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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마신 칭기즈칸 보드카의 숙취에 속이 쓰리고 입맛이 없었다. 어제까지 잘 먹다가 속이 뒤집히는 바람에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이국의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코에 쏙쏙 들어왔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인삼차를 한 잔 마시고 속을 달랜 뒤, 똑순이에게 "속이 뒤틀려서 아침을 못 먹겠다"고 하니까 "그럴수록 더 먹어야 해"라며 강제로 식당으로 끌고 내려갔다.

 

앙가라 호텔 아침 메뉴는 식빵과 샐러드, 햄, 소시지, 홍차 등이다. 웨이터가 주전자를 들고 와 컵에 따끈한 우유를 따르기 시작한다. 박순일 원장이 "이건 양젖"이라는 바람에 기겁해서 사양했다. 우유도 속이 뒤집힐 판에 양젖이라니.

 

"난 커피나 한 잔 주세요. 속이 안 좋아서."

 

커피 한 잔과 뜨거운 홍차를 홀짝거리며 아침을 때우고 짐을 꾸려 몽골 노동복지부 방문에 나섰다. 그 후 칭기즈칸 동상을 구경하고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출발해서 게르에서 하루 묵는단다.

 

오전 11시 30분에 방문을 마치고 노동복지부건물을 나서는 우리 앞에 웬 피자와 치킨 상자가 수북하게 배달됐다. 일정표에 점심이 2시부터 3시 30분 사이에 하기로 돼 있었는데, 우리 배고플 것이 걱정된 초이질 국장이 배달시킨 거란다. 초이질 국장의 자상하고 훈훈한 얼굴이 떠올랐다.

 

"어라? 미스터 피자와 미스터 치킨이네. 우리나라 미스터 피자가 몽골까지 진출했어?"

 

우리 일행 12명, 세미나에 참석한 브리야트 공화국 2명, 나라 교수까지 15명이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피자와 치킨을 먹기로 했다. 가격을 살펴보니 한국과 똑같다. 피자 한 판에 2만 8천 원, 치킨 역시 싸지 않은 한국 가격 그대로다. 피자 5판, 치킨 5마리, 감자튀김, 특이하게 사과 주스까지 같이 배달됐다.

 

"몽골 물가로 치면 엄청 비싼 건데 초이질 국장님이 우리 입맛 안 맞을까봐 피자에 치킨까지 이렇게 많이 배달시켜 주셨네."

"언니 이거 20만 원이 넘어."

 

몽골 교수 월급이 5,60만 원 정도이며 고위공무원도 그 정도일 거라는 짐작이지만 몽골 국민 소득 수준이 우리나라의 1/10에 불과한 실정으로 보면 큰돈이다. 이 커피숍만 해도 원두커피 한 잔에 1500~2000원이니 몽골 서민이 이용하기엔 부담이 되는 액수다.

 

피자를 좋아하는 나는 피자 한 조각 먹고 잃은 식욕을 다스리려던 생각을 접어야 했다. 한국 피자와 다른 몽골 향이 섞인 냄새가 민감한 내 코에만 들어오는 거다.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치킨 한 개 집어 겨우 먹고 커피로 위를 달래야 했다. 심지어 사과 주스조차 구역질이 치밀어 마시지 못했으니, 참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제법 많이 남은 치킨과 감자튀김을 알뜰한 똑순이가 능숙한 솜씨로 빠르게 착착 모으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일제히 박수갈채가 나왔다.

 

"역시, 최고!"

"파주 여자  둘 안 데리고 왔음 어쩔 뻔 했냐구요."

"맞아!"

 

우리의 똑순이는 이미 공항에서 공동비용으로 쓸 돈을 걷는 일부터 걷어 부치고 나서더니 급기야 일행 12명의 회계까지 넘겨받아 처리하고 있을 만큼 똑 부러진 실력을 인정받았다.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진을 맡았다.

 

거대한 칭기즈칸 동상

 

일행을 태운 미니버스는 비포장이나 마찬가지인 2차선 도로를 달렸다. 펼쳐지는 초원과 새하얀 구름, 양떼와 염소떼, 소떼, 말떼가 말 그대로 떼로 몰려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몽골의 소와 말은 크지 않다. 소나 양이나 말이나 내 보기엔 몸집이 비슷비슷하다. 차창 밖을 내다 보다 푸른 초원에 말이 나타나면 나는 짐짓 아이처럼 소리쳤다.

 

"야! 말이다!"

"저건 소예요."

 

옆에 앉은 나라 교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말치곤 꼬리가 짧다.

 

"야! 양이다!"

"소예요."

"야아, 소다!" 

"말, 말…."

 

나라 교수는 킥킥 웃었고 3번을 연거푸 틀린 나는 시무룩해져서 더 소리 칠 기분이 사라졌다. 초원은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고 소나 말, 양들이 모여들어 물을 마셨다.

