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자는 3월 5일부로 5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으며, 5월 2일부로 현재의 회사를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무작정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의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고작 2개월 밖에 쉬지 않고 또다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개월간 백수로 살며 겪은 경험담을 싣습니다...<기자말>

3월 7일. 백수가 된 뒤 처음 맞는 평일의 아침. 5년 동안 새벽같이 나가던 회사를 갑자기 안 나간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휴가나 월차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는데 평화로운 듯 하면서도 불안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조급한, 정반대의 감정들이 교차하는 그런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극복될 기분일까?

백수로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내의 가계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의 한 달 지출액을 알기 위함이었는데, 고정적인 벌이가 사라진 나의 입장으로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나의 퇴직금을 가지고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표 내기 전 계획처럼 1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을까? 혹여 아내가 나 몰래 많은 비자금을 마련해 두지 않았을까?

아내와 함께 꼼꼼하게 가계부를 살펴본 바, 비자금은커녕 우리 가계의 한 달 고정비는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식구들의 보험부터 시작해서 우윳값, 달걀값, 거기에다가 한창 지출되는 경조사비까지. 그나마 모유를 먹이고 종이 기저귀를 최소한으로 쓰고 있으니 망정이지 남들처럼 분유값과 종이 기저귀 값까지 지출해야 한다면 과연 내가 백수의 상태로 쉴 수나 있을지 의문부터 들었다. 상황이 이런데 아내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내게 퇴직해도 된다며 기꺼이 찬성했던가.

어쨌든 그렇게 계산한 결과 저축이나 보험 등을 깨지 않고 순수하게 나의 퇴직금으로 우리 가계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약 6개월이었다. 비록 계획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쉬고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되겠지.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착각이었다. 이 땅에서 백수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수의 신용카드 만들기

까다로워진 카드발급조건
▲ 백수는 만들기 어려운 신용카드 까다로워진 카드발급조건
ⓒ S카드사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백수의 서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3월 말 에어컨을 살 때였다. 아내와 난 곧 태어날 둘째와 천방지축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첫째를 위해 에어컨을 사기로 결정했고, 이를 위해 모 전자제품 대리점에 들려 제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가격과 탄소배출량, 에너지효율등급, 절전 기능 등을 고려해 제품을 선택한 아내. 게다가 점원은 S카드로 결재하면 10만 원이나 더 아낄 수 있다며, 우리에게 신용카드 만들기를 권했다. 당연히 혹할 수 밖에.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점원은 내게 대수롭지 않은 양 신용카드를 만들면 된다고 했지만, 정작 나와 통화한 카드사 여직원은 내게 카드를 발급할 수 없다고 했다.

"고객님, 현재 회사를 다니시나요?"
"10일 전에 그만뒀는데요."

"그럼 재산세를 내신 적은 있으신가요?"
"재산세요? 재산이면 전셋값하고 상관없는 거죠? 집이 없으면 재산세도 없는 건가?"

"그럼 건강보험료를 납부한 적이 있으신가요?"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서 아직 제가 건강보험료를 납부한 적은 없는데요."

여직원의 이야기인즉, 신용카드를 만들려면 위의 세 가지 조건 중 최소한 한 가지는 충족시켜야 하는데 난 하나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카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밀려드는 자괴감. 그래, 한 때는 개나 소도 만들 수 있다는 카드이건만 지금의 나는 그런 카드도 만들지 못한단 말인가. 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나같은 백수는 스스로의 신용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 인사팀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녀석은 내가 아직 공식 퇴직 처리가 되지 않은 상황이니 카드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다시 카드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아까 전화한 사람인데, 제가 아직 퇴직 처리가 안됐다고 하네요. 확인하시면 되고요, 그럼 카드는 만들 수 있는 거죠?"
"고객님 죄송합니다. 고객님은 신용불량자로 표시되어 있네요."

"예? 신용불량이요? 지금껏 대출 한 번 한 적 없고, 카드비 연체 된 적도 없는데 왜 신용불량이죠?"
"죄송합니다. 오늘이 주말이라 그건 제가 확인해 드릴 수 없네요."

머리 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아니, 백수면 백수지 그게 왜 신용불량의 조건이 된단 말인가. 그네들이 내 은행계좌의 잔고라도 다 살펴 보았단 말인가.

