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36년만에 어렸을적 촌놈들을 만났습니다.
 36년만에 어렸을적 촌놈들을 만났습니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2리. 이 마을은 '나무가 빽빽하다'는 의미의 수밀리(樹密)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왔습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에 살던 아이들은 모두 책보(책을 싸는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같이 싸가지고 20여길 떨어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락 김칫국물이 흘러나와 온전한 책이나 공책이 없을 정도로 늘 얼룩져 있었습니다.

이런 산골이다 보니 부모의 직업은 화전민, 약초 채취 꾼, 산나물 뜯는 사람, 사냥꾼, 나무꾼, 고물장수 심지어 땅꾼(전문적으로 뱀 잡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참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아이들은 선생님이 부모의 직업을 물을 때 늘 대답에 궁색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환경이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을 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의 진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공업사(작은 공장)에 취직을 하는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고 대부분 자장면 배달이나 식당의 접시닦이 등으로의 진출을 숙명처럼 받아 들였습니다.

셀마라는 프랑스제 고급 색소폰, 소양강처녀를 연주해야 제 맛

어렸을 적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한 친구의 주선으로 수밀리 싸리목이란 골짜기 계곡에서 모임이 마련됐습니다. 36년 만의 재회, 세월은 못 속인다고 얼굴에는 늘 땟물이 줄줄 흐르던 꾀죄죄한 꼬맹이들이 중년의 모습으로 만난 겁니다. 우연히 지나쳤으면 몰라봤을 정도로 변해 버린 모습들. 이렇게 모인 우리 7명은 겨우 이름만 기억하며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만나자마자 다리 밑 냇가에 자리한 우리는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여 마치 누구 기억력이 더 좋은지 테스트라도 하려는 듯 옛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라 화기애매한 분위기가 되었을 즈음, 이날의 행사를 주선한 친구가 차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내리더니 순식간에 설치를 마쳤습니다.

한 친구의 멋드러진 섹소폰 연주
 한 친구의 멋드러진 섹소폰 연주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짜식들아! 이게 그 유명한 프랑스제 셀마라는 라는 거야, 인마."

묻지도 않았는데 색소폰 자랑을 늘어 놓더니 멋지게 연주를 해 볼 테니 들어보랍니다. '저 정도 수준의 악기라면 클래식 정도의 상당히 수준 높은 음악을 연주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순식간에 깨졌습니다. 그렇게 명품 자랑을 늘어 놓더니 연주곡은 소양강 처녀. 과연 녀석 다운 발상입니다.

어렸을 때 개구리라는 별명을 가졌던 친구

이 녀석이 오늘 기사의 주인공인, 어렸을 적 개구리라는 별명을 가졌던 이경우라는 친구입니다. 녀석의 별명이 개구리인 건 당시 군것질거리도 특별한 게 없던 시절인지라(군것질 거리가 없다는 것보다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은 적이 없기에) 개구리를 구워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간식으로 먹었기 때문으로 기억됩니다. 다리 한 쪽만 달라고 사정을 해도 주지 않으니까 친구들이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 이 녀석에게 초등학교 6년 내내 개구리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어린시절 이 아이는 우리보다 더 환경이 어려운 친구였습니다. 나와는 초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였기에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소주 한잔을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아이 역시 초등학교 졸업 후 상경. 친척의 주선으로 서울 성수동 어느 작은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녀석에게는 그것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고 순리였습니다. 당시 1만 원도 되지 않는 월급을 모두 집으로 보내는 것이 장남으로서 해야 할 의무였고 역할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년간 공장생활을 하면서 국방의무를 위해 귀향하기까지 그 흔한 구두 한 켤레나 옷 한 벌 제대로 사 본적이 없었습니다.

"밤색 점퍼를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당시 자주 찾던 밥집 아주머니는 항상 밤색 점퍼를 입고 다니는 그를 보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차마 이 옷을 3년째 입고 있는 거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했답니다. 그만큼 자신의 월급에 의존하는 부모님, 동생들의 생활고 해결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소 한 마리 판돈 100만 원으로 용감하게 상경했지만...

단기복무를 마치고 그는 '다시 공장으로 복귀를 할까, 아니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버님! 저 사업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소 한 마리만 팔아 주세요."

"이 미친놈아~ 니 동생 세 명은 어떻게 하고 소를 파냐! 이건(소는) 니 동생들 공부시킬 자본이니까 그런 소리 하지도 마라!"

