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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그 느낌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그랜드캐니언. 이곳을 바라보면서 아들 셋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그랜드캐니언을 향한 아들 셋의 시선 말로는 그 느낌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그랜드캐니언. 이곳을 바라보면서 아들 셋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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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입니까? 신분증 좀 봅시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레인저(공원 관리원)가 취조하듯 아이들을 몰아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 10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들 셋'은 텐트 앞 나무 의자식탁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1990년생입니다."

윤의가 대답했다.

"신분증 있다고 했죠?"

레인저가 되물었다. 윤의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이 든 지갑을 꺼내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레인저가 옆에 앉아 있는 선일이와 병모에게 거푸 다그치듯 나이를 물었다. 둘은 "다같이 1990년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둘은 현재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레인저가 다시, "여권 같은 게 없느냐"고 되물었다. 윤의가 끼어 들며 "친구들은 여권을 두고 왔다"고 대신 대답했다. 레인저는 윤의에게 "당신한테 묻지 않았다"며 말을 차단했다. 그리고 나서 윤의의 신분증을 보면서, "(술 마시는 제한 연령) 두 달을 넘겼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병모와 선일이에게 생일을 물었다. 병모는 아주 약간 술기운이 있는 듯한 말투로 "3월 5일"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선일이가 "7월 4일"이라고 대꾸했다. 레인저는 재차 물었다. 엉겁결에 가짜로 생일을 댔는지 확인하려는 거였다. 선일이와 병모는 다시 똑같은 날짜를 댔다. 이번에는 일부러 좀 더 엉성하게 영어 발음을 하는 것 같았다. 외국인이니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라는 어깃장 심사가 읽혔다.

해 지기 직전의 그랜드캐니언 동북쪽 지역 모습. 안개로 뒤덮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해 지기 직전의 그랜드캐니언 해 지기 직전의 그랜드캐니언 동북쪽 지역 모습. 안개로 뒤덮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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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잔에 기분 내다가 체포당할 뻔했네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간단하게 밤중 맥주 술판을 벌이다가 일종의 불심검문을 당한 시간은 내가 텐트에 혼자 먼저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워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추적하며, 여차하면 끼어들려고 했다. 소수 인종인데다, 법적으로 미성년을 막 벗어난 나이라 자칫 일이 꼬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소란은 그 정도로 종결됐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술을 전혀 못하는 내가 생각해도 술맛이 있을 리 없었다.

큰일이 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뭔지 모르게 "거 봐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술 못 마시는 아버지를 제쳐두고 저희들끼리 기분 내다가 당할 뻔했으니까. 게다가 미국 국립공원에서 음주는 철저하게 금지된다고 사전 경고를 겸해 단단히 반복적으로 일러두었던 차였는데, 결국 문제가 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큰일로는 번지지 않아, 안도했다. 위스키인지 스카치인지를 마셨던 전날 밤 같았더라면 호된 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미국의 거의 모든 주가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금한다. 헌데 맥주 같은 알코올 도수가 약한 술은, 잘은 모르지만 공공장소에서도 어느 정도 허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 막대한 벌금이나 최악의 경우 체포까지 감수해야 한다. 미국의 법 집행 특성상 예외를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낮 시간 동안 그랜드캐니언을 대표하는 브라이트 에인절스(Bright Angels) 트레일을 다녀왔다. 왕복 14km가 넘는, 7시간 가까이 걸리는 하이킹이었다. 이날 술자리는 어떤 면에서는 그 뒤풀이기도 했다. 전날 숙취에도 불구하고 트레일을 완주한 게 대견했다.

그랜드캐니언 트레일 타기는 등산과 비슷하다. 다만 순서가 다르다. 먼저 계곡 쪽으로 내려갔다가 밑을 찍고, 위로 올라온다. 올라오는 길이 훨씬 힘들다. 더구나 한여름은 열사로 인한 위험도 있어 공원 측도 무리한 트레일 타기를 권장하지 않는다.

헌데 부모 말을 잘 듣지 않을 나이인데도 아이들이 순수하게 내 권유를 받아 들여 트레일을 탔다. 또 사고 없이 완주했다. 해서 예정에 없던 거금 24달러를 쾌척, 맥주를 사줬다. 그런데 일이 꼬여 자칫하면 공원 레인저와 얼굴을 붉힐 뻔했던 것이다.

망원으로 당겨서 찍은 그랜드캐니언의 골짜기 맨 아래쪽 풍경. 깊이 1600미터가 넘는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마치 실개천 같다. 강 주변에는 수분이 풍부해 푸른 숲이 형성돼 있다. 아들 셋은 골짜기 아래, 콜로라도 강과 가까운 곳까지 트레일을 다녀왔다.
▲ 그랜드캐니언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 망원으로 당겨서 찍은 그랜드캐니언의 골짜기 맨 아래쪽 풍경. 깊이 1600미터가 넘는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마치 실개천 같다. 강 주변에는 수분이 풍부해 푸른 숲이 형성돼 있다. 아들 셋은 골짜기 아래, 콜로라도 강과 가까운 곳까지 트레일을 다녀왔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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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사람을 '철학자'로 만드는 그랜드캐니언

그랜드캐니언은 말 그대로 거대한 골짜기로 사람을 단박에 왜소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길이가 400km에 이르고, 계곡 깊이는 1600m에 달한다. 쩍 벌어진 계곡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공간을 가로 지르는 어떤 유무형의 실존을 몸서리가 처질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랜드캐니언을 두 눈으로 접하는 그 순간만큼은 철학자가 돼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이번으로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로 그랜드캐니언을 찾은 것인데, 그때마다 예외 없이 삶이 얼마나 무상한 건지를 절감하곤 했다. 하지만 팔팔한 청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무상함보다는 그랜드캐니언 그 자체를 눈요깃감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랜드캐니언을 내려다보는 아이들에게 요즘 한국에서도 4대강 사업 때문에 이 멋진 그랜드캐니언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고 말하자, 다들 킥킥거리며 한마디씩 한다.

"우리나라는 캐니언도 빨리 만들죠."
"그러면 우리도 4대강캐니언에 관광객 유치하는 거냐?"

물론 비아냥거리는 말들이다. 정치에도 사회에도 전적으로 무관심한 줄만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엄밀히 따지면, 그랜드캐니언이나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강가 혹은 강 언덕의 골짜기나 생성 원리는 다를 게 없다. 둘 다 강물의 침식 현상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랜드캐니언은 지난 500만~600만 년 동안 강물이 무서운 속도로 평지를 깎아먹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번 빨라지기 시작한 물살이 땅을 무려 1600m 이상을 파고 들어가, 위에서 보면 까마득하게 실개천처럼 보이는 콜로라도 강을 탄생시켰다. 그러니 오늘날 그랜드캐니언의 장관은 사실 물이 부린 조화나 진배없다.

다만 4대강 침식으로 인한 골짜기 형성은 인공적이라는 점과 그 규모가 그랜드캐니언의 수천 분의 1도 안 되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리가 같기로서니 4대강 사업을 비판하기 위해 그랜드캐니언을 거론하는 것은, 경외감 그 자체인 그랜드캐니언에는 상당히 실례가 될 수 있는 언사가 틀림없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 지출한 예정에 없던 술값 24달러, 그 돈이 우선 당장 나에게는 아프다.


태그:#그랜드캐년, #철학, #콜로라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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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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