침없이 길 위로 나서는 그다. 약한 자들의 벗, 문 신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지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이 그를 보자마자 싱글벙글이다.

농성장에 앉자마자 문 신부가 강 의원한테 묻는다.

"어디 안 가실 거죠? 여기 눌러 앉으려고 오신 거죠?"

마을회장이 덧붙인다.

"이제 신부님은 강정주민이십니다."

실제로 문 신부는 사제 서품 받은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마을'로 주소지를 옮겼다. 문 신부가 주민은 마을회장 말만 듣는다면서 "전 회장님 명령대로만 움직입니다" 한다.

강 의원이 "경찰 강제동원만은 저지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말 한마디가 강정마을사람들에겐 어떤 큰 선물보다도 더 고맙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려야만 하는 강 의원과 팔짱을 끼고 미량씨가, 훈섭 삼촌이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는 그들 뒤로 컨테이너 박스에 그려진 그림 속 '평화'라는 단어가 반짝인다.

강동균 강정마을회장(가운데 빨간 옷)이 구럼비 바위 위에서 연대온 사람들에게 강정마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 회장은 지난 8월 26일 구속됐다.
 강동균 강정마을회장(가운데 빨간 옷)이 구럼비 바위 위에서 연대온 사람들에게 강정마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 회장은 지난 8월 26일 구속됐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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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프에게 "공권력 투입은 절대 안 돼!"

오늘밤 불침번을 설 삼촌들이 모였다. 강정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해군기지 얘기가 나온다.

"우리가 출력 나와서 닦은 길인데 왜 해군들이 마음대로 한다는 거야?"

한 삼촌의 불만 섞인 목소리다. 과거 제주도에선 길을 낼 때 집집마다 몇 미터씩 자갈을 깔라고 할당을 줬단다. 마을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와도 자갈을 깔러 출력을 나가서 하나하나 닦았던 길들이 해군기지가 되게 생겼다.

해군은 서귀포시를 압박해 지난 7월 말 중덕 삼거리부터 중덕 해안으로 향하는 농로의 용도폐지를 이끌어냈다. 강정마을에서 공사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해군은 이곳에 출입 제한용 가림막을 치겠다고 시시탐탐 노리고 있다. 경찰병력과의 충돌은 이 때문에 계속 일어나고 있다. 3일 전에도 태풍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데 들이닥쳐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다른 삼촌이 "그 형님만 살아계셨으면 최민수한테 한 번 연락해보는 건데…" 한다. 스킨스쿠버를 하기 위해 영화배우 최민수가 1년이면 몇 번씩 강정 앞바다에 왔다는 거다. 강정 앞바다엔 희귀종으로 천연기념물인 연산호 군락지가 있어 스킨스쿠버들 사이에선 유명하다. 멸종위기종인 '붉은발 말똥게'가 있는 등 강정마을은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보전지역의 핵심지역으로 제주도는 이곳을 절대보존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했었다. 이를 2009년 12월 한나라당이 주축인 제주도의회가 절대보존구역 지정해제 결의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이와 관련한 변경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하기도 했지만 법원에서는 무효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최민수를 안내하곤 했던 주민의 죽음조차 안타깝다는 이들의 절박함이 전해진다.

고성림 삼촌은 군사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내비친다.

"내가 삼국지 등 병법서를 통달했는데 여기 바다는 병법에도 없는 곳이야. 우선 요새가 아니야. 훤히 보이잖아. 해군은 대양해군(남방해역의 해상교통로 보호와 원양작전능력 향상)전략이라고 하는데 이건 미국과 중국, 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야. 나는 그럴 돈 있으면 통일에 쓰라고 말하고 싶어."

밤이 깊었다. 농성장 옆에 놓인 컨테이너 박스에서 미량씨와 시민사회단체 오늘 밤 당번인 서귀포 여성회 회원들이 회포를 풀고 있다. 바닷가에서 자란 여성들의 옛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바닷가에서 땔감 모아와 통조림이나 분유통 올려놓고 바다에서 잡은 고메기(고동)나 보말 끓여 먹었잖아."(서귀포 여성회원)
"우리도 그랬어. 돌김 긁으러 다니고…."(미량)
"탈(산딸기)도 많이 따먹었잖아. 꽂대에 꼬치처럼 꽂아서 먹었지."(서귀포 여성회원)
"여기 들어오는 골목부터가 죄다 탈이었어. 이런 추억이 다 녹아있는 바다를 해군이 빼앗으려는 거잖아. 내 추억을 망치지 말라고!"

