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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신민당 당수였던 잭 레이튼
 캐나다 신민당 당수였던 잭 레이튼
ⓒ 이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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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제1야당 당수인 잭 레이튼(61)이 22일(현지시각) 새벽 4시 45분에 세상을 떠났다. 암 때문이었다. 무슨 암 때문이라는 것은 본인이 밝히기를 거부했다. 흔한 말로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간 것이다.

그의 장례는 오는 27일(토) 토론토에 있는 음악의 전당 로이 탐슨홀에서 국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캐나다 국민들에게 편지를 남겼다.그 속에서 그는 암환자들에게 당부했다.

"암을 물리치고 생존하기 위해 투병 중인 캐나다 국민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비록 투병에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을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암의 치료방법은 현재로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낙관적이며 결단적이며 미래지향적이 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충고는 제가 이번 여름에 했던 것처럼 투병의 모든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지난 해 초 그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고 암이 완치됐다고 공개했다. 금년 5월 연방의원 총선을 앞두고 그는 캠페인 기간 중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그것은 암 때문이 아니라 올 초 골절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5월 선거는 그가 속한 캐나다의 진보정당인 NDP(New Democratic Party, 신민당)에겐 대박이었다. 하원의원 308석 중 103석을 차지하는 지각변동을 일으킨 거였다. 게다가 보수당과 차례로 정권을 주고받던 자유당을 따돌리고 창당 50년 만에 제1 야당으로 수직상승한 것이었다.

캐나다는 동구권에서 이민 온 유권자들이 적지 않다. 사회주의에 신물이 난 그들이 사회주의를 포용하는 진보정당 NDP를 지지할 리 없다. 그래서 연방의원의 의석수는 만성적으로 두 자리 수에만 머물러 왔다. 그런데 기적같이 대승을 하자 잭 레이튼은 차기 수상감으로 떠오르게 됐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이 그를 기다린 것일까. 제1 야당 당수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져 갔다. 7월 25일 오타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암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당분간 당수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새로운 암이라는 것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같은 종류의 암을 앓고 있는 사람이 그가 투병에 실패한 것을 보고 자신의 치료방법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잭은 1950년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맥길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요크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기 위해 토론토로 이주했다. 1982년 토론토 시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그는 2004년 연방의원에 당선됐다.

홍콩에서 온 올리비아 차우와 재혼한 것은 1988년의 일. 그녀는 당시 토론토 공립교육청의 교육위원이었다. 올리비아는 중국인 커뮤니티의 지지를 받아 그녀 역시 연방의원에 당선된 현역의원이다. 

둘은 전처 소생의 남매들과 중국인들이 밀집해 사는 토론토 다운타운의 휴론가에 살고 있다. 100년이 넘었을 빅토리아풍의 가옥은 두 집을 붙여서 지은 세미 디태치드라고 불리는 서민형 가옥이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이 그들의 집.

잭 레이튼이 살았던 허스럼한 집
 잭 레이튼이 살았던 허스럼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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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로서 잭 레이튼이 두드러지는 것은 가격이 저렴한 서민형 주택의 보급을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그는 노숙자에 대한 책을 썼고 기득권층이 저렴한 주택공급에 무관심하다고 비난했다. 균형예산을 짠다고 서민형 주택을 짓지 않기 때문에 노숙자가 거리에서 죽은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언론의 헤드라인에 오르기도 했다.

2003년 신민당 당수가 된 그는 당을 권력의 균형자로 활용했다. 소수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당을 지지함으로써 2005년 신민당의 서민형 주택 공급에도 필요한 46억 달러의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정당만을 상대할 경우 약발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같은 해 보수당 등과 연대해 자유당을 불신임함으로써 선거를 치르게 했다. 이 선거에서 신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다.

진보정당인 신민당에 잭 레이튼이 불어넣은 건 실용주의였다. 전통적으로 신민당을 찍지 않는 유권자 층을 고려해서 좌측통행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중앙로선으로도 궤도수정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는 조직, 전략, 의사소통, 자금모집, 심지어 정강까지 조정함으로써 유권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토론토에는 두 군데에 추모소가 차려졌다. 하나는 그가 한때 시의원으로 일한 적이 있던 토론토 시청 앞 광장과 다른 하나는 그가 임종 시까지 살았던 중국인 밀집 지역에 있는 그의 집 앞이다.

허스럼한 그의 집 앞 계단은 시민들이 바친 꽃들로 덮여 있다.나는 방명록에 "당신의 따뜻하고 우정 어린 미소를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집 앞의 계단에 쌓인 조화들
 집 앞의 계단에 쌓인 조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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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광장의 추모소는 벽과 광장의 포장 돌 위에 추모객들이 분필로 헌사를 적게 하고 있다. 물론 그의 대형사진 앞에는 꽃다발들이 바쳐져 있다. 여름이라 망자의 갈증을 염려라도 한 건지 먹음직스러운 오렌지며 오렌지 주스병, 사이다병도 눈에 띈다.

토론토 시청 앞 광장 추모소에 바쳐진 꽃과 오렌지 그리고 주스병들
 토론토 시청 앞 광장 추모소에 바쳐진 꽃과 오렌지 그리고 주스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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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높은 곳에 쓰여 있는 글자는 이거다. 먼저 분필로 하트(심장)를 그린 다음 "사랑은 분노보다 낫습니다. 희망은 걱정보다 낫습니다. 낙관주의는 절망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랑하고 희망하고 낙관주의자가 됩시다. 그리고 세상을 바꿉시다".

이것은 그의 유서에서 캐나다 국민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콘크리트 위에 무릎을 꿇고 분필로 추모사를 적는 시민
 콘크리트 위에 무릎을 꿇고 분필로 추모사를 적는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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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콘크리트 위에 분필로 적은 추모사
 광장의 콘크리트 위에 분필로 적은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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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따가운 8월의 뙤약볕 아래 턱수염이 덥수룩한 한 노인은 무릎을 콘크리트 바닥에 에 꿇고 이렇게 적고 있었다.

"잭, 이상주의가 캐나다 정치판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임을 알려줘서 고맙소."


태그:#잭 레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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