난 카드사 직원을 상대로 따지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신용불량이라면 처음 통화했을 때부터 안 된다고 했어야지, 이건 결국 아까의 통화 내용을 가지고 신용불량 리스트에 올렸다는 이야기인데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난 3~4명을 상대로 따진 결과 카드사 직원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고 S사 신용카드를 만들어 10만 원 할인된 금액으로 에어컨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신용카드를 만들었음에도 나의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어쨌든 정부는 신용불량자의 양산을 막기 위해 카드발급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었고, 카드사는 이를 준수한 것인데 나는 그 조건에 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끝도 없는 상실감이 몰려 들었다. 아무리 백수라고 하지만 내가 사회에서 이 정도 밖에 취급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그럼 카드도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게 하면서 건강보험은 더 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백수는 보험비도 아깝다

내가 백수가 되었음을 가장 처음 느낀 순간
▲ 낯선 국민건강보험 내가 백수가 되었음을 가장 처음 느낀 순간
ⓒ 국민건강보험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두 번째 시련은 우편물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되지 않은 3월, 갑자기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우편물 한 장이 날라왔다. 그것은 청구서 비슷한 것이었는데, 직장 월급에서 공제하던 보험금을 지역에다 개인적으로 지불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회사 인사팀에서 일괄적으로 하던 세금 관리가 이제는 나 개인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내가 직접 내야 하는 건강보험. 의아한 점은 직장 가입자와 지역 가입자의 금액이 다르다는 점이었고,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지역 가입자가 직장 가입자다도 더 비싼 보험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퇴직을 하면 상식적으로 돈이 더 없을 텐데 왜 직장 가입자보다 지역 가입자 건강보험이 비싼 거지?

단돈 100원도 아까운 백수의 입장에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설명은 여기저기 나와 있었다. 바로 지역 가입자와 직장 가입자의 보험료 산정 방식이 다르다는 것. 즉, 직장 가입자는 근로소득(비과세액 제외)을 기준으로 보험료가 산정되는 반면 지역 가입자는 종합소득을 기준으로 보험료가 산정된다. 따라서 직장 가입자는 보험료 산정 시 부동산이나 전월세, 자동차 등 재산이 고려되지 않는 반면 지역 가입자는 재산이 고려된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백수인 내게 직장을 다닐 때보다 더 많은 보험금을 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보험과 관련해서는 실업급여를 받지 못해 정부에 대해 불만이 많은 터였다.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 두면 고용보험의 실업급여를 못 받는다지 않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한 개인이 회사를 그만 두면 그 다음 취직할 때까지 생계를 보장해주는 차원에서 실업급여를 준다는데 우리 나라는 비정규직에 대한 지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전의 회사가 최소한 돈 나가는 것에 대해서만은 깐깐했던 지라 대충대충 인사팀 동기에게 이야기해 실업급여가 가능한 서류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들은 그만 두기 전 회사에다 잘 이야기해서 실업급여도 탄다고 하던데, 내가 다녔던 회사는 그와 같은 여지가 전혀 없었다. 회사가 어렵다고 각서 쓰고 20% 연봉도 깎였는데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결국 지역 가입자로서 건강보험료를 지불하게 된 난 국민건강보험공단에다가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툴툴거리며 신세 한탄을 했다. 직장 가입자 때보다 돈을 더 내려고 하니 너무 억울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랬더니 담당자는 임의계속가입자 제도를 가르쳐주었다. 국가가 1년 이상 회사를 다닌 실업자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해 직장 보험료가 지역 보험료보다 적을 경우 1년 동안 직장 보험료 기준으로 돈을 내게 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일 수밖에.

전화를 끊고 당장 아내와 함께 건강보험공단에 가서 보험료를 지불하고 나왔다.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백수 입장에서 보험료를 내려니 버겁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갓 회사를 그만 둔 나도 이 정도인데 오랫동안 취직을 하지 못한 이들은 꼬박꼬박 보험료를 낼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과연 정부는 이와 같은 경우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한 적이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겪는 백수로서의 서러움. 그러나 더 큰 난관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장모님의 따가운 눈빛이었다.


태그:#백수, #실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