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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주 드모인의 한 야영장 화장실 및 샤워실 입구에 부착된 안내 문구. 미국 육군 공병대가 건설한 것으로 수준 높은 설비와 관리를 자랑하고 있다. 덕분에 쾌적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미국의 많은 야영장이 육군 공병대의 손으로 건설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 최고 시설 아이오와 주 드모인의 한 야영장 화장실 및 샤워실 입구에 부착된 안내 문구. 미국 육군 공병대가 건설한 것으로 수준 높은 설비와 관리를 자랑하고 있다. 덕분에 쾌적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미국의 많은 야영장이 육군 공병대의 손으로 건설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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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모인에서 하룻밤은 습한 날씨를 빼고는 다 좋았다. 비록 주차장에 텐트를 치기는 했지만, 쾌적한 야영장 시설은 여행의 심적 피로를 적잖게 덜어 주었다. 여행 엿새째인 이날, 아이들은 드모인(Des Moines)의 다운타운을 구경하기로 했다. 나는 그 사이에 밀린 빨래를 할 심산이었다.

드모인은 전형적인 대평원 북부 정서가 깔린 아이오와 주의 주도이다. 보수적이지만, 실용적이고, 근면 검소한 풍토가 돋보이는 곳이다. 세계적으로 드모인이 유명세를 탄다면, 미국의 대통령 선거 전초전 때문일 것이다. 뉴햄프셔 주와 함께 대통령 선거 유세의 초반 기세가 결정되는 게 아이오와 주이고, 그 중심에 드모인이 있다. 이른바 아이오와 코커스 불리는 이 곳의 전당대회에서 승기를 잡으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후보로 선출되는데 결정적인 탄력을 받는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주기인 매 4년 이 곳은 세계적인 화제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드모인 그 같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쇠락하는 대평원 도시로써 운명을 피해가지는 못하는 듯 했다. 다운타운은 그다지 활력이 없었고, 도심의 오래된 주택들은 빠른 속도로 슬럼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운데다,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차지하다 보니 요즘 세상 추세에서는 퇴락을 피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도시 생활, 헛발질만 하고 있는 느낌

헌데 병모, 선일, 윤의는 모두 흥미롭게도 쇠락한 마을이나 도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여행 중간에 보통은 자동차 기름을 넣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해 대평원의 시골 마을에 잠깐씩 들른 적이 몇 차례 있었다. 한국 식으로 치면 면소재지 정도 되는 마을들이었다. 60~70년대에 성장이 멈춘 뒤 그대로 노화되는 모습이 간판과 건물 벽면, 도로, 주택의 외피 등에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

"완전히 70년대 같은데요." 네브라스카의 한 시골에서 햄버거 가게를 찾아가는 길에 주변을 둘러 보며 병모는 이렇게 말했다. "완전히 동네가 다 썩어가는 것 같아." 선일이도 거들며 한마디 했다. "나는 이런 곳이 좋더라. 하루하루 뭔가 직접적인 삶을 마주하는 것 같지 않니. 나는 한국이나 미국 사회 기준으로 하면 빨갱이에 가깝다만, 묘하게도 이런 시골 마을에서 스러져 가고 싶다." 내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미국 대평원의 시골 지역은 진보파와 대척점에 선 보수우파, 공화당의 아성인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의 동네'에 더 끌렸다.

도시의 삶, 혹은 도회적인 삶이 나는 마땅치 않다. 어딘지 우회적이고, 간접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틀과 원리에 의해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는 게 도시인들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지금까지 도시를 떠나지 못했지만, 아무튼 헛발질만 하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한국의 도시들, 특히 대도시들에 쇠락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성장 일변도이고, 모두가 새 것을 지향하고, 새로운 유행을 추구한다. 윤의, 선일, 병모는 모두 그런 도시에서 나고 또 자랐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막 성인 대열에 합류했다. 이런 그들이 미국의 쇠락한 도시에 보이는 관심을 나는 "운명에 대한 직감이자 본능의 발로"로 해석한다. 오르막의 끝에서 내리막이 시작되듯, 성한 그 모든 것들은 쇠퇴를 전제한다. 더구나 섭리를 벗어난 성장은 대개는 끔찍한 말로를 경험한다. 최후의 지구, 혹은 최후의 도시를 배경으로 상정한 영화들의 스토리라인, 그 행간의 뜻을 나는 그렇게 읽는다. 

아이오와 주 최대 도시, 드모인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801 그랜드 빌딩. 이 빌딩 소유주인 한 금융그룹 등이 입주해 있는 오피스 건물로 드모인 다운타운의 상징 건물 가운데 하나다. 대평원의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인 드모인은 퇴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 드모인 대표 빌딩 아이오와 주 최대 도시, 드모인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801 그랜드 빌딩. 이 빌딩 소유주인 한 금융그룹 등이 입주해 있는 오피스 건물로 드모인 다운타운의 상징 건물 가운데 하나다. 대평원의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인 드모인은 퇴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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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이 허허벌판에 솟아오른 드모인의 퇴락한 빌딩 숲에서 무엇을 봤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 몫의 삶이 있을 뿐, 기회는 내가 줄 망정, 최소한 해석의 권한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들 셋은 나와 약속 시간에 시내 구경을 끝내고 만나기로 한 지점에 와 있었지만, 나는 좀 늦었다. 동전으로 돌아가는 빨래 건조기가 고장 나서, 세탁을 끝내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한참 많이 걸렸던 탓이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드모인을 출발한 시간은 그래서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원래 이 날의 일정은 해가 지기 전, 그러니까 대략 저녁 8시 30분 이전에 인디애나 동부의 한 야영장에 도착하는 거였다. 연료 소모도 줄이고, 시간도 절약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한 주립공원에 캠핑 예약을 해두었었다. 하지만, 드모인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중간에 점심을 먹고 깜깜해져서야 야영장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