당시 시골에서 소는 재산이며, 아이들을 공부 시킬 밑천이었으니 부모님 반대는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내게 소 한 마리(다섯 마리 중)만 팔아 주시면 맹세코 열 마리로 만들 테니 믿어달라'는 설득으로 결국 부모님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25살. '소 판돈 100만 원을 들고 서울 신정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우유배달을 하기로 하고 우유 보급소를 찾아 보증금을 내고 나니까 2000원이 남더라. 그래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기에 냄비랑 숟가락을 샀다"는 것이 녀석의 말입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죽어라 열심히 우유배달을 한 결과는 월세 내고 친구에게 빌려줘 떼이고 해서 결국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옛날에 배운 기술을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인천제철에 경력사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학력은 대충 속이고 숙련공이란 조건으로 입사를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기계나 부품에 영문으로 쓰여진 용어도 제대로 모른다'는 게(학력을 속인 게) 들통 날 것 같은 생각에서 몇 달 만에 그만두고 식자재 배달업 종업원으로 취직을 해 음식업 유통구조에 대해 배워 나갔습니다. 이후 어렵게 대출을 받아 천호동에 고향식당이란 해장국집을 열었는데, 딱 1년 만에 망했습니다. 유통구조만 알았지 마케팅이나 서비스에 대한 연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개구리도 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진리

소 판돈 1백만원에 성실을 보태 이루어 놓은 결실
▲ 이경우 소 판돈 1백만원에 성실을 보태 이루어 놓은 결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결국 소 판 돈 다 날리고 수백만 원의 빚까지 져 이젠 명절 때도 고향에 내려갈 구실을 잃어 버렸습니다. 시골집에 내려가려면 어떻게든 본전(소 판돈)은 찾아야 할 판, 지인의 도움으로 어느 낙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월급은 받지 않고,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딴엔 고집이 있어 왜 식당이 망했는지를 배우기 위함에서였답니다. 그런데 4년간 이곳 주방에서 일하며 주방장에게 이것저것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더라는 겁니다.

5년째 되던 어느 날 그의 성실성에 탄복을 했는지 주방장은 그를 조용히 불러 낙지 요리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고, 한 달간을 노트 한권 정도의 분량으로 메모를 해, 이후 일원동에 낙지 전문점을 하나 차렸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가계를 임대하고 문을 열자마자마자 인근에 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손님들로 파김치가 되어도 연일 즐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어느 정도 음식점 틀이 잡히면서 일원동 음식점은 막내 동생에게 넘기고 수서동에 '갯마을'이란 간판을 걸고 새로운 산낙지 음식점을 열었습니다.

"많은 실패와 좌절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 교훈이다. 어떻게 하면 타 음식점과 차별화할 수 있는지 밤을 새우기를 수차례,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5년여 그 고생을 한 결과 5호점까지 분점을 확장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시골(수밀리)에 계신 부모님께 집을 하나 근사하게 지어 드리고, 이 모든 것들이 소 한 마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소도 함께 사 드릴까 하다가 '소는 누가 키우냐'는 말이 있듯이 연로하신 부모님께 소를 사 드린다는 것은 불효 같다는 생각에서 접기로 했습니다.

내가 직원들을 믿고 직원들이 나를 신뢰하면 그것은 최고의 직장입니다.
 내가 직원들을 믿고 직원들이 나를 신뢰하면 그것은 최고의 직장입니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지금 우리 식당에는 종업원이 12명이 근무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2명 모두 5년 이상의 장기근속자들이다. 아마도 내가 살아오면서 고생한 과정을 생각해 웬만한 잘못은 서로 덮어주고, 눈빛만 봐도 그 직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지게 된 것이 종업원들이 사장인 나를 믿고 동료들 간 신뢰가 형성되어 모두 내 집처럼 생각하기에 장기근속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도 직원 조회시간에 '가능한 오랜 기간 이곳에 머물 것이 아니라 충분히 배웠으면 가게를 내는 사람에게는 기술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과는 창업 또는 분점을 내겠다고 용감하게 뛰쳐나간 다수의 종업원들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도 말한다.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남들이 놀때 같이 놀고 쉴 때 같이 쉬면 100이면 100 모두 실패한다. 매일 밤을 새워 고민하고 동종업종과 차별화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라" 

"어이 친구! 미꾸라지도 용 되기 힘든 세상인데, 남들하고 똑같이 해서 과연 개구리가 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녀석의 말이 내가 살아온 과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운처럼 머리에 맴돕니다.


태그:#화천군, #이경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밝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오마이뉴스...10만인 클럽으로 오십시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