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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건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매점에서 팔던 50원짜리 뜨끈한 우동 국물에 가지고 간 밥을 말아 먹으며 공부하던 곳.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주로 갔던 곳은 도서관의 열람실이 아닌 정기 간행물실이었다. 한여름날 선풍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에 땀을 흘리면서도 열심히 정독을 한 것은 '주부'와 '레이디'가 들어가는 두세 가지의 여성잡지. 그중 책 말미에 꼭 나오는 남녀상열지사의 내용이 담긴 상담코너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잡지의 판매촉진을 위해 기자들이 만든 자극적이고 작위적인 내용들이지만 당시 사춘기의 중학생에겐 여성들의 자극적인 성 고민 이야기가 도서관에 오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빌 게이츠가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어릴적 동네 도서관 덕분이라던데, 내게 여자를 알게 한 생생한 성교육(?)을 해준건 사춘기적 동네 도서관 덕분이라고 할까.

수도권 전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 1번 출구에 내려 찾아가는 20여 분 정도의 다채로운 거리는 정독 도서관 가는 길을 즐겁게 한다. 대로변에서 살짝 안쪽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지금껏 보아왔던 서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 길은 도시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거리 삼청동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길 이름이 써있는 이정표를 보니 '화개길'이다. 꽃 피는 길이라니, 길위를 걷는 꽃 같이 화사한 아가씨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고보니 정독 도서관이 있는 동네 이름도 꽃 피는 동네 '종로구 화동'이다.

유서깊은 한옥집과 오래된 교회, 예쁜 카페와 옷가게들, 크고 작은 미술관에 도서관 앞에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떡볶이, 라면, 돈가스를 파는 분식집들··· 상점의 쇼윈도를 기웃거리며 미술관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분식의 유혹에 잠깐 빠지다보니 정작 한시간 반이 훌쩍 넘어서야 정독 도서관에 도착했다. 

정독 도서관 찾아 가는 길엔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 참 많다.
 정독 도서관 찾아 가는 길엔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 참 많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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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도심의 부산함과 뜨거움을 뒤로 하고 도서관에 들어서면 이런 나무 그늘의 품이 맞이해 준다.
 한여름 도심의 부산함과 뜨거움을 뒤로 하고 도서관에 들어서면 이런 나무 그늘의 품이 맞이해 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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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막, 물레방아, 등나무 그늘의 정원이 반겨주는 곳

도서관 입구에 웬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교육 박물관' 안에 들어가면 삼국시대의 교육에서부터 근대교육까지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70~80년대의 학교 교실, 문방구, 운동회날, 소풍 장면 등이 정겹게 재현되어 있다. 특히 교복 자유화 이전에 학생들이 걸쳤다는 교복과 책가방, 신발들의 촌스러움에 웃음이 튀어 나온다. 교복은 사라졌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3년간 나를 '고딩군인'으로 만들었던 교련복을 보니 새삼 어릴적 친구들과 '낑낑마' 교련 선생님이 떠오른다.  

도심의 부산함을 뒤로 하고 도서관 입구에 들어가 타고 갔던 자전거를 거치대에 묶어두고 보니 누가 지었는지 도서관 이름이 너무나 도서관답다, '정독(正讀) 도서관'. 딱딱한 관공서 같은 도서관일까봐 걱정일랑 말라는 듯, 도서관의 너른 마당에 푸르른 나무들이 참 많이 서있다. 햇살이 비켜가는 나무 그늘 밑으로 천천히 걷자니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달구어진 머리와 등짝이 시원해진다.

