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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과 좌절

퇴직 이후 한 달은 정신 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직장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여행을 많이 다니기도 했지만, 회사 핑계로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집안 일에 적응하는데 최소한 한 달의 시간은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설거지, 청소 등은 나의 몫이었지만 어찌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회사원과 집에서 놀고 있는 백수의 집안 일 강도가 같을 수 있겠는가. 백수는 청소를 해도 베란다까지 더 꼼꼼히 해야 했고, 빨래를 도와줘도 때로는 주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더 세심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나의 퇴직을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에 대한 의리이기도 했다.

매일 붙어있었던 부녀
▲ 백수 아빠와 노트북 하기 매일 붙어있었던 부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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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맞이한 4월. 어느새 나는 백수짓에 최적화 되어 있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늦게까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셔도 새벽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건만, 이제는 해가 중천에 걸려도 아이의 똥 냄새가 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었다. 특별히 나갈 일이 없으면 굳이 씻지 않았고, 어쩌다 한 번 나갈 일이 생기면 있는 호들갑을 다 떠는 백수의 생활. 파란 추리닝만 입으면 TV에서 볼 수 있는 백수의 전형 그대로였다.

생활이 이러하다 보니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한 달 전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하더라도 좀 쉬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도 짜려 했건만, 이건 생활에 치여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처음에는 종로에 위치한 영어학원을 다니며 그 주변 직장을 다니던 친구들에게 점심을 얻어먹으려 했건만 시내 나가기는 인천 소재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힘들어졌고, 백수가 되어 시간이 나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는 결국 만삭의 몸으로 18개월 된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를 두고 혼자 나가기에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지만, 한편 나의 생활이 온전히 아내의 레이더 망에 걸려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추후의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백수라도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아내는 이를 인정하지 못했다.

뭔가 약간 우울한
▲ 아빠와 문화센터 다녀온 까꿍이 뭔가 약간 우울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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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수로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평일 대낮에 밖에 나갔을 때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길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30대의 남자가 전형적인 백수의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할 때 보내는 그 한숨 섞인 시선들. 여기에다 처자식이라도 달고 나가면 사람들은 대놓고 아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만삭의 몸으로 18개월의 아이를 건사하고 있는 아내가 백수 남편 때문에 불쌍하다는 것이지.

특히 그 백미는 문화센터에서 만나는 주부들의 시선이었다. 다음 달이 산달인 아내와 나는 1주일씩 번갈아 가며 문화센터를 다녔는데(매번 나더러 가라는 아내에게 내가 그럴 수 없다며 우겨댄 결과이다) 내가 갈 때마다 그곳 주부들은 서로 수군대는 듯했다. '저 집 아빠 또 왔네. 역시 집에서 노는가 봐. 애 엄마 불쌍해서 어째.' 라는 대화가 귀 언저리를 간질이는 듯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자영업자로 볼 수도 있고, 3교대 근무자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나를 바라보는 세상 모든 시선들이 백수를 떠올리는 듯했으며, 따라서 스스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자격지심. 백수에게 가장 큰 적은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자신이었던 것이다.

구직 사이트를 배회하기 시작하다

백수로서 느끼는 자괴감. 결국 난 취직을 결심했다. 도저히 지금 나의 상황을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준비해도 당장 취직 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난 시간이 날 때마다 구직 사이트를 배회하기 시작했고 취업시장 동향에도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6개월 정도는 여행도 다니고, 사람도 만나고, 책도 읽을 줄 알았건만, 그건 한낱 꿈일 뿐 나는 날마다 카페 '취업 뽀개기'를 뒤져 업그레이드 되는 취업 정보를 모니터하고, 말도 되지 않는 자기소개를 또 쓰기 시작했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느새 나의 일상은 이력서 내는 날짜에 맞춰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는 또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주옥같은 대사를 읊어댔다. 뭐 하러 그러느냐고, 퇴직금도 있는데 걱정하지 말고 쉴 수 있을 때 쉬라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젊은 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겠느냐며 조바심내지 말고 좀 충전하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 둘 때만 하더라도 힘이 되었던 아내의 대사들이었지만, 회사를 두 달 전에 그만 둔 백수의 입장으로서 그것은 오히려 나를 부담스럽게만 만들었다. 만약 아내 말대로 넋 놓고 쉬고 있다가 취직이 안되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하려고? 쉬는 거야 좋지만 지금처럼 자기개발 하나 없이 마냥 쉬기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되고? 어차피 아이에 치여 자기개발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 아닌가?