해군기지는 미량씨의 추억을 삼켜간다. 온 마을 사람들의 추억도 앗아간다. 방금 전 한 삼촌이 했던 질문에 누가 답할까. "옛날부터 아이들한테 나 죽으면 화장해서 중덕해안가에 뿌려달라고 했어. 근데 해군기지 생기고 나 죽으면 내 혼은 어디로 가야하는 거야?"

중덕해안에 뿌려 달라고 한 내 영혼은 어디로

날이 밝았다. 그냥 눈이 떠졌다. 자연의 힘인가. 중덕해안으로 향한다. '구럼비 바위에서 바다를 봐봐라. 그럼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강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구럼비 바위가 있는 곳이다. 1km여에 이르는 수만개의 바위가 연결돼 하나의 바위를 이루는 국내 유일한 바위습지다. 제주 올레 7코스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 바위가 해군기지 공사로 콘크리트에 매장될 처지에 있다.

구럼비 바위에 올라서 앞을 본다. 바다다. '쏴~아' 철썩, 잔잔하게 다가오던 물결은 바위에 부딪히자 이내 크게 포물선을 그린다. '휘~이잉' 바람소리가 뒤섞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새소리가 이 아름다운 음악회에서 자기 파트를 노래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 고요가 깨지지 말았으면…. 저절로 빌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위 이쪽저쪽에서 손을 모으고 명상을 하는 이들이 보인다. 몸은 떨어져있어도 다같이 구럼비로 엮여있다. 바다와 하나인 이들이 '외부세력'이라고?

갑자기 비가 내린다. 중덕해안의 상징이 돼버린 '중덕사'에서 비를 피한다. 중덕사의 터줏대감 김종환씨가 김치찌개 끓이기에 여념이 없다. 중덕사는 2009년 8월 김태환 전 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가 실패로 끝난 직후 세워졌다. 종환씨가 한 주민과 함께 등산용 작은 텐트를 치고 지내고 있는데 고향 제주에 내려온 전 영화평론가협회장 양윤모씨가 합류했다.

이들이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을 받아내며 중덕해안을 지켜가자 이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텐트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넉넉한 천막으로 교체됐고 양씨는 그곳에 '부처' 그림을 모셔놓고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지키는 중덕사'라 이름 지었다. 제주해군기지 공사 방해 혐의로 지난 4월 구속된 양씨는 이후 옥중에서 71일간 단식투쟁을 진행했고 현재는 요양중에 있다.

종환삼촌이 이번엔 꽁치 통조림을 깐다. 점심 메뉴는 꽁치찌개다. 양파를 써는 칼질이 능숙하다. 젊었을 때 외지로 나가 참치회 가맹점을 했단다. 본사가 부도나면서 종환씨와 같은 가맹점들도 함께 망했다. 다시 고향 강정마을로 돌아와 일용일도 하고 감귤농사도 했다. 그러다가 '해군기지 싸움'이 벌어지면서 그 한복판에 서게 됐다. 그에게 중덕해안은 최고의 낚시터였다. 젊었을 때부터 짬만 나면 중덕해안으로 향했다.

"낚시를 하고 있으면 종종 고래 떼가 몰려와요. 수십 마리가 떼 지어 가는 모습이 얼마나 가관인지…."

중덕사로 한 명 두 명 아침밥을 먹으러 온다. 찌개에 김치, 반찬 두 가지가 전부인 밥상인데 밥이 참 달다. 중덕해안의 맑은 물에, 식당을 했던 종환씨의 손맛이 곁들여져 만들어낸 환상의 조합이다. 쌀과 김치는 전국 각지에서 강정에 마음을 보태는 사람들이 보내주고 있다. 한끼에 40~50명의 식사 준비가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종환씨는 "밥식구가 늘수록 좋다"고 수줍게 웃는다.