봄엔 흩날리는 벚꽃나무 아래서 야외 음악회가 열리기도 하고, 가을엔 단풍의 색채로 변신해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여주는 마당으로 삼청동에서 계절을 느끼기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다. 마당이 아니라 정원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겸제 정선이 여기 정독 도서관 자리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인왕제색도'를 그렸다고 써있는 석비(石碑) 앞에 서서 나도 저 앞의 인왕산을 바라보며 나름의 구도를 잡고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또한 정독도서관의 잔디밭은 갑신정변의 혁명가 김옥균의 집이 있었던 자리란다.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 읽기...더운 여름날 이런 피서도 좋을 것 같다.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 읽기...더운 여름날 이런 피서도 좋을 것 같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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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마당의 큰 나무 그늘 아래 원두막을 만들어 놓아 보기에도 정겹고 시원하다.
 도서관 마당의 큰 나무 그늘 아래 원두막을 만들어 놓아 보기에도 정겹고 시원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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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에 피어나 달콤한 꽃향기를 날리는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한 아가씨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여 하마터면 말을 붙일뻔 했다. 정원이 워낙 넓어 보기에도 시원한 연못과 분수대, 물레방아까지 있고 매미가 자장가처럼 길게 울어대는 큰 나무 밑에 만들어 놓은 원두막엔 몇몇 사람들이 누워 아예 낮잠을 즐기고 있다. 정원 한쪽엔 옛날엔 관아였다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도 있어서 도서관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잠시 이곳이 도서관임을 잊을 뻔했다.

알고 보니 정독 도서관은 원래 경기 고등학교 교정이었던 곳으로 학교가 다른 동네로 이전 하면서 1977년에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났단다. 도서관 건물도 학교 건물을 그대로 살려 공부를 하는 열람실도 많고 각종 문화, 예술 활동을 위한 공간이 많다. 비로소 도서관 본관 건물입구에 들어서니 며칠 전 인상적으로 읽었던 책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쓴 저자와의 만남 이벤트를 알리는 포스터가 보인다. 도서관에서는 정기적으로 책을 골라 강연회를 하는데 이런 도발적인 내용의 책을 고른 도서관의 안목에 벌써부터 맘에 드는 곳이다.

단체나 개인 누구나 작품 전시를 할 수 있는 정독 도서관의 열린 갤러리
 단체나 개인 누구나 작품 전시를 할 수 있는 정독 도서관의 열린 갤러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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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열린 갤러리가 있는 도서관

도서관이 크다 보니 1층에 안내 데스크가 다 있다.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 3층에 있다는 '정독 갤러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도서관 안에 갤러리가 있다니... 기대감에 차서 한걸음에 계단을 올라가보니 정말 예전엔 교실이었을 곳에 정독 갤러리가 있다. 게다가 보통 갤러리라고 하면 작가나 예술가나 전시를 할 수 있는데 이 갤러리는 단체나 개인 누구도 자기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작품 전시는 일주일 단위로 하며 도서관 홈피에 신청 방법 및 전시 일정이 잘 나와 있다.

갤러리 옆방에선 사람들이 손짓 발짓을 하며 한창 무언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도서관에서 연극공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란다. 그렇다고 직업적 연극인들은 아닌 '시민 배우'들로 도서관에서 지원하고 '나는 시민 배우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것. 책 한 권을 정해 이를 연극으로 만들고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을 연극배우로 참여시키는 방식이 꽤 흥미롭다.

'족보실' 실장님이 방문객에게 족보와 관련된 자료들을 잘 설명해 주신다.
 '족보실' 실장님이 방문객에게 족보와 관련된 자료들을 잘 설명해 주신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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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 갤러리의 안내와 설명을 해주신 직원분이 한 번 가보라며 알려준 데가 바로 '족보실'이다. 족보라고 하면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시험 정보지로 알고 있는 요즘 시대에 매우 이채로운 곳이다.

족보실에서 일하는 실장님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는 웬 젊은이가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는게 반가웠는지 족보와 관련된 오래된 자료들을 가져다 보여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옛날 족보엔 여성들의 이름이 없는데 예외적으로 전주 이씨 집안의 족보엔 여성들의 이름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단다. 자기 성의 본관과 파만 알고 족보실로 오면 우리 집안 족보를 볼 수 있다.  

입시 공화국답게 도서관도 세태에 맞추어 각종 시험, 자격증, 취업 공부하는 사람들만 있는 '삭막한 곳'으로 알았던 내게 오늘 정독 도서관은 여러 모로 다시 보게 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책만 읽기에는 아까운 도서관이다. 더구나 요즘같이 무덥고 짜증나는 여름날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곳이기도 하다.


태그:#정독도서관, #정독갤러리, #족보실, #종로구 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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