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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추진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강정마을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 폭염의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서울에서 왔고, 어떤 이는 프랑스에서 왔고, 또 어떤 이는 날 때부터 강정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평화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강정마을 찾은 이들을 '자발적 평화유배자'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강정마을로 자발적 평화유배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강정 김씨' 시조가 된 김민수 작가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열흘 동안 제주순례를 마친 그를 강정 주민들은 '강정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열흘 동안 제주순례를 마친 그를 강정 주민들은 '강정사람'으로 받아들였다.
ⓒ 김민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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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왕실 하나 없는 나라에 왕의 후손들은 넘쳐 난다. 돈만 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둘러대는 세상에 '상놈의 자식'은 한 명도 없고 하나같이 '양반의 자손'이다.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등 저마다 내거는 성씨의 본(本)을 따지는 것이 큰 무게를 얻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출신지역, 출신학교를 따진 뒤 반드시 본을 캔다. 본이 같으면 파를 가른 후 항렬에 따라 기어코 아저씨나 조카 따위의 날줄을 엮는다. 심지어 '경주 최씨', '경주 이씨'처럼 성씨는 달라도 본이 같으면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관습헌법의 유령이 아직 떠돌아다니고 있을 정도다. 한국 사회에서 피로 성근 씨족의 유산은 그만큼 강력하다.

그래서 본을 바꾸는 것은 자유지만 실제로 본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자기 고향인 미국 텍사스 사투리 쓰듯 경상도말을 '리얼하게' 구사하는 로버트 할리처럼 귀화한 한국인이라면 몰라도(귀화해서 본이 없었던 그는 '할리'와 발음이 비슷한 '하일'이라는 성명을 얻으며  '(부산)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이 서른둘 총각이 '강정 김씨' 시조된 까닭

2011년 4월, 한국에는 제주도 강정마을을 본으로 한 '강정 김씨'라는 새로운 성이 생겨났다. 시조는 김민수. 그는 나이 서른둘에 새로운 족보 맨 꼭대기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로버트 할리처럼 귀화한 한국인도 아니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해 혼자 살아남아 불가피하게 새로운 성과 본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도 아니다.

강정 김씨 시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시대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의 후손이자 '지방 사람들'의 선망인 '수도권(경기도 안산) 시민'이었다.

본을 바꾸기 위해 재판 받을 때 판사가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 영혼은 이미 강정에 있습니다."

판사는 이유가 추상적이라고 핀잔을 줬다. 구체적인 이유를 대라고 했다.

"강정에 제 인생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판사는 더 이상 구체적 이유를 대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추궁이 필요했겠는가. 그렇게 그는 합법적으로 강정 김씨 시조가 되었다.

오천년 가까이 살로 뼈로 습속화된 혈통을 바꾸는 일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피로 기골을 세우고 살을 채워 사람 노릇을 하고 살아온 이력을 지우는 일이다. 바꾸고 지우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그는 파르르 에리는 마음을 다독이느라 숱한 밤을 뒤척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홀연히 단절의 길을 택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딴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니 왜 그랬을까.

"3년 전 처음으로 강정마을에 와 중덕해안에 섰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한 눈에 반해 버렸어요. 제 잔은 항상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이었는데 강정에 와서 조끔씩 채워지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 이후로 한 번도 뭍에 올라가지 않았어요."

"2세 이름은 강정이라고 지어라"는 강정마을 주민들

마을사람들은 김민수 작가에게 이 곳 구럼비에서 결혼식을 올리라고 권유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섬이 범섬이다.
▲ 강정마을 중덕해안 구럼비 마을사람들은 김민수 작가에게 이 곳 구럼비에서 결혼식을 올리라고 권유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섬이 범섬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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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9년에 <재즈>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만화작가다. 한국 예술계가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만화판'도 도제식 서열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나이 열아홉 살에 자기 작품을 들고 등단했다면 그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증빙하는 것이다.

그 실력을 알아본 일본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2004년 그를 '스카우트'했다. 도쿄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실무를 책임지는 하급 매니저에서부터 원화 작가, 작품 감독 등으로  약 3년 동안 일했다. 제작에 관여한 작품만 24편. 계약금 외에 극장 수익금 등 별도 개런티를 받아 수입이 많을 때는 연봉 1억 원을 넘게 벌기도 했었다고.

남들이 보기엔 부러울 뿐인 도쿄에서의 생활을 그는 "나도 만화작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창작자인데 스폰서가 해달라고 하는 대로만 작업하는 게 너무 재미없다"는 이유로 접었다.