강정마을 앞바다는 붉은발 말똥게, 연산호 군락지 등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다. 강정마을 전시장에서는 '강정마을 지키기' 서명운동도 진행하고 있다.
 강정마을 앞바다는 붉은발 말똥게, 연산호 군락지 등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다. 강정마을 전시장에서는 '강정마을 지키기' 서명운동도 진행하고 있다.
ⓒ 한국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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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 바위에서 본 평화를 깨지 말라

삼거리로 돌아오니 현애자 위원장이 비바람을 몸으로 받아내며 홀로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다들 마을부녀회 단합대회에 갔단다. 1년에 한 번 하는 단합대회이지만 경찰들이 올 때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 바로 달려가기 위해서 마을화훼작목반작업장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단다. 며칠 만에 온 자연이에게 고기 먹으러 가라고 현 위원장이 방은미 이모 손에 달려 보낸다. 연극작가인 은미씨는 지난달에 강정에 온 후 매일 '내일은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계속 떠나지 못하고 있단다.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강정을 지키는 거라 생각한다"고 다 큰 아이에게도 얘기한다는 그는 아직도 돌아갈 날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작업장 가까이에 이르니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미 삼겹살을 배불리 먹은 부녀회원들이 노래방기계를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부녀회 단합대회가 마을 단합대회로 바뀌었는지 남성 주민들도 자리 잡고선 고기를 굽고 있다. 잠시 후 문정현 신부가 스쿠터를 타고 나타나자 주민들이 환호한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에 트로트 메들리가 얹혀 진다. "오늘은 빠른 노래만 부르자"고 약속한 회원들은 막춤을 추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그 모습을 보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왈칵 솟는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가사 때문이라고 스스로 핑계거리를 찾는다.

싸움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서 경찰 볼 일이 없었다는 마을이다. 그들이 공사를 막기 위해 트럭 밑에도 눕고 굴착기 앞에서도 드러누웠다. 온 제주를 걸어 다니면서 해군기지 건설의 부당함을 알렸고, 바다 건너 서울까지도 몇 번씩 오갔다. 신나는 노랫소리에 감춰진, 강정마을 사람들이 4년 넘도록 겪었을 외로움과 고통의 짐작할 수 없는 무게가 잠시 내 가슴을 짓눌렀나 보다.

짧은 3일 주민도 그 속에 뛰어들기 위해 막춤대열에 끼었다. 밖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챙기던 강동균 회장이 개똥벌레를 부르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회장님이 저렇게 부드러운 분이셨어?" 하며 낯설어 한다. 지난 4년 동안 강 회장은 몸무게가 17kg이나 빠졌다. 많은 일들과 많은 고민 속에 새벽 3, 4시에나 잠이 들었다. 순박한 농사꾼이 투사가 되길 강요당한 시간이었다.

노래가 이어진다. "아~ 당신은 못 믿을 사람" 가사에 서로를 가리키며 웃기도 하고, "강촌에 살고 싶네"를 함께 목 놓아 부르기도 한다. 문 신부가 맨발로 '사노라면'을 부르자 다같이 손을 잡고 하나가 된다.

단합대회에서 함께 고기를 굽다가 한아(닉네임)씨와 눈이 맞았다. 한아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쉬면서 전국 기차여행을 하다가 3주 전에 제주도에 들어왔단다. 그 역시 강정의 매력에 빠져 계획했던 날짜를 한참 넘긴 채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강정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뒤 제주도 곳곳을 구경 다니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강정을 '전도'한다고 말했다. 제주공항에서 자신이 직접 쓴 피켓을 들고 있기도 하고 음악축제에 가서 만난 친구들한테도 강정소식을 전했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강정을 느낀 사람들은 한아씨처럼 열혈 신자가 된다.

함께 맥주 한 잔 하자고 동네 치킨집에 들어갔다. 바로 좀 전에 단합대회 자리에서 만났던 삼촌 두 분이 벌써 와 계신다. 한 분은 트위터 등에서 많이 알려진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린 시, <내 어미는 해녀였다>를 쓴 고영진 삼촌이다. 영진 삼촌이 살아온 얘기를 풀어낸다. 중학교를 중태하고 웨이터를 하다가 부인을 만나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는 틈틈이 시를 썼단다. 이 농민시인도 벌써 벌금을 두 번이나 냈다. 영진삼촌이 자신이 만난 한 판사 이야기를 한다.

판결을 내리면서 이런 훈시를 했단다.

"강정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충성도가 약합니다. 충성도를 키우세요."

영진 삼촌이 지금도 생각나는지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군대도 갔다 왔고 출력도 나가고 몇십 년을 고향땅 지키면서 나라에 충성하며 살아왔는데 뭐가 충성도가 낮다는 거야? '싸가지 없이…'."