아내는 이런 내게 쐐기와 같은 한 방을 날렸다. 취직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견디게 만드는 아내의 한 마디.

"당신 좀 더 쉬면서 내 산후조리 해 줘라. 산후관리사 안 부를게."

1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 똥기저귀 빨기 1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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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포즈를 잡다가도 이내 모유만을 고집하는 아기들
▲ 분유라도 먹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포즈를 잡다가도 이내 모유만을 고집하는 아기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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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악했다. 아내가 누구던가. 첫째를 병원 대신 조산원에서 낳았으며, 산후조리원 대신 집에서 산후조리사를 불러 산후조리를 했던 그녀 아니던가. 따라서 아내가 이야기하는 산후조리는 여느 남편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그 수준이 달랐다. 그것은 나의 모든 시간을 아이와 아내에게 집중해 달라는 것이었고, 만약 그렇게 산후조리를 하게 된다면 재취업은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 빤했다. 아내가 나의 재취업을 방해할 리는 없었지만, 작가인 그녀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할 수밖에.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내에게 공언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5월 31일 출산 예정일 전에는 취업하고 일을 나갈 터이니 이상한 생각 말고 산후관리사를 구하라고. 취업하기가 도저히 어렵다 싶으면 연봉이 깎이더라도 회사를 그만둘 때 내게 스카우트를 제의했었던 협력사에라도 들어갈 테니 나의 산후조리는 기대하지 말라고.

덕분에 나의 취업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아내가 나를 위해 일부러 그와 같은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난 더욱 가열차게 구직 사이트를 뒤졌고, 열심히 이력서를 썼다. 집에서의 산후조리는 절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재취업, 그리고 아쉬움

보름 동안 약 열 통의 이력서를 썼던가. 슬슬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50통 넘게 써야 그럭저럭 면접 볼 만한 곳이 생겼던 5년 전과는 분명 다른 상황이었다. 이는 내가 경력인 점도 있었지만, 대기업 위주로 이력서를 냈던 예전과 달리 알짜배기 중소기업들을 취업 대상에 포함시킨 탓도 있었다. 허울만 좋은 대기업보다는 내실 있는 중소기업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게다가 사회경력 5년이면 그 회사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대충 눈치채지 않겠는가. 그러니 구직이 전보다 조금 더 용이할 수밖에.

문제는 서류가 아니라 면접이었다. 경력직의 경우 면접이 모든 걸 좌우할 수밖에 없는데 나의 경우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책 없이 회사를 관두고 쉬다가 다시 재취업 하려는 사실. 내가 고용주라도 의심할 것이 뻔했다. 왜 갑자기 대기업을 다니다가 그만 두었지? 가장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뽑아 놓으면 또 멀쩡히 다니다가 이유 없이 그만 두는 것 아냐?

아니나 다를까. 면접관들은 위의 질문들을 파고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전 회사의 문제점을 차례차례 열거하고 백수로서 내가 겪었던 고충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 회사를 욕해봐야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일 뿐이며, 새롭게 다닐 회사에서도 그와 같은 비판적인 의식을 견지하리라 생각된다면 면접에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그럭저럭 설명할 뿐이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로부터는 면접 후 일주일 후 연락이 왔다. 최종합격이란다. 다행히 연봉이며 모든 것이 전의 회사보다 나은 조건이었다. 비록 전의 회사를 그만두면서 생각했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경제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기존의 경력을 살려야 하는 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새로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나의 꿈을 접목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찾는 수밖에.

배회하기 시작한 사이트
▲ 구직사이트 배회하기 시작한 사이트
ⓒ 잡코리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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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첫 출근을 이야기하자 아내는 아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기는 듯도 했다. 내게는 항상 쉬라고 했지만 내심 불안함도 공존했을 터, 나의 재취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애매모호함 그 자체였다.

어쨌든 그렇게 막을 내린 나의 짧은 백수 생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우리 사회에서 백수는 살기 힘들다는 것. 아직도 남자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자는 자격지심 때문에, 여자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가 실업을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이상 백수들은 다시 한 번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아직까지 직장을 구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여, 힘 내시라!


태그:#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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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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