귀국해서 이곳저곳 유랑하고 있던 그를 강정마을로 부른 이는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 역시 만화작가인 고 위원장과는 같은 만화잡지에서 연재를 한 인연이 있다.
2008년 처음 강정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만화 작업을 미치도록 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의 희망사항은 포말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해군기지 반대 싸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은 그를 "민수야!"라고 편히 부른다. 주민들은 중덕해안 앞바다에 배만 나타나도 "민수야, 저 배 해군 측량선 아닌가, 얼른 가서 확인해봐라"고 말한다. 전국 각지에서 보낸 플래카드가 도착하면 "민수야, 플래카드 어디 걸꺼?"하고 묻는다.

그는 시쳇말로 '강정사람이 다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강정사람'이었다. 말장난 같지만 두 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강정사람 다 됐다'고 얘기할 땐 '너 좋은 놈인 건 알지만 너도 언젠가 떠나지 않을까'하는 못미더운 마음이 한 자락 깔려있다. 하지만 '강정사람'이라고 말할 땐 그런 전제도 경계도 없다. 화나면 성내고, 기분 좋으면 함께 술 마시고, 볕 좋으면 함께 물에 들어가면 될 뿐이다.

"'강정사람 다 됐네' 이 단계를 지나서 '드디어 나를 마을사람으로 인정해주는구나'하고 느낀 것이 2010년 도보순례를 끝냈을 때였어요. '해군기지 반대' 깃발 꽂고 한복에 짚신, 상투 틀고 갓 쓰고 열흘 동안 혼자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거든요. 해군기지 절차가 다 끝난 것처럼 보도되고, 도민들도 그렇게 알고 계신 분들이 많았구요. 절박했어요. 그래서 '우린 아직도 싸우고 있다, 강정에서 시선을 떼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다녔어요. 그때 이후로 마을 분들이 저를 '강정사람'으로 받아주신 것 같아요. 요즘은 저보고 '너만은 결혼식을 꼭 구럼비에서 해야 한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2세 이름은 강정이라고 지어라'고 그러시는데 이름이 '김강정'이면 좀…."

마을사람들의 행복한 바람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정에 오지 않았으면 만날 인연이 아닌, 오직 강정이 준 선물"인 연인을 만나 사랑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을 분들 말씀하시는 것처럼 해군기지 몰아내고 문어도 잡고 오분자기도 잡고 자리돔도 구우면서 장가도 가고 평생 강정에서 살 것"이라 했다.

누구나 꿈꾸는 평온한 일상이다. 저항은 그렇게 누구나 꿈꾸는 평온한 일상을 침탈 받은 이들이 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몸짓이다. 그럼에도 저항은 버겁다. 그도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하는 3년 동안 9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졌다. 말은 안 했지만 신장에도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보다 마을사람들의 우울증을 더 염려했다.

"해군기지를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온 마을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해군기지 문제에 쏠려 있어요. 온 신경이 현장에 있는 거죠. 아무리 서로 위로해주고 다독여줘도 신경이 예민해져 표출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술 드시면 우울증 증세가 다들 심해져요. 치료제는 한 가지뿐이에요. 아시잖아요? 정부는 해군기지 건설 당장 중단하고 주민들 치료부터 해야 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해군기지 건설 논란 이후 강정마을 주민의 70% 이상이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으며, 특히 주민 47%는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그 어디도 주민들을 위한 치료프로그램을 가동하지 않았다.

3년 동안 9킬로그램 빠져... 그래도 내 할 일은 강정마을 지키기

법적으로도, 주민들로부터 '강정사람'임을 분명히 인정받은 그는 요즘 자신에게 일감이 몰려와도 즐겁다.

강정마을에 상주하고 있는 '개척자들' 팀과 함께 보트를 타고 비상출동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해군의 기습적인 공사강행을 막기 위해서다. 마을대책위 미디어팀 활동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강정마을의 외로운 싸움이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거대언론의 외면 속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꾸준히 현장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새로 맡은 <강정마을신문> 편집장 역할에 대한 기대가 스스로 크다. 격주 4면으로 발행될 마을신문엔 우선 강정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많이 담을 생각이다. 그는 마을신문을 "마을사람들이 처한 현실과 해야 할 일을 솔직히 말하는 가장 현실적인 신문"으로 만들고 싶다. 기회가 되면 만평도 직접 그려볼 생각이다.

그는 "해군기지 싸움이 끝나면 강정이야기를 담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한다. '만화작업을 미치도록 하고 싶었던' 그는 그동안의 강정 상황과 풍경, 사연을 촘촘히 기록해 두었다. 그는 "꼭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강정에 평화를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감성을 글이든 그림이든 강정에 풀어둘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내어놓겠다는 그에게 강정 김씨 시조로서 미래의 후손들에게 남기고픈 말은 없냐고 물었다. 한 치 주저함도 없이 그는 말했다.

"강정을 지켜라, 내가 했던 것처럼! 그리고 너희들의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줘라."


태그:#강정마을, #김민수, #해군기지, #제주도,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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