"이거 이상한데. 아무래도 내가 뭘 착각했다. 어제처럼 또 오밤중에 텐트를 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느긋한 '아들 셋'도 이날 밤만큼은 얼굴들을 보니 평소보다는 심적으로 좀 쫓기는 인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을 먹은 뒤 일곱 시간 가량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밤 여덟 시가 조금 못 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1달러 50센트인가 하는, 손가락만한 핫도그를 입에 하나씩 물려 준 외에는 이렇다 하게 먹여준 게 없다. 나는 식비를 절약하려고, 아예 그 핫도그조차 먹지 않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길가에서 헤매고 있는 바로 이 시간 야영장에 도착해 밥을 먹고 있어야 했다.

어둠이 내리고, 배가 고파지면 여행자들의 마음은 급하고 초조해지고, 또 날카로워진다. 희미한 차 안 조명 아래에서 몇 차례 야영장을 안내하는 종이 쪽지를 봤는데, 그만 내가 오독을 하는 바람에 고속도로에서 출구를 지나쳐버린 것이다. "일단 가까운 램프에서 내리고 보자. 각오해라. 야영장 못 찾으면 오늘 밤은 차 안에서 나는 거다. 너희들이 원하면 이 길로 그냥 새벽까지 뉴욕으로 내달릴 수도 있다." 아이들한테 미안한 한편, 나는 오기가 발동해 다소 흥분해서 말했다. 아이들은 "운전하시느라 아버지가 피곤하시죠.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하시는 대로 따라 할게요"라고 합창하듯 대답했다.

인디애나 주의 어느 출구에서인가 내렸어야 했는데, 그만 주 경계를 지나쳐 오하이오 주까지 넘어온 뒤에야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서 그냥 밤을 새워 달릴지, 아니면 사방 분간이 전혀 안 되는 야심한 시간에 야영장을 찾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밤을 새워 갈 데까지 가더라도, 마지막 심정으로 한번 찾아나 보자." 나는 아이들에게 선언하듯 얘기하고, 다시 유료인 80번 고속도로를 타고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되돌아 갈 때 보니 고속도로 길 어깨에 야영장을 품고 있는 주립공원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야영장은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는데, 한창 휴가 시즌이어서인지 자리가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약을 끝냈으므로 밤 11시가 넘어 찾아갔지만 문제는 없었다.

시속 150km 질주하는 차안에서 열린 '대평원 콘서트'

대평원 만큼 콘서트의 배경으로 훌륭한 곳도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음악이든 대평원을 배경으로 하면 그 감동이 배가 된다.
▲ 콘서트 배경 대평원 만큼 콘서트의 배경으로 훌륭한 곳도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음악이든 대평원을 배경으로 하면 그 감동이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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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예상 밖으로 길고 피곤한 하루였는데, 아이들은 그래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고 있었다. 드모인에서 인디애나의 캠핑 사이트까지 오는 동안 차 안에서 펼친 '작은 콘서트' 덕분인지도 모른다. 성격은 제 각각이어도 병모, 선일, 윤의는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과 음악에 제법 소질도 있고 취미도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랩부터, 힙합, 올드 팝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셋이서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데, 겉으로는 중간중간 "자식들, 까불고 있네"하며 무게를 잡았지만, 내심으로는 사실 들어줄 만 했다.

아이들은 중간에 나를 배려해, 내가 좋아하는 그룹 퀸의 "돈 스톱 미 나우" 같은 노래를 틀어주고 큰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아들에게는 유달리 잔정 표시가 쉽지 않은 부류에 속하는, 한국 아버지이지만, 퀸의 노래가 나올 때만큼은 피가 끓어 올랐다. 질주하는 차의 핸들을 좌우로 마구 꺾어 어딘가에 자동차를 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잠시 뜨거워지기도 했다.

아들 셋은 대평원을 달리는 동안 자신들이 왜 그토록 신나게 노래를 불렀는지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안다. 미국의 대평원은 천문학적 규모의 콘서트 장 같은 곳이다. 이 곳은 어떤 장르의 노래도, 감히 단언컨대, 이백 퍼센트 소화한다. 멜랑콜리한 노래는 더 멜랑콜리해지고, 신나는 음악은 가슴을 터지게 하고 또 피를 솟구치게 만든다. 섹시 음악은 몸을 다 녹이는 것 같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다가도, 차가 떠나갈 듯 큰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무대가 대평원이다. 대평원을 시속 150km로 질주하면서 듣는 노래는 새로운 차원의 환상적인 공연 그 자체이다. 그게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조화이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퇴락, #대평원, #콘서트, #횡단,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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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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