 

"몽골은 비가 오면 좋아해요. 올해는 비가 많이 왔어요. 저 구름 보세요. 한국엔 저런 구름 없죠."

"한국에도 저런 구름이야 있지."

"있어요?"

 

나라 교수는 한국에 2년 있었지만 서울에 주로 머물렀을 거고 한국 가을의 드높은 푸름과 솜털 같은 뭉게구름을 보지 못했던 듯싶다. 몽골의 뭉게구름은 초원 지평선과 맞닿은 푸른 하늘에 더욱 넓고 선명하게 보인다. 

 

칭기즈칸 동상은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공적인 공원, 건물, 동상, 기념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동상을 봤을 때도 "아, 많이 크네"하는 느낌 외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기념관 안에 있는 박물관의 뿔이 멋진 사슴과 동물들의 청동기 유물이 더 흥미를 끌었다.

 

나라 교수는 이 칭기즈칸 기념관은 현직 장관이 세운 개인 박물관이라고 설명해줬다. 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도 장관이 수집한 거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 테를지 국립공원

 

테를지 국립공원은 기암괴석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이며 몽골을 찾는 여행객들이 반드시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가는 도중, 곳곳에 게르와 펜션, 방가로를  공사하는 곳이 많은 걸로 보아 '몽골 관광객이 많이 증가하고 있구나' 짐작했다. 2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윤 박사는 오는 도중 그랬다.

 

"게르에서 하루 자는 건 좋다고 하겠지만 이틀은 글쎄…."

 

신경이 예민해져서 안 맡던 온갖 냄새에 시달려 구역질을 참고 있는 나에겐 게르가 별로 반갑지 않았다. 배낭 여행자들이 전통 게르에서 불편하게 묵은 경험을 쓴 글을 너무 많이 본 탓일 게다.

 

그러나 우리가 머물 테를지 '바트칸 캠프'게르는 관광객용이었고 걱정했던 화장실 시설은 잘 돼 있었으며 씻을 물도 잘 나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게르 한 채에 3명이 자야 한다고 해서 똑순이와 나, 나라 교수가 6번 게르에 짐을 풀었다.

 

 

"승마 할 사람 신청하세요.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 말을 타고 저녁을 먹을 거예요."

 

나라 교수의 경쾌한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말을 타겠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친 나는 고개를 흔들고 게르에서 쉬겠다고 했다. 게르 안에는 작은 침대 3개와 철제 난로가 중앙에 놓여있었다. 침상에 있는 양털 담요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문을 열어놓고 치미는 헛구역질을 겨우 삼키며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언니! 말 타는 거 넘넘 재밌었어! 좀 괜찮아?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생기발랄한 똑순이 목소리에 비몽사몽 중에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몸이 안 좋다는 걸 일행들에게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했다. 몽골 전통 음식'허르헉'이 식탁에 올랐다.

 

"이 양고기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

 

똑순이가 연신 탄성을 지르는 소리에도 난 단 한 점을 입에 대지 못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 식사 자리에 데 바야르새홍 노동복지서비스청장이 참석했고 태를지 지역 공무원들이 합석했다. 중앙부처 고위공무원이 오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리고 테이블에는 또 징기즈칸 보드카가 올랐다. 난 속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사양하고 적당히 먹는 척 하다가 중간에 빠져나와 게르로 향했다.

 

헛구역질을 계속 참고 드러누워 있다가 까슬거리는 양털 담요와 주위에서 풍기는 염소, 말의 냄새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냄새는 화장실에서도 풍기고 있었고 먹은 것도 없는 위를 뒤집어 한바탕 토한 후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나라가 팔을 잡는다.

 

"언니, 청장님이 언니 찾아요. 어디 갔냐고 꼭 모시고 오라 했어요."

 

외국에 나가면 쏟아지는 '별 영양가 없는 이놈의 인기'는 몽골까지 예외는 아니었나? 어제 저녁 만찬에서 칭기즈칸 보드카를 신나게 '원샷, 원샷'한 걸 청장이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나라에게 질질 끌려 식당에 들어서자 청장은 웃으면서 대뜸 보드카 잔을 내민다. 아이구, 내가 못 살아. 속이 아프다고 커다랗게 허리를 구부리며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손사레를 쳤다.

 

몽골인들은 생각보다 기골이 장대하다. 춥고 열악한 기후와 싸우며 생존했던 전통 유목민의 기질이 엿보인다. 그날 밤 12시, 하늘에 총총 박힌 무수한 별을 올려다보고 들어온 후에 초원의 추위에 못 이겨 난로에 불을 붙였다. 낮엔 더워서 땀을 흘렸는데 이렇게 춥다니. 

 

새벽 2시가 넘도록 뒤편 게르에 묵은 몽골 젊은 공무원들의 웃음소리와 낭랑한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초원의 게르에 누워 있으면 먼 곳의 소리도 바로 곁에서 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남은 장작을 다 난로에 밀어 넣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잠에 빠져들었다.


태그:#몽골 테를지, #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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