<내 어미는 해녀였다>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내 어미 모진 손길 머무른 이곳을 이대로/ 내어줄 순 없지 않은가/ 내 기억의 몸부림으로 이곳을 지키고 싶다/ 살아 숨 쉬는 그날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기를….' 혹시라도 그 판사가 주민들의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그리도 오만하지는 못했을 게다.

강정마을엔 미술가, 영화감독, 연극인 등 많은 평화를 사랑하는 예술인들의 연대도 이어지고 있다. 강정 해안가로 향하는 농로에 설치된 미술작품.
 강정마을엔 미술가, 영화감독, 연극인 등 많은 평화를 사랑하는 예술인들의 연대도 이어지고 있다. 강정 해안가로 향하는 농로에 설치된 미술작품.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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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미는 해녀였다' 내 기억의 몸부림으로 이곳을 지킨다

옆 테이블에서 치킨을 먹던 할머니 세 분이 촛불집회할 시간이 됐다면서 일어나신다. 매일 저녁 9시 연어가 산다는 1급수 강정천 근처에서 주민들은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강정천에 도착하니 깜깜한 강가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율동을 배우고 있다. 강정마을 촛불집회는 앞에 나온 사람들만 발언하고 끝나는 여느 집회와는 다르다. 예순이 넘은 할머니들도 함께 율동을 한다. 옆에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사회자인 부름을 받고 올해 초 개봉한 영화 <사랑이 무서워>의 정우철 감독이 발언을 하러 나선다.

"여기에선 누구 하나 월급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들 솔선수범합니다. 자기 발로 스스로 온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모습은 내 인생 최고의 영화입니다. 해군을 몰아내고 강정마을을 되찾읍시다!"

발언자는 항상 노래를 해야 한다. 정 감독이 시원하게 락 한 곡을 뽑아낸다.

이어지는 사람들의 발언과 계속되는 노래에 사람들이 즐겁다. 주민들이 문정현 신부를 찾는다. 그가 <흙에 살리라>를 열창한다. 주민들, 이번엔 강동균 회장을 연호한다. 강 회장, 거침없이 앞으로 나와 '초가삼간 집을 짓는 내 고향 정든 땅' 하면서 문 신부와 같은 '흙에 살리라'를 부른다.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가사가 마음을 찌른다.

강정 촛불집회의 마지막은 다 같이 구호를 외치는 거다. 그동안 수없이 외친 구호다. 주민 모두가 딱딱 맞는다.

우리는(마을회장) 할 수 있다 / 할 수 있다 / 할 수 있다(주민들)
우리는(마을회장) 하면 된다 / 하면 된다/ 하면 된다(주민들)
우리는(마을회장) 해냈다 / 해냈다 / 해냈다(주민들)
질긴 놈이(마을회장) 이긴다 / 이긴다 / 이긴다(주민들)
독한 놈이(마을회장) 이긴다 / 이긴다 / 이긴다(주민들)
해군기지(마을회장) 결사반대 / 결사반대 / 결사반대(주민들)
세계의 평화는(마을회장) 강정으로부터(주민들) / 지화자(마을회장) 좋다(주민들)

별이 총총한 밤에 주민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현애자 위원장이 있는 삼거리까지 행진한다. 찬성 측 마을 주민의 비닐하우스에 상주하고 있는 전경들이 보이자 이들의 구호소리가 더 커켰다.

덧붙이는 글 | * 강정 주민들 앞에서 강정 구호를 이끌던 강동균 마을회장은 지난 8월 26일 구속됐다. 중덕사의 터줏대감 종환 삼촌도 강 회장과 함께 구속됐다. 종환 삼촌이 맡았던 중덕사의 쉐프 역할은 미량씨가 대신하고 있다. 마을회장과 구속된 이들의 빈자리를 묵묵히 다른 이들이 채우고 있다. 취재 때 만났던 한 주민에게 전화로 힘빠지지 않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회장님이 우리가 힘 빠져하는 걸 바라시지 않기 때문에 더 힘을 내고 있어요."
평화, 생태, 고향, 추억… 이 모든 것을 지키는 투쟁중인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응원부대가 간다. 오는 9월 3일 희망비행기가 제주 하늘로 높이 뜬다.

* 월간 <노동세상> 9월호에 실린 글을 약간 보완했습니다.



태그:#강정마을, #강동균, #해군기지, #현애자, #구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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